아랍 교회 담임목사로 살기
아랍 교회 담임목사로 살기
  • 김동문
  • 승인 2007.07.0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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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날씨 요즘 무척 더워졌어요.” 시애틀을 찾았을 때 그곳에 계신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러나 날씨는 차갑게 때로는 너무 시원하게 느껴졌다. 사실 요르단이나 중동 날씨에 비한다면 너무 쾌적하기 그지없는 날씨였다. 어느 자리에 서서 보느냐, 느끼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도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된다. 입장 바꿔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중요한 일이다.

안과 밖이 다른 사람

같이 있을 때는 싸우기도 하면서 밖에 나가서는 왠지 그립고 반가운 사람들이 있다. 아침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서면서 종종 하던 기도가 있다. 오늘은 욕을 조금만 하게 해달라고. 차를 운전하는 중에, 아니면 다른 상황에서 난감하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믿음의 동역자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비난이라도 할라치면 변명하느라 열심을 내기도 한다.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요르단이나 중동을 떠나 다른 지역을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마음을 두는 곳이 있다. 그것은 아랍인들이 몰려있는 곳이나 이른바 이슬람 지역이다. 생활 지역을 돌아보고, 사원을 방문하고 아랍인이나 무슬림을 만나 대화 나누는 시간은 방문 지역의 명승고적을 방문하는 것보다 더 좋기만 하다. 이른바 일종의 직업병이고 중독 증세를 앓고 있는 셈이다.

지난 5월 말에서 6월 초 미국 북동부 시애틀 인근의 한 이슬람 사원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이슬람권 이민자들의 이민자로서의 삶과 신앙, 아픔과 기쁨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 방문을 통해 예루살렘 출신의 이민자 무함마드를 만났다. 무함마드는 37세로 이민 온지 25년이나 되었다. 이슬람 사원의 이맘 쉐이크 파델 하싼이 내가 요르단에서 왔다고 하니 전화로 무함마드를 부른 덕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낯선 이방인을 보기 위하여 무함마드는 기꺼이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찾아준 것이다.

나였다면 멀리서 한국말을 하는 한 외국인이 왔다고 하여 일손을 멈추고 그 외국인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무함마드와 두 번째 만남을 가진 후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텐데 그 목적을 발견하여 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축복하고 헤어졌다. 무함마드가 고맙다.

반유대주의자는 반유대인?

나는 유대주의에 호감을 갖지 않는다. 유대주의 입장을 유대인들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주의 입장을 갖는 것에 대해 호감이 가지 않는다. 사실 무엇을 유대주의로 규정할 것인가도 단순하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하게 선택하셨다는 생각 그 자체를 유대주의로 말한다면 나는 유대주의자이다. 그러나 혈통주의, 그릇된 배타적 선민주의를 유대주의라고 말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얼마 전 선배 사역자를 통해 건너 건너 전해들은 이야기는 내가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6월 초순 중동 세미나를 진행하던 장소에서 겪은 일이다. ‘김동문은 반이스라엘이다?’ 그럴 수도 있다. 상대방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 느낌까지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느끼는 어떤 느낌 모두에 이른바 전달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이스라엘 현 정부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예후드 바락 전 총리 정권의 팔레스타인과의 땅과 평화 교환 정책은 지지한 적이 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안겨주는 것일까?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 정권을 지지하면 친한파이고 반대하면 반한파가 되는 것일까? 정치적 입장 차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현 이스라엘 정부의 대외 정책의 한 부분이다.

이스라엘 정부의 어떤 특정 정책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국가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을 미워하는 것과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별개의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정부의 특정 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두고 반유대주의로 단순화시키기도 한다.

이스라엘 안팎에 살고 있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현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반대한다. 이들을 반유대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타 민족을 멸절하거나 무시하는 그런 류의 사상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아랍인이나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멸절사상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듯한 그런 정책이나 폭력성까지 받아들일 그런 여유는 내게 없다.

요르단과 다른 아랍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한다면 나는 요르단 축구팀을 응원한다. 아랍 국가 축구팀과 비아랍 국가 축구팀이 경기를 벌인다면 아랍 축구팀을 응원한다. 그러면 한국과 아랍 축구팀이나 요르단이 경기를 한다면 “한국 이겨라, 요르단 이겨라!” 박쥐가 될 것이다.

이민자의 꿈, 아랍인의 꿈

지금도 요르단 암만 시내 외곽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실 밖은 줄지어 있는 이라크인들과 일부 아랍인들로 꽉 차곤 한다. 정치적인 망명이나 난민의 지위를 얻어 꿈을 찾아 자신들을 받아주는 나라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위하여 이곳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민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낯선 땅에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것일까? 이민자의 꿈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성공’이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지금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꿈을 위하여 낯선 땅을 찾은 것이다. 이슬람권 출신 이민자들도 다른 여타 이민자들과 다르지 않은 기대와 꿈을 안고 살고 있다.

2005년 12월 말에 미국에 기반을 둔 조그비 연구소(zogby.com)에서 아랍인의 사회 정치 관심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3900여 명의 요르단, 레바논, 모로코,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6개국 출신이 그 대상이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개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묻는 항목이었다. 결과는 1위가 가족, 2위가 일자리, 3위가 결혼과 종교, 5위가 친구 등이었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개인의 삶의 우선 관심사로 표현한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이 아니라 모로코인들이었다. 요르단과 레바논인들은 여섯 번째로 종교를 꼽았다.

두 번째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항목이었다. 외국인에 대하여 자신을 소개할 때 무슬림으로서의 종교적인 정체성보다 ‘나는 … 나라 사람이다’는 식의 ‘국민’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아랍에미리트 출신을 제외하고는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먼저 꼽았다. ‘국적’은 종교나 그동안 많이들 이야기해온 ‘아랍인’의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앞서고 있다. 무슬림으로서의 종교적인 정체성을 두 번째로 꼽은 것은 종교성이 강한 모로코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이민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지역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앞서있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이민자의 대열에 오른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른바 무슬림들을 ‘종교’의 시선으로 보지만,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있는 셈이다.

여름은 성수기

요르단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진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여러 곳에서 이곳을 찾는다. 비전 트립, 땅밟기 사역, 섬김 사역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여름철이 되고 방학을 맞이한 덕분이다. 중동과 요르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까닭이기도 하다. 서구 사역자들은 재충전을 위하여 휴가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리를 비우기도 한다.

그러나 한인 사역자들은 지금이 성수기이다. 통역은 물론이고 현지 일정 계획하고 진행하고 이것저것 살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부 사역자들의 경우는 정말 분주하기 그지없다. 언어 훈련 중인 사역자들은 여름철이 그나마 모처럼의 자유 시간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손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단기 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찬성, 반대 입장은 당연히 공존한다. 그런데 그런 판단에 자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개입되곤 한다. 이해당사자(현지인 또는 수혜자) 입장에서 보기보다 사역자(또는 시혜자) 편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조심스럽지만 조금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이 필요할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부름 받아 왔으니…” 너무 영적인 용어를 구사할 것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헌신도 중요하지만 청지기로서의 삶 또한 우리 삶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라고 본다.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다 보니 말이 빙빙 도는 기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오는 이, 맞이하는 이 모두에게 서로 민폐가 되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도 좋겠다. ‘나 없어도 일 잘 된다’는 사실을 서로가 인정할 때 즐거운 동역이 가능할 것 같다. ‘우리 없어도 하나님 일 잘 하신다’는 사실을 서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평소와 달리 단기 팀을 환영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서로에게 덕이 되는 단기 사역을 위한 팁 하나가 있다. 단기 팀의 현지 일정에 필요한 재정을 넉넉하게 채워가도록 한다. 현지 사역자의 주머니를 털게 하고 이런 저런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여호와 이레’를 말하지는 말자.

무늬만 담임 목사

아랍 교회 담임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지난해 말부터 공동 사역으로 시작한 이라크 피난민 교회 사역. 지금은 지난봄부터 단독 담임 목회를 하고 있다. 이라크인 피난민이 중심이 되고 일부 이집트인과 요르단 현지인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사실 아랍 현지인 교회 사역(기독교 배경을 가진)은 나의 일차적인 비전이나 목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내 계획과 관계없이 주어진 기회이기에 궁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시리아 정교회, 갈데아 정교회 등 이라크의 2천년 가까운 전통을 가진 교회 배경을 가진 이들이 지금 이라크인 교회의 중심이 되어 있다. 앗수르와 갈데아인들의 후손들로, 1세기 초에 이미 민족적으로 기독교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의 후손들이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내가 섬기는 교회에만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정교회 예배도 참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같은 처지에 서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 ‘너도 애 낳고 키워 보면 이 어미 심정 알게 될 것이다’는 어머님의 한마디도 실제 그 처지에 서보고 절감하는 경우처럼. 요즘은 교회를 담임하시는 사역자들의 심정을 적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회 사역에 얽혀 있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고민도 깊어진다. 종종 잠을 자면서도 잠을 설치는 상황도 겪고 있다. 다른 교회를 방문 중에도 이라크인 교인들이 생각난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무늬만 담임 목사가 실제적인 몫을 담당하게 될 것인지 나도 궁금하다.

오늘도 아랍 이슬람 지역은 움직이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생명체를 제대로 느끼려면 나도 움직여야 한다. 생각도 몸짓도 멈춰 있어서 안 된다. 글의 마무리가 조금 선문답을 연상시키는 것 같지만… ‘고정된 시선, 그 근육을 풀어봅시다’고 외치고 싶다.

김동문 / 중동 암만, <복음과상황> 해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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