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교' 수준의 한국교회, 출구가 안 보인다
'개독교' 수준의 한국교회, 출구가 안 보인다
  • 양국주
  • 승인 2007.07.13 0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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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간지 편집부로부터 어려운 청탁을 받았다. 최근 ‘선교사’를 주제로 쓴 칼럼에 대해 독자들이 상식 밖의 반응을 보였다며, 다음부터는 기독교에 관한 글을 쓰지 말아 달라는 주문이었다. 매주 필자의 칼럼을 게재하는 신문사는 칼럼이 나간 이후 독자의 비평이나 의견을 종합하여 칼럼니스트에게 보내기 때문에 독자들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독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도 좋지만, 독자의 비평에 지나치게 눈치를 살피는 것 역시 언론의 건강한 모습은 아니다. 칼럼에 대한 호감, 비호감도 중요하겠지만 독자를 선도해야 할 책임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이 과연 한국 교회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교회를 ‘개 같은 기독교’라는 뜻의 ‘개독교’로 부른 것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안팎의 시선에 대해 애써 무시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어차피 세상이 교회를 무어라 부르든 개 같은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니 애써 귀담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신화 창조와 정직을 자랑하던 대표적 기독교 기업 이랜드의 파업으로 청지기 정신은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기독교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던 평양부흥의 회개 정신을 이어 받자며 상암 경기장에서 18억을 들여 치룬 기념식의 진정성마저 우스갯감으로 희석되어 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하용조 목사는 몇 해 전 죽음에서 건진 남은 인생을 일본 선교에 걸겠다며 오사카 지역의 기존 교회를 초토화시키고 이제는 문화 선교 ‘러브 소나타’라는 새로운 간판으로 동경 지역을 접수하겠다며 피를 토한다. 그러나 오사카에서 목회하는 한 목사는 온누리교회가 오사카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며 세운 교회는 새로운 신자가 아니라 기존 교인들을 더 나은 시설, 더 나은 프로그램으로 수평 이동한 것뿐이라며 아픔을 호소했다.

수백만 불을 들여 미주 지역의 여러 지역에 교회 건물을 사들이고 공격적인 투자 마인드로 온누리 제국을 건설하고 있다.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하용조 군단의 미주 대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온누리교회가 아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교인들과 살을 섞고 피를 나누는 개척 교회의 목회자를 섬기고 이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미주 지역이나 일본에 투자처를 찾지 말고 이러한 자금으로 어려운 지역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를 돌보는 노력이 동역이고 진정한 선교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양을 가진 이는 이마저도 움켜쥐려는 부자의 부리에 걸려 신음하는 셈이다. 나단 같은 선지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아무런 기대는 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목자는 더 이상 다윗 같은 순수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설사 죄를 지었다 해도 양심의 가책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셈이다. 교회당에는 교인들이 가득하고 저들이 목회자의 든든한 돈 줄이 되어 있는데, 더 이상 나단의 목소리는 들어 무엇하리요? 하나님에 대한 갈증도 기도도 필요 없는 목회자들 아니던가?

신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다른 이의 논문을 표절했던 버지니아 침례교회의 목사는 박사 학위를 수여했던 남침례회신학교에 정중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박사 학위를 취소하여 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단순한 실수가 아닌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목사님이 채 한 달이 안 되어 교회 내의 목사 반대파를 출교 처리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적어도 이런 목회자를 용납하는 교인들과 교회가 있는 한 교회는 절망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대체 목회자들의 안하무인과 교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지난달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컨퍼런스가 열렸던 워싱턴 지역 교회에 홈스테이를 위한 광고를 부탁하였다. 한 달 동안의 광고 기간에 선교사 자녀를 위해 자신의 집을 비어 주겠다는 교회가 한 곳도 없었다. 더욱이 컨퍼런스가 열린 장소에서 겨우 2마일 떨어진 ‘열린문장로교회’에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식사를 요청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러면 음식을 장만해서 선교사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장소라도 제공해달라는 요청마저 교회 행사와 겹친다며 안 된다고 했다.

캘리포니아로 뉴욕으로 여행에 바쁜 담임목사를 수소문하여 겨우 교회 모임이 끝난 후 식당에서 밥을 먹으라는 허락을 받았다. 열린문장로교회는 아프리카 감비아 선교에 남다른 헌신을 보이고 있는 교회다. 교회가 새롭게 거금을 들여 현지인을 위해 지었다는 보건소 낙성을 방문하기 위해 60여 명의 교인들이 거금을 들여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달려간 소식이 일간 신문의 톱으로 장식한 사실 앞에 허망한 생각마저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선교사 자녀들이 3대뿐인 교통편을 기다릴 수 없어 2마일을 비 맞으며 걸어갈 때 그 교회의 주차장에는 할 일 없이 놀고 있던 여섯 대의 밴이 오늘 ‘선교 한국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슬펐다. 선교사 자녀들에게 교회 공간마저 거절하는 저들에게 선교에 앞장섰다는 명예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세상의 누구를 위해 교회 문을 열었다는 말인가?

뉴욕의 할렐루야 전도집회에 강사로 청빙되는 명예는 가히 교회와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한국의 기라성 같은 목사들이 거금 3만 불을 쾌척하고라도 이 명예를 누리고자 줄을 잇는다. 워싱턴도 예외는 아니다. 뉴욕이 3만 불이니, 규모는 작지만 워싱턴도 1만 불은 받고야 강단에 세우려 한다.

거금을 들여 강단에 섰던 강사 교회의 웹사이트에는 미주 지역 교회가 얼마나 우리 목사님의 말씀을 사모하는지 그 열기를 소개하는 자화자찬으로 도배를 하였다. 명예에 노예가 된 목사들의 향연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율동으로 낯이 간지러울 뿐이다. 미주 지역 교회 연합회의 활동에도 많은 재정적 필요하다. 그러나 함량 미달의 강사를 세우면서 뒷돈을 챙기는 일은 결코 정직한 방법이 아니다.

원래 ‘크리스천’은 기독교인들에게 바쳐진 불명예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상의 빛이 되면서 이 단어는 기독교인의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과연 크리스천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 있는가? 오죽하면 신문사에서 기독교에 대한 나쁜 이미지 때문에 교회에 대한 글을 실을 수 없다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일까? 협객 김두한이 다시 살아온다면 “에라, 이놈들아!” 하면서 교회에 똥바가지를 퍼부을는지도 모른다.

양국주 / 열방을섬기는사람들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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