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유용석
  • 승인 2007.07.17 14: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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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회령 기행문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을 하면서 이번 여행까지 포함해서 나는 북한을 열한 번 다녀왔다. 회령은 1998년 3월 방문 이후 두 번째다. 회령은 우리와 참 인연이 깊다. 재작년 여름에 젖염소를 보낸 곳도 회령이었고, 소위 ‘고난의 행군 기간’이라 불리는 힘든 시절 2년간 식량을 지원한 양로원도 회령에 있다. 1997년 회령에 국수와 빵공장을 세우고 그곳의 어린이 15,000명에게 빵을 먹여왔는데, 금년 들어서 운영 자금 관계로 일시 중단된 상태다.

이번 여행에는 잭슨빌제일침례교회의 이종오 목사님도 동행하였다. 이 목사님은 나와 같이 북한을 방문했던 분인데, 3년 전에 나의 권고를 들으시고 회령시에 인접한 온성군 종성에 있는 중학생을 수용하는 고아원인 종성학원에 매달 식량을 지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이번에 그 현장을 보기 위해서 나와 동행하게 되었다.

5월 13일 새벽 LA공항을 출발하여 14일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서 이 목사님을 만나서 아침 8시 중국 심양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심양에 도착하여 오후 심양에 있는 북한 영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밤늦은 비행기 편으로 연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하루는 조선족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과 선교 관계로 사람들을 만나고 16일 북한으로 출발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깥에는 늦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오전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삼합으로 향하였다. 삼합은 연길에서 고속도로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연길을 출발하여 용정을 지나 국경으로 가는 연도 구릉 지대에는 이 지방의 특산물인 사과배꽃이 구름처럼 하얗게 피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 표지판이 있는 길을 지나면서 그의 서시를 떠올리며 하염없는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삼합 교두에서의 출국과 통관 수속을 간단히 마치고 우리는 국경을 잇는 다리를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건너갔다. 다리 아래에는 흙탕물처럼 보이는 좁은 물줄기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두만강은 원래 김정구 씨가 노래했던 것처럼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수량이 많은 강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또한 백성들은 가난을 피하고저 나룻배에 몸을 싣고 건너야 했던 한 많은 강이 바로 두만강이었다. 최근에는 배고픈 북한의 백성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야만 했던 저주의 강이기도 하다. 이처럼 푸른 물이 넘실거렸던 두만강이 지금은 하류에 와서 강폭이 좁아지고 더러운 물로 변하게 된 것은 이 강의 중류에 있는 무산 철광 때문이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강물을 둑으로 막고 강물의 일부를 발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강물은 철광석 세척용으로 사용한 결과 푸른 물결 넘실거리던 두만강물이 흙탕물이 되고 만 것이다.

두만강 다리를 건너간 우리는 북조선 세관에 가서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성경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장면을 사진 찍었는지 치밀하게 검사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를 대하는 세관원의 언어나 태도는 전보다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세관 검사를 마친 우리는 함경북도 해외 동포 영접처와 회령시에서 나온 책임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타고 갈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갔다. 그때부터는 우리의 여권은 여행을 마치고 출국할 때까지 북한의 관리가 보관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포로와 같은 신분이 되는 것이다.

이날 우리가 타고 다닐 자동차는 어느 한국의 자선단체에서 기증한 것이 틀림없는 현대자동차였다. 이 차의 운전수는 미리 북측의 부탁을 받고 우리가 가져간 휘발유를 자동차 탱크에 넣으면서 “이 차가 오늘은 쌀밥을 먹는구나”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세관 광장 건너편 건물 옥상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유훈 통치의 때늦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두만강에서 회령시가지까지는 지척에 있다. 오산덕여관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먹었는데, 옛날에 내가 들렀던 호텔은 지금 수리 중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먼저 이종오 목사님 교회에서 돕고 있는 종성학원으로 향했다.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황톳길이었으나 때마침 내린 비로 먼지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길 한쪽 밭에는 한 치쯤 자란 옥수수가 심겨져 있었고 다른 한쪽의 논에서는 모를 내고 있었는데, 그 논둑에 일정한 간격으로 붉은 깃발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내 뒷자리에 앉아 있는 보위부에서 나온 동무가 모내기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 시간 가량 달려서 우리는 종성학원에 도착하였다. 이날 고아원생들은 다 농사일에 동원되고 여자 아이들 1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원장은 우리를 제빵실로 안내했는데, 찐빵의 색깔이 누렇게 보였다. 우리가 보낸 효모가 떨어져서 밀가루만 가지고 반죽해서 쪘기 때문이라고 했다.

   
 
  ▲ 밀가루만 가지고 반죽을 해서 누렇게 된 찐빵.  
 
   
 
  ▲ 회령의 빵공장 내부 모습.  
 
원장은 우리에게 교직원용 40명분의 밀가루를 더 보내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하다가 옆에 있던 도에서 온 동무의 제지를 받고 겸연쩍어했다. 우리 일행은 현관 앞에서 미인 여교사와 원장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그곳을 나왔다.

종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먼저 들른 곳은 염소 목장이었다. 우리가 보낸 염소가 이 영천골이라는 곳에서 사육되고 있었는데, 아카시아 나무와 풀이 많아서 염소 기르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 골짜기에는 우리가 보낸 염소 외에 농민들의 염소도 우리와 같이 단지를 이루어서 사육되고 있었는데, 우리가 보낸 우량종 젖염소로 품종 개량 사업도 하고 있었다.

사육장 건너 산중턱에 세워진 “풀을 고기로 바꾸자”라는 염소 사육을 장려하는 정책 구호 간판이 크게 눈에 들어왔다. 여기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이 영천골 일대에는 약 1,000마리의 염소가 있는데, 하루 수집되는 젖의 양은 500kg이 넘는다고 한다. 이 젖을 인근의 탁아소, 유치원 아이에게 먹이고 있는데, 여름에는 쉬어서 버리게 되니 분유를 만들 수 있는 기계를 설치해 주었으면 했다.

이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회령 양로원이었는데, 이 양로원에는 고난의 행군 기간인 97년, 98년, 2년간 한 달에 밀가루 다섯 통씩을 보내준 일이 있었다. 현재는 약 160명의 노인이 수용되어 있는데, 여기 책임자로부터는 경운기와 밀가루와 설탕과 콩기름의 지원 요청을 받았고, 생활 반장이라는 할머니로부터는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전압 조절기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 만찬에서 공연을 하는 북한의 어린이들.  
 
저녁에는 회령시장이 베푸는 특별 만찬에 초대되었는데, 회령시장은 그동안 우리가 베푼 동족 사랑에 대하여 빵을 먹는 아이들과 부형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되풀이하였고, 평양에서 보내왔다는 조개껍질로 만든 해금강이 그려진 꽃병도 선물로 받았다.

북한의 전기 사정은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이날 밤 나의 잦은 화장실 출입은 여관에서 미리 빌려 준 전지 등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도의 책임자 최 동무는 함경북도의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는 3,500명 고아들이 필요한 옷과 신발과 학용품과 주방기구들 중 한 가지라도 도와달라고 했고, 회령 책임자 조 동무는 현재 임시 쉬고 있는 빵공장을 하루 속히 가동시켜달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기윤실 회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랑의 빵을 만드는 공장으로 갔다. 이 공장은 예전에 있던 공장에서 2년 전에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기계 시설을 옮기고 지금은 작년에 EU에서 기증받았다는 두유 제조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의 공장장은 내게 다가와서 탁아소와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현재 이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두유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밀가루만이라도 속히 보내달라고 했다.

   
 
  ▲ 공원에서 만난 회령시 교육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공장 시찰을 마치고 우리는 회령시가지로 나왔다. 회령시는 금년이 김일성 주석의 첫 부인 김정숙 여사의 나이가 90세가 되는 해이어서 중앙의 특별지시로 도시 건물과 환경 미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집집마다 벽에 회를 칠하고 창문을 유리로 갈아 끼우고 지붕을 새로 꾸미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1998년 겨울 이곳에 왔을 때보다는 깨끗해지고 밝아진 것 같았다.

회령은 반광산 반농업 지대로 현재의 인구는 약 15만 명이 된다. 한때는 20만에 가까웠는데 탈북자가 많이 생겨서 인구가 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수가 좋아서 예로부터 자강도의 강계와 같이 회령은 미인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김성숙 여사의 출생지라고 해서 평양 다음으로 성역화된 도시이기도 하다. 여기 회령시의 중앙에는 여군사 차림의 거대한 김정숙 여사의 동상이 서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숙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곳곳에 “항일의 여성 영웅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라는 구호 간판을 세워놓고 있다.

우리가 탄 차는 이 김정숙 여사의 동상 앞을 지나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섶에는 아직도 이울지 않은 진달래가 피어 있고, 비에 젖어서 향기를 잃은 라일락꽃이 함초롬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원 정상에 올라갔다. 차에서 내려 앞쪽으로 걸어가니 정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한 무리의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이곳 회령시 교육대학의 학생들인데, 야외 스케치를 하려고 나왔다가 공원 정자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더니 모두 순순히 응해 주었는데, 이곳 출신답게 키는 좀 작아보였으나 균형 잡힌 미인들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공원에서 내려와서 두만강으로 가서 북한 세관에서 출국 검사를 받았는데,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세밀히 조사하는 것이었다. 맡겼던 여권을 돌려받고 이틀 동안 행동을 같이 했던 안내원 동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나왔다.

   
 
  ▲ 용정의 사과배밭을 거닐고 있는 젖염소들.  
 
   
 
  ▲ 북한에 보내는 젖염소를 도맡아 일하고 있는 김양순 전도사와 모녀.  
 
다음 날 나는 연길에서 우리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조선족 책임자에게 이번 북한에서 요청받은 일 처리 방법을 지시하고 북한으로 보낼 염소를 기르고 있는 사육장에 들려서 사육 상황을 알아보고 곧 회령으로 보낼 준비를 진행시켰다.

19일 북경으로 왔다.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북경으로 돌아가서 목회를 하고 있는 조선족 선교사를 만나고 개인 일도 보고 20일 북경을 출발하여 같은 날 오후에 LA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하여주신 하나님과 기윤실 회원들과 교우와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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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2015-06-24 12:05:40
이분들 정말 좋은 일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