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거부한 평화주의자들, 아미쉬
전쟁을 거부한 평화주의자들, 아미쉬
  • 강희정
  • 승인 2007.08.01 0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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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제단에 뿌려진 희생자들의 피를 기억하라"

   
 
  ▲ 시속 5~6마일의 속도로 달리는 아미쉬 마을의 운송 수단인 버기(Buggy).  
 
아미쉬 교도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러시아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대 물질문명을 거부하여 전기나 전화 등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며, 공교육을 거부하고 유행과는 전혀 거리가 먼 옷차림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이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아미쉬 교도들의 역사는 박해와 이주의 역사이다. 이들의 선조들은 종교개혁 때부터 국가 교회와 전쟁을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였다. 유럽에서 심한 박해를 받던 중 에카테리나 여제의 초대로 러시아로 갔다. 이들은 건조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의 스텝지대를 밀 곡창 지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그들에게 허용되던 군 복무 면제와 신앙의 자유가 위협을 받게 다시 미국의 펜실베니아 지역으로 건너오게 된다. 당시에 미국의 펜실베니아 지역은,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이 영국 왕 찰스 2세로부터 아버지의 빚 대신 받았던 땅으로써 아미쉬와 같은 종교적 소수자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안성마춤이었다.

아미쉬 교도들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의 랭커스터에 처음 정착하였으나 이후 오하이오·인디애나·캔자스 주와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아미쉬 교도들은 오하이오 주의 홈즈 카운티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첫 주에 아이들의 봄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홈즈 카운티에 있는 밀러스버그, 왈넛 크릭, 벌린 등의 도시들을 돌아보았다.

   
 
  ▲ 왈럿 크릭에 있는 한 상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미쉬 소녀의 모습.  
 
   
 
  ▲ 비홀트(Behalt) 관람을 도와 주던 아미쉬 가이드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밀러스버그에 도착했던 날이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모든 상점과 기관들이 문을 닫아 저녁 식사를 할 식당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음날 아침에는 아미쉬들의 삶의 모습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기 위하여 도로를 따라가며 밀러스버그와 왈넛 크릭 주변의 아미쉬 마을들을 둘러보았다. 차로에 마차가 다니는 바람에 종종 차의 속도를 늦추고 뒤따라가야만 했다. 
 
아미쉬들은 미국에 이주해 온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스위스식 독일어를 쓰고 있다. 이들은 아미쉬가 아닌 사람들을 '영국인'(English)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라 복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미쉬 성인 남자들은 콧수염을 깎는 대신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모자를 쓰며 검은색 옷을 입는다. 여자들은 소박한 색깔의 블라우스와 발목 길이의 치마를 입고 머리를 감싸는 두건(커버링)을 쓴다.

아미쉬 가운데 일부가 관광업이나 가구 제조업, 퀼트 제조업 등에 종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말에 쟁기를 걸고 땅을 갈고 있는 모습은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풍차라든가 실외 화장실 등은 미국의 농촌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간혹 전봇대와 전깃줄이 있는 집들이 있었는데 아미쉬 교도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마을 인근에 들어와 살기 때문이다.

   
 
  ▲ 집집마다 물을 끌어 올리는 풍차가 보이고 빨래줄에 많은 옷들이 널려 있었다. 아미쉬 여인들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 서너 마리의 말을 부리면서 쟁기질로 밭을 갈고 있는 아미쉬 농부들의 모습.  
 
마을에 들어서면서 머리에 커버링을 하고 앞치마를 두른 아미쉬 여자들이 손수 빨래를 해서  널고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미쉬 여인들의 일상의 시작을 엿보는 듯했다. 미국의 웬만한 지역에서는 세탁한 빨래를 밖에 너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어 이러한 모습은 독특하고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평균 잡아 일곱 명의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아미쉬 여인들이 가족들의 빨래를 손으로 일일이 빨아 널고 있는 모습에서 이들의 육체노동의 강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삶은 그 대가로 과다한 노동을 요구했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육체노동이 아미쉬 교도들의 삶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라는 것은 인터뷰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 원룸 스쿨로 알려진 아미쉬 학교의 모습. 낡은 모습에서 재정이 넉넉지 않음을 추측하게 한다.  
 

   
 
  ▲ 살짝 들여다 본 아미쉬 학교의 화장실 모습. 한국의 재래식 화장실과 비슷하다.   
 
마을을 돌아보는 동안에 이들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원룸 스쿨' 두 곳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 아미쉬 교도들은 일반 학교가 아니라 자신들이 세운 학교에 자녀를 보낸다. 외부인들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서 밖에서 들여다보는 정도로 그쳤지만 정부 지원이 없어서 그런지 학교 시설들이 낡아 보였다. 넉넉하지 않은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실 하나로 이루어진 학교에서 교사 한두 사람이 20~30명의 아이들에게 읽기·쓰기· 셈하기 등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12학년까지가 의무교육인 미국에서 아미쉬 어린이들은 8학년까지 교육을 마치고 삶의 터전으로 투입된다. 한때는 국가 교육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나 미국 정부는 1972년 5월 15일 이들 교육 과정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합법화하였다.

아미쉬 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홈즈 카운티의 중심 도시는 벌린(Berlin)이라는 곳이다. 독일어 발음으로 하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인 셈이다. 이곳에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들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든 아미쉬 메노나이트 헤리티지 센터가 있다. 이 센터의 핵심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들이 박해를 당한 역사를 그림으로 기록해 놓은 '비홀트'(Behalt, '기억하라'는 뜻)라는 역사 공간에 있다. 하인쯔 가우겔(Heinz Gaugel)이라는 화가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교도들의 역사를 벽에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 홈즈 카운티 벌린 시에 있는 아미쉬 메노나이트 헤리티지 센터. 아미쉬와 메노나이트의 역사를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Behalt'를 관람할 수 있다.  
 
   
 
  ▲ 'Behalt'는 아미쉬 메노나이트들이 박해를 당한 역사를 재현해 놓은 곳으로 후세와 일반인들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들이 치른 대가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곳이다.  
 
마침 '비홀트'에 관람하러 온 사람이 없었던 탓에 자원봉사자인 아미쉬 가이드의 설명을 혼자서 들으며 30분으로 제한되어 있는 안내 시간을 넘기고 한 시간 가량 관람할 수 있었다. 예수의 부활과 초대 교회의 성립부터 그리고 있는 벽화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국가 교회와 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잔혹한 고문 속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처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아미쉬 교도들은 지난 450여 년의 역사 속에서 국가 권력에 복종하여 전쟁에 나가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에 참여하는 대신 감옥에 가거나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평화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전쟁 거부 움직임은 1차 세계대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징병을 거부한 아미쉬 청년들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크게 반향을 일으켜 2차 세계대전부터 아미쉬 교도들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대체 복무의 길이 열렸다고 한다.

신앙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문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미쉬 교도들의 역사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던져주는 듯하다. 아미쉬 교도들이 자신들의 순수한 신앙 열정을 지키고자 한 대가로 치른 희생의 역사는 진리와 자유라는 것이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역사의 제단에 바쳐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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