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노력
기도와 노력
  • 김기현
  • 승인 2007.09.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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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가 노력이요, 노력이 기도입니다. 둘은 어느 정도의 구별이 있지만, 결국 동전의 양면입니다. 새의 두 날개입니다. 앞면과 뒷면이 있고, 우측과 좌측 날개가 있어서 구분은 되지만, 결코 둘이 아니며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우리 신자들에게 딜레마 중의 하나는 기도와 노력입니다. 기도와 노력은 서로 안 어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노력을 게을리 하고, 노력하는 자는 기도를 등한시합니다. 제 힘으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데 왜 기도하겠습니까? 기도는 시간 낭비이지요. 능력이 없는 자들의 푸념에 불과합니다. 현실도피 수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마치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는 애벌레들의 허망한 짓과 상통합니다. 나비가 되어 날아가야지 애벌레가 되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인간의 노력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최권능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다짜고짜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예수 천당’을 외쳐서 예수 믿게 했다는 전설적인 분이지요. 이분이 이토록 전도에 열심인지라 신학 공부할 여력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준비를 못했으니 그분의 특기를 살려 철야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F학점입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시험 앞에서는 성령님도 쩔쩔 맨다’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최고 정점에서 뜻하지 않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간이라는 어쩔 수 없는 굴레를 발견합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인간을 정의하기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실존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중단해야 합니다. 거품이요, 안개요, 연기입니다. 그토록 애써 얻고자 했던 것,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쌓은 것이 한낱 모래성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허망해 합니다.

성경에는 좋은 본보기가 참 많습니다. 먼저 야곱입니다. 야곱은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을 타고났습니다. 어머니의 후원과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노력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란에서 보낸 20여 년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했다고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가축을 정성스레 돌보았습니다. 잃어버린 것도 없었고, 혹 맹수가 물어간 것은 알아서 보충했습니다. 그가 거부가 되어 돌아오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벧엘에서 하신 언약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행하셨습니다. 동시에 야곱은 그 하나님 은혜와 약속만 믿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형 에서를 만날 때도 그랬습니다. 해석의 차이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형에게 보낸 선물과 그 선물 앞뒤에 그가 행한 기도는 기도와 노력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예증입니다. 교활한 꾀로 우둔한 에서를 속여 형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분통이 터진 에서는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런 형과 상봉하면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나님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선물로 형에게 용서와 화해를 요청합니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사죄하고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선물은 결코 잔꾀나 불신앙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다음은 다니엘입니다. 어린 나이에 낯선 땅, 바벨론에 끌려간 이 소년은 뜻을 정한 인생입니다. 지혜로운 현자입니다. 몇 번이나 왕과 왕조가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를 탄핵하려는 세력들은 다니엘의 주변을 샅샅이 탐문합니다. 그러나 그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어떤 실수나 잘못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충성스러워 아무런 실수나 아무런 잘못도 없었기 때문입니다.”(단 6:4, 우리말성경) 겨우 트집을 잡는다는 것이 그리운 땅,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 것으로 사자 굴에 집어넣습니다.

또 한 사람, 느헤미야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족보나 명단을 기록한 한두 장을 제외하고는 기도하는 느헤미야를 소개합니다. 처음과 끝이 기도였고, 과정과 중간도 기도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는 기도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그런 느헤미야는 어찌 보면 기도가 별로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탁월한 정치력과 실력이 있었고, 왕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하나님 없이는,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기도하는데 몰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성벽을 밤잠 없이 일해서 52일 만에 재건합니다.

기도와 노력은 대립하지 않고 양립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은 적절합니다. “기도와 행동은 절대 상충되는 것이나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행동 없는 기도는 무력한 경건주의로 변질되고 기도 없는 행동은 의심스런 조작으로 전락한다.”(<기도의 삶>, 148쪽) 기도하는 사람은 땀 흘려 일할 현장으로 나아가고, 노력하는 자는 기도의 골방을 찾습니다. 기도는 노력을 이끌어내고, 노력은 기도로 이어지도록 되어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교활이라면, 기도하지 않고 노력만 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기도가 노력이요, 노력이 기도입니다. 물론 복음과 성서는 기도가 우선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둘은 어느 정도의 구별이 있지만, 결국 동전의 양면입니다. 새의 두 날개입니다. 앞면과 뒷면이 있고, 우측과 좌측 날개가 있어서 구분은 되지만, 결코 둘이 아니며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찾고자 한다면, 얻고자 한다면, 열어야 할 문이 있다면,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자체가 힘겨운 노력입니다. 기도한 대로 될 줄로 믿고 골방을 열고 나와 야곱처럼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합시다.

김기현 목사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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