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집 주소가 당신의 신앙고백이다
당신의 집 주소가 당신의 신앙고백이다
  • 박지호
  • 승인 2008.01.09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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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3] 둘째 날 저녁 집회…Where Would Jesus dwell?

둘째 날 저녁 집회 강사는 이태후 목사(Spirit & Truth Fellowship Church). 이 목사는 자신의 사역 현장을 예로 들어서 도시 빈민 사역을 소개했다.

예수님이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미국에 오신다면 어디를 방문하실까. 백악관? 최고급 호텔? 가장 큰 교회? 가장 유명한 목사의 집? 아마도 거대한 빌딩 숲 뒤에 묻혀 있는 어두운 할렘(빈민가)으로 걸어 들어가시지 않을까 싶다.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예수님은 세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과 어울리셨다.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갈릴리 같은 가난한 시골을 찾아다니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누울 곳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보내셨다. 우리가 사는 주소지는 곧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다. 우리가 사는 곳, 살기 원하는 곳이 어딘가. 한인 교회들이 앞 다퉈 몰려드는 동네는 어떤 곳인가. 가난과 폭력과 절망에 찌들어 있는 빈민가인가. 학군이 좋고 범죄율이 낮은 안전한 백인 동네인가.

   
 
  ▲ 이태후 목사는 성육신의 신학을 따르는 크리스천들이 가난과 폭력과 절망에 찌들어 있는 빈민가보다, 학군이 좋고 범죄율이 낮은 안전한 백인 동네로 몰려드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사는 주소지는 곧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성육신의 신학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성육신의 신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죄인들 가운데 거하셨고, 권세자들로부터 천대받는 낮고 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고 성육신적인 사역을 하는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밝고 부유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하는가, 어둡고 절망적이고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구체적인 삶을 동반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믿고 찬양하는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이나 부나 권세에 따라 자녀 삼는 분이 아니다. 인종이나 영어 능력이나 빈부의 격차를 따지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소와 멸시를 고스란히 받는 소외당한 이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다.

오늘날 교회가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뜨거운 예배와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끼리만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섬기기보다 부와 특권과 명예를 쫒아가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높아지려고 하고 채우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낮아지라고 하고 나누라고 말한다.

복음의 능력은 내가 강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버드대학에서 수석을 차지했다고 해서, 사업에 성공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미스코리아가 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이 잘나서 성공했을 뿐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많이 가진 사람이 이웃을 위해 내려놓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연약해질 때,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설 때 나타난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교회는 312년부터 망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곤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칙령(Milan Edict)으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권력자의 우편에 앉기 시작했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곳은 어느 곳인가. 위를 바라보고 위를 향해 나아가는가 아니면 주님이 어울리기를 즐겨하셨던 음지에 있는 거리의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는가.

한인 교회는 어떤가. 언어적인 장벽 때문에,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타민족을 섬기기 힘들다고 핑계대지만, 흑인 동네에서 장사하고 돈을 벌 수 있을 정도면 교회가 그곳을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인 교회가 처음 개척할 때를 돌아보라. 미국인 교회를 빌려 시작했다. 김치 냄새를 참아가며 그들의 시설을 내놓았던 미국 교회가 있었기에 오늘날 한인 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인 교회 중에 캄보디아나 베트남 등과 같은 소수 민족들에게 교회를 빌려주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음식 냄새 때문에’ 혹은 ‘귀찮아서’라는 변명이 따라온다. 교회의 눈도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 예전의 우리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해가 없기에 우리들만을 위한 목회에 목을 매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유일한 희망이다. 미국 도시에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빈민이다. 미국 정부가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무신론자인 한 사회학자가 도시 빈민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를 해보니까 도시 빈민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 중에 발전하고 있는 단체는 교회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나님은 그 무신론자 교수의 입을 통해 ‘교회만이, 복음만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복음은 절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 이슬람 신자, 동성연애자, 에이즈 환자, 무신론자,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가 진정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자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은 진정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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