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나를 기다린다'
'조선이 나를 기다린다'
  • 양국주
  • 승인 2008.01.11 17: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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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례 선교사의 삶(1)

   
 
  ▲ 조선으로 떠나오기 전 후로렌스 룻 선교사(사진 제공 : 양국주)  
 
찰랑찰랑 웨이브가 한껏 어울리는, 유난히 목이 길어 선하게 생긴 눈매를 지닌 사진 속의 미녀는 플로렌스 엘리사벳 룻(Florence E. Root)이다. 유화례는 그녀의 조선 이름이다. 3주일도 넘는 긴 항해 끝에 부산을 거쳐 광주에 도착한 것은 1927년 1월 11일이다.

1892년 12월 21일 생이니 12월 18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건너오던 중 한 살을 더 먹은 셈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낯선 미지의 나라,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그녀의 나이 꽃다운 서른넷이었다.

유 선교사가 졸업한 매사추세츠의 스미스대학은 하버드의 레드크립, 웨슬리대학과 자웅을 겨루는 명문 대학이다. 명문 출신에게 주어지는 세속적인 출세나 명예를 뒤로하고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던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찾았다.

이 땅에서 나눈 운명적인 51년을 접고, 1978년 한국을 떠나 쉐난도산맥을 병풍처럼 뒤로한 버지니아의 선교사 은퇴관에 머물며 103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던 그 순간까지 그녀의 기도 제목은 언제나 ‘한국과 이 땅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은퇴관 침대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진 탓에 사지를 움직이기 어려운 순간에도 유 선교사의 침대 주변에는 늘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과 온유함이 따스한 온기처럼 감싸고 있었다.

헌신으로 시작하는 하나님나라

뉴욕 주 쿠퍼스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던 그녀의 삶에 주님은 어떤 부르심을 보였던가?

조선이 그녀의 기도제목에 편입되었던 것은 당시 미국 남장로교가 이미 120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기회가 되었다. 교단 선교부를 통해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조선’에 관한 선교 보고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 땅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미주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며 조선 선교에 도전을 하고 있었기에 미국 교회에 조선 선교는 하나의 열풍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 사역자도 귀하지만 동원 사역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보다 뒤늦게 시작된 조선 선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역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조선 전역을 불태울 기세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 갈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선교사 자녀 학교가 일본의 고베나 동경보다 조선 땅 평양에 설치되었던 것은 설명조차 필요 없는 부분이다. 후일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된 라이샤워 같은 이도 아버지가 일본 선교사였지만 공부는 평양의 선교사 자녀 학교를 마쳤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조차 자녀 교육은 평양에서 시켜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내에 불기 시작한 학생 선교 운동과 영성 운동의 결실은 조선 백성이 나누는 혜택을 본 셈이다.

유화례는 대학 졸업 이후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그런 그녀가 콜레라가 창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마저 담보할 수 없는 조선에서 처녀 사역을 시작한 셈이다. 음악 선생으로 수피아여학교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설립자였던 유진 벨은 2년 전 자신의 피곤한 육신을 선교사 단지인 양림촌의 언덕 양지 바른 곳에 뉘었다. 첫 부인을 전염병으로, 제암리 교회 순교사건으로 조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병점에서 자신이 몰던 자동차가 기차와 충돌하면서 두 번째 부인을 잃었다.

그리고는 배똑똑이라는 별명을 즐기던 유진 벨마저도 몇 해 후에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황해도 소래교회에 와 있던 캐나다 청년 맥켄지가 장질부사에 걸려 치유할 수 없던 고통을 못 이겨 총으로 자살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황이었기에 조선에서의 사역은 두렵고 순교 이상의 결단과 각오가 없다면 불가능한 때였다.

   
 
  ▲ 쉐핑의 양림촌 묘지를 찾은 이일성경학교 학생들, 왼쪽 끝이 도마리아 교장, 1940년 사진(사진 제공 : 양국주)  
 
독일계 미국 간호 선교사 쉐핑(서서평)이 그녀의 동반자로서 많은 위로와 동역의 기쁨을 나누었다. 특히 쉐핑은 곳곳에 간호전문 인력을 기르는 기관도 만들고 농촌과 교회 여성 지도자를 기르는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유 선교사보다 12살 연상인 쉐핑은 헌신이 가져다주는 희열과 감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가르쳐준 믿음의 선배였다. 그녀 역시 서른둘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행려병자와 같이 버려진 사람들의 이웃으로 54세에 영양실조로 죽기까지 23년의 불꽃같은 삶을 바쳤다.

선생이 부족한 선교지에서 서너 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만 하는 탓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가중될 수밖에 없다. 후일 유화례와 더불어 ‘호남의 성녀’로 불리어진 쉐핑의 죽음은 결코 먹을 것이 없거나 가난했던 이유가 아니다.

선교비가 오면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 무조건 반을 떼어 헌금하고 최저 생활비를 제외한 돈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살점 나누듯 쪼개어주다 보니 정작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던 탓이다. 마지막 순간, 마지막 생명까지 나눈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가능케 된 것이다.

   
 
  ▲ 쉐핑이 1922년에 세운 광주 이일성경학교의 1940년 졸업반 사진. (사진 제공 : 양국주)  
 
1934년 쉐핑이 죽자 그녀의 장례를 광주지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렀다. 예수쟁이가 나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비기독교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녀의 상여를 메었다. 그러나 쉐핑의 장례가 있던 날 그녀의 죽음을 진정으로 흐느낀 이들은 양림천 거지들이다. 그리고 문둥병자, 복음의 돌격대로 길러진 이일성경학교의 제자들이다. 갈 곳 없는 이 땅의 백성이요 버림받은 삶을 살던 이 땅의 천민이다. 쉐핑의 죽음이 요즈음처럼 풍요로운 삶에 한줄기 서광을 주는 것은 자신을 비우는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천지개벽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양림천의 거지들을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겨주던 그녀, 새 옷을 입히고 복음과 더불어 육신의 허기진 창자를 배려하던 넉넉함. 그녀가 나눈 삶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같은 조선의 영광도 있는 것이다.

대동강 쑥섬에서 피 흘린 로버트 토마스 이래 조선에서 피 흘린 1200명의 선교사. 선교사의 삶, 누구를 위한 헌신일까? 선교사란 삶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쉐핑이 죽고 난 이후 남겨진 재산은 오로지 현금 27전이 전부였다. 텅 빈 저금통장은 그녀가 빈민들을 위해 사용하느라 마를 날이 없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반 쪽짜리 담요는 반을 찢어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하느라 주고 나머지 반 쪽으로 가냘픈 육신을 가려야 했다.

조선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에게는 식모뿐 아니라 유모를 고용하거나 자녀 교육비, 심지어는 애완견의 사육비까지 지급되었다. 선교사의 하루 식대가 3원인데 반해 쉐핑의 하루 식대는 언제나 10전이었다. 그야말로 다른 선교사가 사용하는 생활비 30분의 1로 자신의 목숨만 버텨온 셈이다. 쉐핑의 삶과 철학은 후배 선교사 유화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화례에게 있어 쉐핑은 동역자요, 가족이며 믿음의 피붙이였다. 유 선교사는 수피아여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쉐핑의 이일성경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봉사하였다. 쉐핑과 함께 보낸 8년이 유 선교사의 사역에 미친 영향과 자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은 불문가지다. 유선교사 주위에는 이러한 모범적인 동역자로 가득한 편이었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가 위치한 양림동 선교사 촌에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 선교사들이 많았다. 쉐핑을 위시하여 이일학교를 돕던 닷슨(도마리아), 매퀸(구애라)등 많은 여자들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 목포 지역에서 의료 사역을 했던 포사잇(N.H.Forsyth)은 의사로서의 치유뿐 아니라 시간만 나면 길거리에 나가 전도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특히 포의사의 나병환자에 대한 애정은 유난하여 그에게는 ‘나환자의 아버지’라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였다. 특히 소록도 나병원과 나환자근절협회를 만들었던 최흥종 목사는 원래 신자가 아니었으나 나병환자에 대한 포의사의 살신성인적 헌신에 감동을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 쉐핑의 뒤를 이어 이일학교 교장을 맡았던 도마리아(닷슨)의 1937년도 사진. (사진 제공 : 양국주)  
 
포의사는 사역하던 목포에서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 밤, 친구인 유진 벨이 맹장염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밤을 달려 광주로 오던 중 산모퉁이에 곡식을 덮는 데 사용하던 섬피 자락을 뒤집어 쓴 채 추위에 떨고 있는 나환자를 만났다. 그는 말에서 내려 자신이 입고 있던 털외투를 벗어 입히고 덥석 안아 말 등에 앉혔다. 나환자를 광주까지 데려온 그가 마구간을 막아 임시로 나환자를 수용하게 된 것이 오늘날 나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거지를 만나면 돈을 털어주고 헐벗은 이를 만나면 자신의 옷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 남들이 질겁하며 피하던 나병환자의 고름을 빨아주고 이들을 돌보던 사람들, 폐결핵과 온갖 전염병이 득시글거리던 1900년대 조선 사회에 그런 선교사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다.

성육신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육신 가운데 살점을 나누고 사랑의 언어로 대화하며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부르는 연애편지다. 그러한 이유로 삼천리 방방곡곡에 이름도 빛도 없이 찾아와 삶을 나눈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교사다.

진주처럼 빛나는 삶을 살았던 쉐핑은 자신의 주검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사후 그녀의 장기는 시험관에 담겨졌고 볏짚을 뱃속에 채우고 바늘로 꿰매었다. 버려진 자와 함께 나누며 자신을 버리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선교자의 위대한 간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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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onelegio 2011-11-26 23:27:47
Stop hack the program!!!

valaSpirl 2011-10-27 15:33:25
lazernaja ukazka opasn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