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함께 죽으리라"
"조선과 함께 죽으리라"
  • 양국주
  • 승인 2008.01.2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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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조선에 온 유화례 선교사와 손양원

1907년, 포의사와 더불어 나병환자를 돌보던 오웬 선교사가 순회 전도 중 급성폐렴으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오웬의 뒤를 이은 윌슨 선교사가 광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지어 나환자 10명을 수용하였다. 애양원의 전신인 셈이다.

후에 최흥종과 신정식, 쉐핑과 윌슨 선교사가 모금을 해 나환자 600명을 여천군 율촌으로 옮기면서 여수 애양원이 세워졌다. 유화례 선교사는 1941년 신사참배 문제로 수피아여학교를 자진해서 폐교시켰다. 교육보다 우선한 것은 우상인 신사에 절할 수는 없는 믿음의 문제였다.

쉐핑과 최흥종 목사를 존경했던 유 선교사는 이들이 섬기던 이 땅의 버림받은 이들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 여수 애양원을 찾았다. 윌슨 원장은 이미 선교사 철수 정책으로 떠났고,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전도사 역시 신사참배 문제로 광주 지역의 목사들과 감옥에 구금 중이었다.

4개월간 목자 없는 애양원에 머물며 예배를 인도하고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았다. 저들의 대소변을 받아주고 몸을 씻겨 옷 입혀주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녀 선교사로 궁벽한 조선에 찾아와 나환자들을 돌보고 버림받은 이들의 이웃이 되기로 결심을 한 것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 유례화 선교사가 입양했던 진주를 안고 즐거워하고 있다(1942년 사진).  
 
애양원에서 봉사하는 동안 가깝게 지낸 젊은 나환자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음성 나환자의 자녀는 생후 2년까지 분리 수용하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아이를 데려다 키우기로 했다. 갓 난 여아는 겨우 생후 2개월째였다. 이름을 진주라고 지었다.

쉐핑이 사내 고아 요셉이를 입양한 것처럼 뒤를 이어 이일성경학교 교장이 되었던 도마리아 선교사 역시 나병환자가 낳은 사내아이를 입양하고 이삭이라고 이름 지었다. 혈혈단신 처녀로 이 땅에 왔던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갈 곳 없던 고아들을 입양하여 자식인 양 키웠다. 하지만 진주가 돌잔치를 치른 1942년, 유 선교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했다.

겨우 돌이 지난 진주를 떼어 놓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다시 밟는 미국 땅이 왜 그리 낯설어보였던가? 1942년 8월 25일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던 유 선교사의 눈에는 엘리스 섬 건너의 화려한 뉴욕의 야경보다는 두고 온 진주가 내내 밟혔다.
 
해방 직후 조선으로 되돌아오려던 유 선교사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남장로교 선교부는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아직은 조선의 정세가 여러 가지로 불안하다는 이유였다. 유 선교사는 동부 지역 여러 주를 돌며 조선 선교에 대한 도전을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며 안식을 가졌다. 과거 언더우드 같은 선배가 했던 것처럼 동원 사역을 통해 후원자도 만나고 선교 헌신자를 만나는 등, 자신을 돌보는 일에 오히려 인색한 편이었다. 노환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뵙고 언제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조선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 또한 선교사의 삶이다.

인간적인 육친의 아픔과 정리조차 내려놓아야 하는 사역자의 고통을 뉘라서 알아줄까? 가슴이 미어지듯 노년의 아버지와 이별하는 눈물 속에도 유 선교사는 진주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설렘으로 인간적인 아픔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 1947년, 5년만의 귀환이었다.

   
 
  ▲ 쉐핑과 입양한 아들 요셉. (사진 제공 : 김용선 수피아여학교 교목)  
 
도마리아와 함께 광주로 돌아온 유 선교사를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으로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열었다. 그야말로 은혜의 도가니였다. 집회를 인도하는 유 선교사나 손양원 목사도 ‘호남의 성녀 유화례’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놀라운 부흥이었다. 지옥 같은 나환자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영성을 회복하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천국의 시간이었다. 역경과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의 나라, 여수 애양원에 새벽이슬 같은 은혜가 쌓여만 갔다. 유 선교사도 할 일이 많은 조선과 조선인이 못내 사랑스러워 진정한 감사가 넘쳐났다.

해방된 조선은 국호마저 한국으로 바뀌었다. 나라는 여전히 불안했다. 공산주의와 자유 진영의 이념적 갈등과 친일파와 민족주의자들의 극한적 대립에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 터진 것이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수와 순천뿐 아니라 광주와 나주는 물론 유 선교사가 개척하며 세웠던 주요 지역의 교회 공동체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여순반란사건 와중에 손양원 목사는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었다. 지리산과 호남을 발판으로 준동하던 남로당 지지자들과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좌파 청년의 총탄에 아들을 잃은 것이다. 순천 매산천의 둑이 피로 물들었다. 민족사의 고통이 손양원 목사에게 임했다.

손 목사는 오열하기보다 자식을 죽인 원수를 살려달라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을 하고, 증오 대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다. 믿음의 동역자 손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애양원을 찾았던 유 선교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두 아들을 죽였던 살인자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역설적인 사랑의 위대한 변증이던가?

손양원 목사를 통해 나누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사단이 시기했음인가? 믿음의 동역자 손 목사마저 한국전쟁 중 인민군의 총탄에 순교를 당했다. 형제 잃고 동역자를 잃은 유 선교사의 상심을 대신한 것은 나환자들의 찬양과 감사였다. 손 목사가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여수 애양원의 나병환자들이다.

손양원 목사를 잃은 상심에서 겨우 벗어날 즈음 갈등과 반목, 동족상잔의 아픔이 유 선교사의 사역 현장에 또 다른 암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화례가 이 땅에서 겪은 엽기적 사건, 한국전쟁이다.

양국주 /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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