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거짓말'
  • 송인규
  • 승인 2008.02.0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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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⑦

우리의 현주소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이라는 사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외면하고 산다. 어쩌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이 세상 풍조에 찌들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심이 둔화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직장 생활이나 삶의 처절한 경쟁 상황이 자신을 수많은 윤리적 딜레마 속으로 몰아넣는 것에 지쳐 기독 신앙으로부터 멀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말’의 문제가 꼭 신앙의 열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과만 연관된 것은 아니다.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되고 심지(心志)가 굳은 이들조차도 이 사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거짓말’과 관련하여 묘한 이중성(duplicity)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출 20:16)을 들먹이며 무해한 농담이나 체면치레의 표현들(‘예뻐졌네요’)조차도 죄악시하는가 하면, 종교적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성경을 일반 서적이라고 말하든지 선교사의 신분을 위장하여 자신을 회사원이라고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지혜나 용기의 예로 간주한다. 물론 이러한 이중성이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우발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필자의 목표가 이 사안에 대해 포괄적인 윤리 체계를 구성하든지 자세한 행동 지침을 마련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면의 제약으로 보나 필자의 능력상 한계로 보나 어림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거짓말’을 제대로 다루려면 그와 연관된 여러 주제나 사안들, 예를 들어 ‘거짓’(falsehood), ‘속임수’(cheating), ‘기만’(deception), ‘은폐’ (concealment/non-disclosure), ‘핑계’(excuse), ‘과장’(exaggeration), ‘진실의 언급’(truth-telling) 등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 주제와 관련해 성경 상의 데이터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셋째, ‘거짓말’에 대한 평가는 어떤 윤리 이론을 전제하느냐와 연관이 되어 있다.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s)를 견지하느냐 목적론적·결과론적 윤리(teleological·consequentialist ethics)를 원칙으로 삼느냐? 도덕적 딜레마(moral dilemma)란 존재하는 것인가? 만일 존재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등이 몇 가지 예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 글에서 거짓말에 대한 모든 문제점들과 그에 연관된 근본적 이슈들을 포괄적으로 담아내기란 매우 힘들다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상기한 제약성을 염두에 두고서 ‘거짓말’과 관련하여 필자 나름대로의 일관성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거짓말’(lying)은 '화자‘(話者)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바와 다른 내용으로 사태를 진술하거나 자신의 심중에 의도하는 바와 다른 내용으로 발언을 시도하는 행위'라고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그렇다면 거짓말은 (i) 화자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사태를 의도적으로 그릇되게 묘사하거나 진술하는 행위와 (ii) 화자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유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진정한 의도와 다른 내용을 진술하는 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된다. 일단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서 이제부터는 주로 ‘모든 종류의 거짓말이 다 죄인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 필요한 경우 거짓말과 관련된 일상생활의 예 또한 언급할 것이다.

거짓말에 대한 성경의 교훈

성경은 거짓말을 악하고 죄 된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첫째, 거짓말은 하나님의 본성이나 성품과 반대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민 23:19)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 1:2)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해가는 우리로 큰 위안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8)
 

그래서 요한은 어떤 이가 극도로 잘못된 행동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상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요일 1: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요일 5:10)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레 19:11)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엡 4:25)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골 3:9)

셋째,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악의 한 가지로, 거짓말하는 자는 악한 자로 취급하신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 12:2)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딤전 1:1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이러한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거짓말은 분명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거짓말의 사례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성경의 교훈적 본문(didactic passages)에서는 거짓말을 죄악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건 묘사적 본문(narrative passages)에서는 그렇게 일률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거짓말의 사례와 관련하여 세 종류를 구별하고자 한다.

(1) 거짓말을 악하게 판정한 사례들

성경 최초의 거짓말은 사단으로부터 연유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4)
 

사단은 뱀을 통해 말하는 가운데 거짓말의 전형적 패턴을 연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수의 열매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사단은 그것을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인간으로서 최초의 거짓말쟁이는 가인이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 4:8~9)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이고 그 시체를 처리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우의 행방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의 사악한 거짓말이라고 하겠다.

베드로 역시 3회에 걸쳐 거짓말을 한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 26:69~75)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은 그 골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거짓말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거짓말은 죄악된 것이다.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는 땅 판 돈과 관련하여 거짓말을 했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행 5:7~10)

삽비라의 거짓말은 “주의 영을 시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악한 것이었고 또 즉각적인 심판을 받았다.
 
(2) 거짓말을 인정하는 (듯한) 사례들

거짓말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분명 거짓말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용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출 1:15~20)

히브리 산파들의 답변은 분명 사실과 거짓이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히브리 여인의 아이들이라고 하나 같이 그런 식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 대한 산파들의 답변을 긍정적으로 보셨다는 뜻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수 2:3~6)

라합의 보고가 거짓말인 것은 명명백백하다. 그는 정탐꾼 둘을 지붕에 이미 숨겨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문 밖으로 나갔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합의 행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증거에 의해 알 수 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 11:31)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5) 

라합이 정탐꾼에 대해 취한 조치를 가리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행함으로 온전케 된 믿음”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 조치 가운데에는 거짓말이 들어 있었고 만일 라합이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탐꾼을 살려보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지어 선지자 사무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임기응변의 대책(거기에는 진실의 은폐가 들어 있는데)을 가르쳐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삼상 16:1~5)

사울의 실각을 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 부을 것을 명하신다. 그러나 까딱 잘못해 그런 계획이 사울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사무엘은 죽을 수도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나님께 아뢰자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묘책을 제시하시는데, 베들레헴에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도 드리고 지정한 자에게 기름도 부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베들레헴의 장로들이 무슨 일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사무엘의 답변은 “여호와께 제사드리러 온다는 것”이었다. 이 대답이 결코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제사도 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답변은 베들레헴을 방문한 목적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상 제사를 드리는 것은 더 중요한 목적(이새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택해 기름을 부으려는 것)을 교묘히 가장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사무엘이 진실을 송두리째(whole truth) 밝히고자 했다면, “이새의 아들 가운데 하나에 기름을 부어야 하는데 사울 왕이 알면 큰일 나니까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단지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고 왔소”라고 했어야 한다.

발언 내용과 화자의 의도 사이에 고의적 불일치(intentional discrepancy)를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평가 받은 것이 솔로몬의 경우다. 창기 둘이서 한 아이를 밤에 치어 죽이고는 다른 창기의 아이와 바꿔치기를 했는데, 그 산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우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때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왕상 3:24~28)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은 겉으로는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25절)고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코 그의 진의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발언 목적은 그 발언 내용이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왕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어미들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자 함이었다. 필자의 정의에 의하면 이 경우 또한 거짓말로 분류가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솔로몬의 내면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증거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거짓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1), (2)에 포함된 여덟 가지 사례를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도표를 보라.

   
 
   
 
이상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 거짓말에 대한 윤리적 판정이 가장 영향을 받는 것은, 주로 (i) ‘선행(先行) 범죄 유무’ 및 (iv) ‘거짓말을 하는 목적과 의도’와 연관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악한 판정을 받은 거짓말들은 그 거짓말 이전에 어떤 범행이 선행되었고, 거짓말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나 의도가 그릇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긍정적인 판정을 받은(적극적으로 추천이 되었든지 아니면 최소한 용납이 된)거짓말들은 선행하는 범죄가 없고 거짓말의 목적이나 의도가 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성취와 연관이 된다는 것이다. 히브리 산파들은 아이들을 살렸고,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겼으며,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을 붓고자 했는가 하면, 솔로몬은 재판에 있어 탁월한 해결사 노릇을 했다는 말이다.

(3) 거짓말에 대해 아무런 평가가 없는 사례들

성경에 등장하는 또 한 부류의 거짓말들은 그저 그 사례가 기록만 되어 있을 뿐 그에 대한 윤리적 판정은 유보된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창 12:11~13)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3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삼상 20:5~6)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없느냐?”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삼상 21:1~2)

이제 이상의 사례를 앞에서 마련한 판정표에 넣어 보자.    

   
 
   
 
아브람의 경우 비록 선행 범죄는 없었지만 거짓말의 목적과 의도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다. 아브람은 자기 자신의 안전만 생각했지 심지어 사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거짓말은 잘못된 것으로 판정되어야 한다. 야곱의 경우는 좀더 문제가 된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와의 공모에 합세함으로써 선행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복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보다는 인위적 수단(그 가운데 매우 뻔뻔스런 거짓말이 포함되는데)에 의해 그것을 획득하고자 했다. 이로 보건대 야곱의 거짓말은 사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윗의 경우는 어떤가? 요나단과의 거짓말 전략은 선행 범죄가 없는 데서 꾸며졌고, 사울 왕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려는 목적 하에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위에 나타난 아브람 경우나 야곱의 사례와 차별화가 된다. 이 경우 다윗의 거짓말은 크게 장려할 바는 못 되지만 어느 정도 긍정적인 사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 대해 시도한 거짓말은 실상 아히멜렉을 위한 것이었다. 아히멜렉이 다윗의 처지를 알고 도와주었으면 후환이 두려울 것이었겠지만, 아무 것도 모른 채 도와 주었다면 죄책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거짓말은 이런 목적과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좀 더 긍정적인 판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에 대한 윤리적 판정

필자는 지금까지 성경에 나타난 거짓말의 사례에 기초하여 모든 거짓말을 일률적으로 죄악된 것이라 판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주장했다. 또 긍정적인 경우의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사안에 따라 그 윤리적 타당성의 정도가 다르고, 부정적인 거짓말 또한 악성의 정도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식의 거짓말 이해에 대해 불편하고 불안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아니,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에 능숙해서 문제인데, 이런 거짓말 이론을 내놓을 경우 사태는 훨씬 더 악화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리라. 필자 역시 이런 우려에 일말의 진리조차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짓말의 예방이나 억제를 위한답시고 성경적으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 거짓말 이론을 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이러한 우려와 부담 혹은 난점을 염두에 두고서 필자는 결론적으로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더 진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진리이신 까닭이다(성부 → 요 17:3; 성자 →요 14:6; 성령 → 요일 5:6). 하나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인 우리는 진실 된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이 진실은 우리의 말․행위․태도에 반영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먼저 진리의 사람들로 세워져 있지 않는다면, 필자가 제시하는 거짓말 이론은 한갓 자신의 거짓말을 합리화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둘째, 어떤 종류의 ‘거짓말’은 윤리적 타당성 여부를 논할 필요가 없다. 무해한 농담이나 예의상 발하는 인사치레의 말들 (‘오늘 젊어 보여요’), 체면 유지상 둘러대는 가벼운 핑계들 (부부 싸움 때문에 교회당에 못 왔을 때 ‘오늘 집사람이 몸이 좀 좋지 않아서…’라고 말함), 일종의 과장법들 (‘온 세상에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없을 거야’), 운동 경기에서의 과장된 동작과 연관된 말들 (반대쪽을 바라보며 ‘여기야!’라는 고함과 함께 실제로는 공을 앞으로 참)에 대해서조차 부정적 판정을 가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부당한 처사이다.

셋째, 상대방이 비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 처해 있는 경우 ‘거짓말’은 타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정신적 충격을 이기기 힘든 노모가 자식의 근황을 물었다고 해서, 자녀의 암 진단이나 파산 소식을 은폐하지 않고 알리는 것은 어리석으며 동시에 잔인한 일이다. 중독성 약품에 찌들어 증세가 악화일로를 걷는 환자에게 소금물을 투여하면서 그가 두통을 호소하자 약의 종류를 바꿨다고 말하는 것이 비록 거짓이기는 하지만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녀가 너무 안하무인격이 되었을 때 ‘너 한번만 더 그 따위로 행동하면 집에서 내쫓을 거야’라고 했을 때 사실 그의 마음속으로는 쫓아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고 해서 이런 말이 거짓말로 분류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창기 두 명을 현명하게 다루었던 솔로몬의 경우와 비슷한 이치이다.

넷째, 적대적이거나 경쟁적 상황에 처한 경우 어떤 종류의 거짓말은 도덕적 의무의 일환이기도 하다. 적성 국가와의 첩보전에서 거짓 정보를 흘린다든지, 신제품 개발 기술을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기 위해 해외에서 연수를 온 기술자들에게 제품 생산의 일부 과정을 그럴 듯한 핑계를 대어 공개하지 않는다든지, 군사 기밀의 내용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든지 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라고까지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죄질이 나쁜 테러리스트들에게 본국 국민이 억류되어 있고 이들에 대한 구출 작전을 위해 특공대가 모처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하자. 당신이 외교부 장관일 경우, 신문 기자가 “지금 특공대가 훈련을 받고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물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그 때 당신은 “그런 일은 소문에 불과합니다”라고 해야 마땅하지, “사실입니다” 라는 식으로 답한다면 당신은 억류되어 있는 인질들을 위기에 처하도록 만드는 매우 무책임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다섯째, 거짓말의 윤리적 판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표준은 화자의 동기와 목적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욕심, 허영, 위선을 위해서거나 고난과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이는 분명 윤리적으로 악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적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채택하는 ‘거짓말’은 상당히 많은 경우 정당화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말’을 통해 성경이 인정하는 바로서의 자기희생과 이웃 사랑이 발견될 수 있다면, 이 ‘거짓말’은 그야말로 매우 고상한 행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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