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과 교회 개혁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과 교회 개혁
  • 최종운
  • 승인 2008.03.03 0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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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 (百聞而不如一見)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교육을 통해서 무수히도 많은 지식을 보고, 듣고,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성경도 배우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배워야 하지만 동양의 고전, 격언, 속담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은 무수히도 많이 듣고 사용하는 문자입니다. 필자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而不如一見)이란 말에서 시작하여 그리 알려지지 않은 문자까지도 시리즈로 소개하고 거기서 복음과 개혁의 원리를 한 번 펼쳐 볼까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은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가장 우리가 많이 알고 사용되는 격언 중 하나입니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실제적인 경험을 갖게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후 물건을 사는 구매 습관이 있습니다. 물건 구매에도 일종의 스킨십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과 판단하는 것

우리는 자기 직업과 관심 분야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정보가 달라집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 소매치기 눈에는 옷과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지갑의 위치를 아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를 쉽게 관찰해보려면 시장으로 한 번 지나가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업종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미장원 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만 쳐다보고, 신발 장사는 신발만 쳐다보는 것은 약간의 주의력만 있으면 이내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며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고, 얼마만한 통찰력을 가진 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상반된 입장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판단과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하나님을 직접 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라는 말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욥기 42:5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뵐 수가 없으니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천둥과 빗소리와 새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창조하신 피조물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싹이 돋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창조질서의 모습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비새끼 신앙에서 벗어나야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신앙 양태는 목사의 설교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절반을 설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이 인간에게 전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따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설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허지만 제비새끼 마냥 받아먹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개혁적인 신학 지식과 성경을 모르면 목사들이 엉터리 설교를 해도 아멘 하거든요. 그래서 설교를 백번 듣는 것보다 성경과 신학 서적으로 한번 보고 읽는 게 낫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능동적으로 읽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설교를 듣기를 더 좋아 합니다. 그것도 복을 주는 설교, 웃음을 주는 설교를 편식하여 듣다보니 천박한 하나님 백성으로 전락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몸은 비대했을지라도 일종의 영적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기독교 서적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기독교 관련 서적들이 홍수를 이룹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어떤 책을 골라 읽어야 제대로 신앙생활에 유익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방면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허지만 이런 책들 속에서도 천박한 물량적 축복 이야기와 허구의 간증, 성공 스토리와 감성을 자극하는 책들이 주류를 이루게 됨을 보게 됩니다.

허지만 이중에서도 눈에 띄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런 책을 발견하게 될 때는 마치 산삼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앞섭니다. 그런 책들 중에 하나가 옥성호 선생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다면 좋은 책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책들은 잘 팔리지 않기 때문에 진열대의 구석에 있는 수가 많습니다. AW 토저 시리즈 책들은 출판사의 인지도와 마케팅으로 잘 팔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음과 양이 있습니다. 심리학과 마케팅의 영역 또한 하나님을 이해하고 복음을 설명하는 데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현재의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긍정적인 측면을 확대하는 것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옥성호 선생의 <000물든 부족한 기독교> 책들에 대한 반론과 비평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반론과 비평은 지엽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내용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특히 부흥사들과 목회 성공을 꿈꾸는 목사들이 심리학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내용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관점으로도 기독교를 분석하는구나!’ 하는 식의 통합, 수용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탄력적인 사고를 가지려면 상당한 신학훈련과 영적 훈련 및 통찰력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옥성호 선생의 책 속에서는 교회가 심리학을 가장 많이 울어내어 먹은 <긍정적 사고>와 <성공의 법칙>이 한국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많은 병적이고 왜곡된 신앙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인간의 교만의 정점에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 우상을 만드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생태학적 사고로 분별력을 가져야

필자의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세상의 어떠한 분야의 글이나, 학문이라도 읽고, 사고하고, 행동하고, 적용하기 나름입니다. 심리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거지요. 단지 교회 생활에서 부정적 요소가 어떻게 온존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옷을 채색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서적이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피조물의 속성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닌 게 많습니다. 물론 인간이 만든 물건에는 악의 요소를 가지도록 원래 만든 취지의 용도보다 악한 쪽으로 사용되어지도록 하는 게 더 많지만요. 이런 피조물의 속성을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런 본능에는 생리적인 현상과 사회적인 욕구 등 무수히도 많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서 부터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즉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인지, 사탄의 마음에 합한 것인지 양 갈래의 가치가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헷갈리며 잘못 가르치고 배우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혼란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적용을 다시 교회 안으로 해보면 우리는 너무도 그동안 듣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즉 설교를 듣고, 설교 테이프, 찬양 테이프를 듣는 것을 부정적인 것만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과연 그런 설교가 성경적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력을 가질 필요성은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성경책을 광범위한 사고로 읽는 게 중요합니다. 신학 서적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비로소 백문이 불여일견으로써의 생태학적 교회 개혁의 시야가 보이게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최종운 / 기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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