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견이 불여일각과 교회개혁
백견이 불여일각과 교회개혁
  • 최종운
  • 승인 2008.03.0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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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깨닫는 것이 낫다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而不如一見)에 이어 두 번째 시리즈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백견이 불여일각(百見而不如一覺)이라는 말은 백 번을 보느니보다 한 번 깨닫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저번에 말한 백문이 불여일견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말입니다. 이는 많이 보고, 많이 아는 지식보다 한 번 깨닫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는 고학력, 지성인의 엘리트 사회입니다. 지식인이 대접을 받는 사회입니다. 교양인은 그다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인문학은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밥벌이를 위한 지식이 대학의 전반적인 학문적 분위기를 지배하여 버렸습니다. 전문적 지식을 배우기 위해 직업 훈련소인 대학에 가고 석/박사 학위 라이센스를 땁니다. 그러면 저절로 명예와 성공과 부가 따라 오지요. 즉 인격적 인간보다는 기능적 인간이 우대를 받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사회는 이처럼 각박해지고 비리와 부패와 투기와 자산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는 전문적인 양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인문학적 지혜의 깨달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적 깨달음도 없구요. 인생에서 단 한 번의 깨달음이 있었더라면 장차관 임명 때마다 도중하차하거나 청문회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정치, 종교계를 비롯한 각 분야의 지도층들은 도덕적, 종교적 깨달음이 없는 후안무치한 동물적인 자본주의적 삶을 살고 있기에 우리나라의 엘리트 상층부가 사회적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깨달음이 없는 지식은 부패로 연결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이 장관 인선 대상자  5,000명 중에서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 그 정도의 구설수에 올랐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이처럼 청렴한 인물의 인프라가 빈곤하다는 것은 나라의 불행이자 국민의 부덕의 소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에게 화려한 이력과 경력은 있을지언정 깨달음에 기초한 인격과 덕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기능적 인간의 캐리어는 화려하지만 인간적 캐리어는 반비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지성인의  집단적 부패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역시 교회 안에서도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브랜드 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고 신학대학 교수로 신학 서적 수천 권과 성경을 골백번 읽었어도 한 번 깨닫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기능적으로는 신학과 성경 해석, 설교에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교인들로부터 수많은 인기와 우상적 존재로 인식하는 절대적 팬을 확보하지만, 깨달음이 없는 인간성을 기준하여 볼 때는 지식에 반비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귀족 목사의 탄생이 되는 것이지요.

기계적인 성경 읽기보다 깨달음으로 읽어야

각 교회에서는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를 적극 권장합니다. 성경이란 교과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참고서적도 풍부하게 공부하게 하여야 합니다. 비록 이렇게 해서 신학 서적, 광범위한 책을 수천 권 읽어도, 물리적 독서량이 아무리 많더라도 한 번 깨닫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촌철살인의 의미로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연말이면 각 교회마다 시상을 하는데, 성경 다독상은 특정인의 우쭐함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다행이겠지만, 대부분 물리적 독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 읽기란 단지 성경 다독상 받는 데만 유효할 뿐입니다. 깨닫는 마음의 소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기본적인 훈련이 잘 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린 마음과 통찰력이 기초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복음을 지식적으로 알기보다는 깨닫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팔만대장경으로 보관되지 말아야

요즘은 성경 필사도 유행인가 봅니다. 성경 필사의 풍습은 원래 절에서 하는 불경 필사에서 교회가 도입하였는데, 어찌되었던 좋은 풍습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필사하는 과정에 은혜를 받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으면 좋겠는데, 그저 정성들여 필사하면 그 정성에 감동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 하는 무속적 배경이 깔린 필사는 불경 필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필사한 성경을 무슨 보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앙 캐리어로 믿음의 증거로 우쭐대고 있습니다. 필사의 동기는 좋다고 하더라도 필사의 결과가 교만으로 우쭐함으로 외부적 측정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한국 교회가 필사 성경을 모아서 보관한다면 팔만대장경처럼 유물로 남지 않을까요? 이후의 역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수많은 성경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이런 성경도 역시 팔만대장경처럼 보관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한 구절 깨닫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완독하는 것보다

성경을 읽을 때 많이 읽는 것보다는 한 구절을 읽더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구스 내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깨달음이 없어서 답답해하는 중에 빌립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아 복음을 제대로 깨닫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복 받는 성경책으로, 출세 성공을 보장하는 신념의 마력과 같은 책으로, 목사와 교회라는 건물 껍데기에 집착하고 맹종하게 하는 성경은 결코 깨달음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 읽더라도 깨달으면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성경 한 권 완독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교과서는 성경과 찬송입니다. 성경을 단순히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식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연말 실적 보고하기 위해서 읽거나 안 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나님께서 이쁘게 봐주시겠지 하는 어리광으로 읽기보다는 깨달음을 얻는 방향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은 성경과 개혁 신학의 마인드

목사들은 신학 지식과 하나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이 말만 하고 설교만 하지 실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강물에 빠져도 입만 물 위로 내놓는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늘 설교로 말만 하는 습관이 위기 상황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우스개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표준은 성경과 바른 개혁 신학이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이를 기초로 한 기독교 서적을 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개혁 교회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종교개혁 관련 책들을 읽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부흥, 목회에 성공한 브랜드 목사로 칭송받더라도 개혁주의와 성경을 중심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거짓 설교입니다. 오히려 개혁신학의 전통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업그레이드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성경의 엑기스를 집대성한 위대한 책임은 분명합니다. 기독교강요를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그분의 천재성에 감탄합니다. 전무후무한 유일무이한 지존의 신학자로 여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절대성은 부여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칼빈 그분 역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성의 소유자이니까요?

역사적 이면에 또 다른 칼빈의 모습을 간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칼빈보다 위대한 신학자는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필자 같은 무명의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주류인 사람이 기독교강요를 왈가왈부한다는 자체가 불경스럽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른 채 조직생활을 하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도무지 무엇을 믿는지조차 모른 채로 교회만을 찾는 교회생활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친목회, 동기회 수준의 인간관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게 됨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거래처 관리를 위해, 인맥을 쌓으려고 사회적 액세서리로, 종교적 품위를 위해서, 성도들과 코드를 맞추기 위해서 , 가족의 강요로 교회생활을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생활 속에는 성경은 나와 멀어져 있습니다. 강요와 수동적인 성경 읽기보다 무엇보다 성경을 깨닫는 마음으로 읽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한 것인데, 오늘날 복음대로 살려고 행하는 믿음은 희소합니다. 알맹이는 내팽개치고 껍데기만 아름답고 세련되게 포장하여 복음이라고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타락한 자본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백화점의 모든 상품의 포장이 어떤 때는 알맹이보다 더 화려하고 상품 가격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이는 알맹이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의 사색당쟁의 피비린내를 풍기게 한 주자학적 유교의 허위를 도배한 의식구조를 반영하는 모습입니다. 껍데기인 브랜드를 먹고, 입고, 걸치고, 신고, 타고, 즐기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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