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안식도 죄
불평등한 안식도 죄
  • 김재일
  • 승인 2008.04.0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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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2~15)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정기적인 안식 혹은 쉼을 엄격한 종교적 계율로 정한 종교는 야훼 종교인 유대-기독교가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물론 이슬람도 있지만, 이슬람도 율법 규정에 있어서는 유대-기독교 전통을 많이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에 대한 이유를 성서의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우주론적인 신앙 고백 속에서 안식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신명기서에서는 노예들의 해방 사건을 기억나게 함으로써 안식일을 사회적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에서 공통적인 것은, 안식은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내가 관계하는 모든 것들 즉 자연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누리는 것이며, 그 기초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주적 신앙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즉 야훼 종교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속에서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 모두가 함께 쉼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일 사상은 심도가 더 깊어가면서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고백으로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인간들만의 안식을 넘어 땅과 자연에 이르게 됩니다. 실지로 안식년과 희년은 교회나 학계의 지도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땅(대지)과 노예 그리고 땅을 빼앗긴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안식년이 7번 지나고 나서 대안식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년은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철저한 하나님 주권에 기초한 사회적 소유에 대한 되돌림의 계율입니다. 즉 고대 유목 농경 사회에 있어서의 안식년과 희년 규정은 당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말로 혁명적인 규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의 기초는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간은 그 누구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앙 고백임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한 신앙의 고백은 말로만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해방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기실 경제적 조건이 된다면 나와 내 가족이 안식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안식년을 누려도 월급이 나온다면 누구나 쉴 수가 있습니다. 놀면서 돈을 번다면 누구나가 안식년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없이도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조선 시대의 양반 계급인 한량들은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 년 열두 달을 놀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부 졸부들과 브로커들의 놀이터인 골프장은 평일에도 만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과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남을 쉬게 하는 것, 특히 그것 때문에 손해 보더라도 남을 쉬게 하는 것과 땅을 쉬게 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철저한 신앙 고백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식·안식년·희년은 고리타분한 율법의 문제를 넘어 신앙 고백의 문제입니다. 또한 그것이 율법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안식을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쉬느냐 안 쉬느냐를 넘어서, 안식일(주일)을 지키느냐 아니냐를 넘어서, ‘내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타인과 자연을 쉬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기복적 신앙으로는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비로소 이해와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천부적인 안식을 빼앗거나 왜곡시키고 있지만, 교회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부터가 그것을 왜곡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주5일제를 반대한 한국 보수 개신교계의 반응입니다.

만약에 성서적으로 안식일을 이야기한다면 안식일은 토요일이지 일요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토요 휴무제는 주일 휴무제보다 더 성서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평신도들은 주일 목사보다도 더 바쁩니다. 대형 교회가 아닌 웬만한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에, 성가대에 주일이면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월요일에 쉬는 것에 비해 그런 평신도들은 월요일부터는 더욱 바쁘게 일을 시작합니다.

더욱 더 블랙 코미디 같은 일은 휴가가 별로 없는 평신도들에게는 여름휴가를 교회학교의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에 봉사를 하게 하거나 혹은 전교인 수련회라 하여 쉬지 못하게 하면서, 그 교회 담임목사와 목사들은 적게는 1주나 2주, 때론 한 달까지 여름휴가를 가는 몰염치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점점 더 늘어나는 목사님들의 안식년 휴가 관행은 교회의 신앙이 성장한 것인지 퇴행한 것인지 판단하기조차 거북합니다.

아직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힘든 분들이 이 사회에 적지 않게 있지만, 현대에 들어 치열한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의 결과 그리고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과 경제적 발전의 결과 현대인들의 쉬는 날은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이 과거에 비해 노는 날은 많은 것 같지만, 참된 의미에서의 안식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노동의 차별과 돈에 대한 무한한 욕망 그리고 안식마저도 상품화된 현대의 소비 문명이 인간 스스로를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유혹하는 상업적인 휴식 문화는 안식일과 휴가를 안식이 되지 못하게 하고 단순하게 돈을 쓰는 날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안식조차도 소비 행위를 통해서만 얻는 현대의 휴가 문화는 휴가 중에 안식은커녕 우리들의 몸을 더 피곤하게 하기 일쑤이며,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을 오히려 지치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소비를 통한 휴가는 대부분의 현대적 소비문화가 그러하듯 많든 적든 자연 환경의 파괴를 수반합니다. 또한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투기 문화와 사회에 만연한 부패 구조는 일하지 않고도 노는 사람을 양산하는 반면에 경제 구조를 왜곡시켜 투기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쉬는 것과 쉬지 못하고 일만 하는 것 모두가 성서의 안식일 정신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이러한 길로만 매진하여 가고 있으며, 교회마저도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안식일에 대한 지극히 자기중심적, 교회 중심적 이해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안식년과 쉼은 땀 흘려 일하는 자들의 것이어야 하며, 사회와 자연과의 연대감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만 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들을 위하여 제정해 주신 것이며, 노예살이를 하면서 울부짖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켜주시면서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너와 네 가족과 이웃과 종들과 그리고 땅들과 함께 쉬어라. 그래야 그 다음 일이 즐겁다. 그리고 그것이 축복이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김재일 / 예장생활협동조합 대표, 주말에는 강원도 홍천강가의 보리울교회에서 시골 교우들과 소박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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