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미래를 대비하는 삶
어두운 미래를 대비하는 삶
  • 박득훈
  • 승인 2008.05.28 14: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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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화려한 성전에 압도되지 말고,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처럼 기독교인 역시 가시밭 길을 갈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마가복음 13장 1~13절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역사는 때로 깊고 어두운 계곡을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역사의 어두운 계곡들을 예고하십니다. 그 목적은 미래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져 갈 것인지에 대하여 이런 저런 추측을 하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자들로 하여금 어두운 미래를 잘 대비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 에스겔, 요한계시록 같은 묵시록에 나타난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만일 미래 사건의 구체적 내용과 연대를 가르쳐주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적 언어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묵시록의 내용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연결시키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무슨 대단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 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신 어두운 미래의 중첩성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전 파괴를 향하여 움직여 가는 역사의 과정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향하여 흘러가는 역사의 과정을 중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고하신 어두운 사건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성전 파괴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사건들은 시대마다 다른 모양으로 역사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본문은 마가복음이 쓰인 지 1940여 년이 지난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질 어두운 미래는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그 미래를 준비하며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은 우선 1절부터 13절까지만 보겠습니다.

1. 겉만 화려한 성전에 압도되지 말라(1~2)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주로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다가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당시 성전은 솔로몬 성전 이래로 세 번째, 헤롯의 주도하에 건축된 것입니다. 주후 1세기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도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성전은 단단하고 하얀 돌들로 지어졌다. 그 돌은 각각 길이 15큐빗(11.5m), 높이 8큐빗(3.68m), 넓이 12 큐빗(5.52m)'. 또한 '돌들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헤롯 가문을 싫어했던 랍비들도 성전에 대하여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장엄함을 보지 못한 자는 일생에 꼭 봐야 할 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성전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 자는 일생에 영광스러운 건물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당한 제자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매우 소박하고 가난한  작은 공동체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둘러보니 그만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압도당한 것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쐐기를 박으십니다. '겉만 화려한 성전에 매료되거나 압도당하지 말라. 그 건물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의 예고는 주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 사건을 통해 성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성전에 상응하는 건물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짓고는 그에 매료당해,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원래 다윗이 처음으로 성전 건축의 뜻을 나단에게 내비쳤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보시기는 했지만(왕상 8:18) 성전 건축 자체에 대하여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삼하 7:5). 하나님은 왕정을 허락할 때처럼 마지못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십니다. 그래도 솔로몬이 처음 성전 건축을 할 때는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독점할 만한 장소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왕상 8:27). 성전 예배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회개의 기도와 돌이킴이 중요한 것임을 인식했습니다(왕상 8:31~53).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성전은 유대의 영적·도덕적 타락을 덮어주는 건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여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정의를 짓밟는 한 성전에 아무리 열심히 모여도 쓸데없이 마당만 밟는 것이요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사 1:11~13). 예레미야 역시 사회정의를 짓밟으면서 열심히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고 경고합니다(렘 7:4). 또한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라고 한탄합니다(렘 7:11).

예수님 당시 성전이 바로 그렇게 도적이 숨는 소굴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의 내적 부패상을 간과한 채 성전의 외적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매료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회 건물 건축이 결정되자 몇 주에 걸쳐서 교회 건물은 아무 것도 아니며 진정한 성전은 신앙공동체라는 점을 그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교회 리더가 그러더랍니다. '목사님, 교회 건물을 짓자는 겁니까, 말자는 겁니까?' 참 괜찮은 목사님 아닙니까?

언덕교회 규약에 예배당 전용 건물을 짓지 않겠다고 명시한 뜻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건물 자체를 반대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의 진정한 본질과 중심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럴듯한 건물이 없어도 성령이 역사하면 교회는 얼마든지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경건해 보이는 웅장한 교회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는 것을 보노라면 종종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2. 거짓된 사람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5~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 예루살렘 성전을 마주보고 앉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네 제자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님은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말씀해주시지만 그들의 호기심을 시원하게 만족할 만큼 분명하고 자세하게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미래를 어떤 자세로 맞이하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 자세는 거짓된 사람들이 등장하게 될 테니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옵니다. 유대인에게 이름이란 존엄성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진 권세와 위엄을 자신이 지녔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을 합니다. 바로 '내가 그'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드려야할 마음을 도적질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사를 잠시만 들여다보아도 늘 이런 존재들이 나타나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제 친구 목사가 뉴욕에서 목회 할 때의 경험을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마침 시카고에 한국의 저명한 목사님이 집회 차 오셨습니다. 뉴욕의 한국 청소년들을 향한 마음으로 불타 있던 친구 목사는 그 분에게 달려가 뉴욕에서 청소년 집회를 준비할 테니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세 가지 조건을 내놓더랍니다. 첫째, 뉴욕에서 가장 고급 호텔을 숙소로 준비할 것. 둘째, 뉴욕에서 가장 좋은 고급 자동차를 마련할 것. 셋째, 자동차에서 내려 집회 장소로 걸어가는 길목에 양쪽으로 경호원을 세울 것.

놀랍죠. 그런데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분이 한국 교회의 최고 목사로 추앙과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이 분신자살하지 않았습니까. 한국 백성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지도자에게 유난히 쉽게 매료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힘을 상실합니다. 교계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 자신의 권력을 쌓아나가지 않도록 기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유혹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저도 포함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정신 바짝 차립시다. 철저히 주님만 바라보고 그분만 사랑하며 그분에게만 절대적 충성을 바칩시다.

3.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두려워 말라(7~8)

예수님은 내전과 반란, 그리고 민족 간과 나라 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마치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당황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류 역사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전쟁을 경험하다 보면 세상에 대하여 매우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에 젖어버리기 쉽습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후유증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거나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은 정말 슬프고 비극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삶의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나도 역사는 한참 흘러갈 것을 내다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팔복에서 말씀한 것처럼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 대한 배려와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국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몸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는 날 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우리 몸을 보살피고 관리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 모 신문에서 우간다의 슬픈 형편을 읽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랜 내전 가운데 10대 초·중반의 어린 소녀들이 군인들에게 납치돼 성폭행 당하고 임신하여 어린이 엄마(child mother)가 됩니다. 이미 에이즈 균을 지닌 엄마는 모유를 갓 태어난 아이에게 먹이면 에이즈가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먹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참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가슴에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평화 운동이 좀 더 활기 있게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으면 그런 평화 운동에 뛰어들기도 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을 위한 구호사업을 담당하는 단체를 지원할 수 있는 길도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자연재해에 대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 곳곳에 지진이 있을 것을 언급하시며 그것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재난이란 단어는 산고의 진통을 말합니다. 심히 고통스러운 자연재해가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과학이 발전했다고 해서 인류가 자연재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해 미국의 뉴올리언즈가 쑥대밭이 되고 수 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지진해일인 ‘쓰나미’가 동남아를 강타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예수님은 그에 대한 신학적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다만 자연재해를 바라보면서 '역사의 종말이 왔구나'하고 손을 놓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렇게 망해 가는 것이라고 포기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연재해 역시 삶의 현실과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길가에서 소경 걸인을 만나자 제자들은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며 다분히 신학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며 실천적인 답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소경을 고쳐주십니다(요 9:1~7)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신에게 항의했습니다. '왜 당신은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신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내지 않았는가?'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새겨 실천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현재 언덕교회의 역량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간절한 기도를 드립시다. 우리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찾아 드립시다. 그러면 더 큰 역량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4. 핍박을 끝까지 견뎌라(9~13)

핍박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핍박은 제자들 자신에게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경험한 것을 거의 그대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자들에 의해 공회에 넘겨져 재판을 받고 회당에서 매질 당할 것이며 결국 최종 재판을 받기 위해 권력자들과 임금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제자들을 죽는 자리에 넘겨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시대나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타락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핍박의 강도나 형태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는 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습니다. 남한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북한의 형편을 심각하게 우려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숨어서 신앙생활을 할 것이고 공산 정권이 허용한 교회 성도들은 가짜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남한에선 진정한 제자들에 대한 핍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착각입니다. 남한에는 공산 정권대신 맘몬 정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제자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신앙과 맘몬의 갈림길에 설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정말 순종하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두려움 때문에 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지 않습니까.

교회는 그래서 위로의 장이 되어야 하지만 영적 유격 훈련장의 역할도 해야 합니다. 어떤 핍박이 몰아쳐 와도 능히 견뎌낼 수 있는 지구력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핍박이 오면 증거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담력을 길러야 합니다. 핍박하는 사람 앞에 서게 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않고 성령님께 의지하는 법도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각오로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놀라운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대로 어두운 미래를 잘 대비합시다. 겉만 화려한 교회 건물에 압도당하지 맙시다. 거짓된 사람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전쟁과 재난 가운데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핍박을 끝까지 견뎌냅시다. 주님의 최후 승리에 참여합시다.

박득훈 / 언덕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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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fsky 2008-06-05 06:17:39
저는 박 목사님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어쩌면 그렇게 저의 생각과 같으신지 의아해 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목사가 아닌 장로교 장로로서 현재의 교회들의 내부를 볼때 목회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성도들의 신앙적 성숙도를 점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맘몬 주의에 빠져 있는지 아니면 기초적인 신앙의 진리마저도 모르고 있는지 알아 보아야 할 터인데 실상은 이와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장로로서 기도할 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박목사님과 같은 분이 계시고 또한 이런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히신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사관이 없는 설교와 진리의 형식만 빌린 설교 그리고 고난이라는 단어가 삭제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