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자 아주머니와 홍재인 할아버지
지정자 아주머니와 홍재인 할아버지
  • 박철
  • 승인 2008.08.25 0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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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목사의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1)

이따금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고요와 적요(寂寥)에 내 몸을 맡기면, 내 모든 욕심도 내 삶의 굴레와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일들도 다 하찮게 느껴진다. 어줍잖은 목회랍시고 이렇게 저렇게 부대끼며 살다보니 처지가 참 외롭다. 요즘 들어 무척 외로움을 탄다. 이럴 때 사람이 그립다. 대개 생각나는 사람들은 내가 목회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1.

   
 
  ▲ 정선 덕송교회 주일예배 모습.  
 
지정자 성도는 18년 전, 내가 강원도 정선에서 목회할 때 만난 분이다. 젊어서 남편이 장마철에 장강(長江)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급류에 휘말려 시체도 못 찾고 그 길로 과부가 되었다. 어린 아들 하나 달랑 남겨놓고 재산이라곤 오두막 한 채와 뒤켠에 손바닥만한 텃밭이 전부였다. 지정자 성도는 자신의 몸도 성치 못한데다 행동이 굼뜨고 말도 어눌하여 동네 사람들이 곁을 안 주고, 걸핏하면 지청구라 놀려 그 착한 마음에 상처가 깊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부임하기 전부터 교회에 나오셨다. 교인이래야 할머니 아주머니 합해 예닐곱 분, 청년 하나, 우리 집사람, 그리고 동네 아이들 스무 명쯤. 나는 그때 강단에서 뭐라고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설교랍시고 했을 텐데. 지금 생각은 그 시절 전국적으로 데모 열기가 한창이었을 무렵, 나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그것도 민중의 언어랍시고, 그들의 삶과는 전연 무관한 얘기를 토해냈을 것이 뻔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거대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군사독재정권의 권력 남용에 대한 저항으로 나의 삶은 일관했었다. 어찌 보면 그 시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 정면대결하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운동권이라는 꼬리가 성가시게 따라다녔다. 뜻을 같이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나는 거기서 내 몫이라는 삶을 4년 동안 살았다. 그때 제일 생각나는 사람 중에 한 분이 바로 지정자 성도이다.

그녀는 예배 시간이면 꼭 30분 전에 나와 방석을 펴놓고, 당신은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 햇병아리 전도사의 설교를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설교 시간이면 연신 눈물을 훔친다. 예배가 끝난 다음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물으면, “전도사님예, 전도사님이 참 불쌍해예. 사모님도 불쌍하고 다 불쌍해예.”

당신보다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새로 부임해온 전도사가 몇 명 모이지도 않는 교회에 와서 고생한다고 설교를 살살해도 되건만, 목청껏 열변을 토하니, 무슨 얘기든 상관없이 애처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거기서 물질 잘하고 밥 잘 먹는 사람으로 통했다. 여름이면 강에 가서 살았고, 모든 스트레스는 먹는 것으로 풀었다. 주는 건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지정자 성도는 내가 좋아하는 일명 과수기(?), 밀가루에 콩가루를 살짝 섞어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든 다음 칼국수처럼 끓여내는 것인데, 거기 사람들은 거기다 다른 양념은 안 하고 고추장을 풀어서 먹는 것이다. 내가 그걸 좋아한다. 사시사철 걸핏하면 과수기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이다. 한여름 장마철에도 쟁반에 과수기를 담아 신문지를 덮어서 이고 오는데, 오다가 장대비를 만났으니 국수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 철없는 전도사는 지정자 성도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따돌리고, 그녀의 유일한 아들마저도 어머니를 무시하기 일쑤니, 정에 주린 그녀는 전도사 내외에게 더 집착했을 터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 전해들은 소식은 그분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환갑도 안 지났을 나이에. 나는 큰 죄를 졌다. 그분의 사랑을 눈곱만큼도 못 갚았으니. 가끔 지정자 성도의 눈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이 생각난다. 내가 천국에 간다면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2.

   
 
  ▲ 남양 장덕교회 주일예배를 마치고.  
 
올해 74세의 우리 교회 종지기 할아버지는
질경이 같이 끈질긴 뚝심으로
가닥 많은 세월을 살아오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빈한한 살림살이
남의 집에 기대어 머슴살이 천대를 받으면서
이제 겨우 자신의 몸을 운신할 거처를 만드셨습니다.
… … …
우리 교회 종지기 할아버지는
재산 공개니 금융실명제니 관심도 없습니다.
그는 새벽 찬 안개를 뚫고 집을 나섭니다.
자신의 한 많은 세월을
그 기나긴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달래면서
한 조각의 위로와 평안을 얻기 위해
오늘도 새벽종을 울립니다.
                         -졸시, 종지기 할아버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의 일이다. 그해 겨울 초저녁, 이 장로님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홍재인 집사님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위독하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성경 가방을 꾸려 부리나케 달려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홍재인 집사님, 아니 나는 늘 홍재인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홍재인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남의 집 더부살이 머슴 생활을 하셨다. 하도 집이 가난하여 어린 그를 남의 집에 보내 더부살이 머슴을 살게 하고, 그해 새경을 부모님이 대신 받아가는 것이다. 머슴으로 이골이 나신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일과 몸이 하나이다.

슬하에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딸들은 시집가서 그럭저럭 살만한데 아들 셋이 하나같이 애물단지다. 여기다 저간의 사정을 다 적을 수는 없지 않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큰아들은 사고뭉치고, 둘째 셋째 아들은 대처에 떠돌아다니느라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몇 년째 편지 한 통 없다. 거기다 잊어버릴 만하면, 외상 쪽지가 날아와 부모 속을 썩인다. 그래서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착한 분이 얼굴이 벌게진다.

그러니 무슨 낙이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 교회 부흥회에 한 번 참석하셨다. 그 길로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나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진해서 교회 종지기가 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침상에 눕기 직전까지 하루도 종 줄을 놓지 않으셨다. 한겨울, 눈이 무르팍까지 올라올 때도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비는 비원(悲願)을 담아 ‘뎅그렁 뎅그렁’ 종을 울리시는데, 가끔 그 종소리를 귀담아 들으면 그 쇳소리에서 집 나간 아들을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홍재인 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합심하여 기도를 올렸다. 할아버지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목에서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가 들릴 뿐 전혀 미동도 없으시다. 내가 다시 찬송을 부르며 할아버지 손을 잡자 눈을 뜨셨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씀하신다.

셋째 아들 이름으로 부르면서
“아무개 왔어?”
그러시더니 저를 보시곤
“목사님 고마워요. 신세 많이 지고 가요. 우리 할멈 잘 부탁해요.”
또 무엇인가를 말씀하려는데 말이 나오지 않으신다.
“… … … … … …”
그리고 그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아는 체를 하시고는 눈을 감으셨다.

꼭 이맘때이다. 홍재인 할아버지도 내 머릿속 수첩에 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시 녹차 한 잔을 비운다.
진한 향이 온몸으로 퍼진다. 사람이 그립다.
녹차처럼 맑고 진한 향기가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박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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