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의 죄성
텃세의 죄성
  • 최종운
  • 승인 2009.04.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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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계에서는 어디를 가나 특유한 텃세란 기득권의 못된 습성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성에 포로가 된 우리 인간들의 철저한 자기 보호 능력의 발로라고 생각됩니다. 텃세가 가장 심한 곳은 군대입니다. 상급자가 새로 부임해와도 한참 동안은 졸병들의 텃세 행세로 신임 상급자는 애를 먹기 마련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사관, 장교가 전입하여도 이런 텃세 통과의례를 치르는데 이를 신고식이라고도 합니다. 외국의 이민 생활 속에서도 역시 그렇겠지요.

훈련소에서 배출한 신참이 전입가면 텃세로 기합 즉 얼차려를 받는 것도 일종의 텃세의 일종으로 이해합니다. 신임 하사, 소위로 임관해 부대로 배치 받은 하사관, 위관 장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병들의 텃세에 처음은 얼떨떨하겠지만, 점점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게 되지요. 군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텃세는 없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먼저 온 성도가 터줏대감인 것처럼 텃세를 부리고, 먼저 안수 받은 목사가 텃세를 부려 인간적 추잡함을 보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 회사의 경우에도 텃세가 심합니다. 상식적이고 이해가 가는 범위 안이라면 자연스런 텃세의 터널을 통과 할 수 있을 텐데 악의적이고 고위적인 텃세로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텃세가 존재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 역시 교회를 찾은 신입 교우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처음 들어온 사람이 불편하거나 낯설지 않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그런 곳으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서울역 앞에서 천막 교회로 전도를 하는 곳에도 텃세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자의 경우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식적인 텃세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적인 모멸감, 고의적인 트집 잡기, 직책으로 압력 넣기, 부당한 업무 지시 등. 텃세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텃세를 부리려고 하는 의식구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괴롭기만 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경쟁의식을 가지거나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한 마음에 못살게 굴어 스스로 퇴사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텃세를 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인내로, 직장 동료를 대하려고 하지만 괜히 심술을 부리고 인상을 쓰고 있어 접근하기조차 겁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텃세란, 비단 우리 인간 계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계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의 텃세는 우리가 '동물의 왕국'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조류의 경우에도 철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가 있고 어느 한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새가 있습니다. 철새는 청둥오리, 고니, 제비가 있습니다. 텃새로는 참새, 까마귀, 까치, 올빼미, 크낙새, 오색딱따구리 등이 있지요.

텃세는 일종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기 방어 기능입니다.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50점 따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동물들의 반응도 이와 비슷하리라 짐작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그런 텃세의 생리적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텃세란 앞서 말한 대로 자기 방어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굴러들어온 돌에게 박힌 돌이 빠지지 않으려는 생존 방식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박힌 돌끼리 똘똘 뭉쳐 기득권을 행사한다는 의미가 있지요. 동네에서는 굴러 들어온 돌이란 외지에서 살던 사람이 유입되어 지역에 정착한 사람을 말하고 박힌 돌이란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 터를 잡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보수 수구적이지만 굴러 들어온 돌은 개혁적이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역시 회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기존의 직원들은 쉽게 자기들의 영역 안으로 편입되는 것을 하용하지 않습니다. 신입사원은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비로소 자기들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게 인간들의 텃세 현상이지요. 이런 신고식은 군대와 교도소가 심합니다. 그리고 지성과 학문, 이성을 연마하는 대학 사회에서도 신입생 신고식이라는 텃세 통과의례를 하다가 과음, 폭력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매년 신학기가 되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질투, 시기 같은 감정이 있는 게 정상적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역시 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뒤늦게 세례를 받아서 신자가 된 사람들이 어쩌다가 구역장이 되고 집사, 장로가 되면 기득권을 누리던 성도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심히 불편하게 여깁니다. 이는 목사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란 곳도, 공무원 세계도 그렇고, 언론사 등등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에도 이런 텃세의 메커니즘은 있기 마련이지요.

초보 운전자의 어려움은 기존 운전자의 텃세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줌마들의 초보 운전일 경우 남자 운전자의 난폭 운전과 언어폭력으로 더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먼저 시작한 이와 나중 들어온 이가 있기 마련인데 나중 들어온 사람들이 그곳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초보가 되지요. 하지만 초보 시절의 고충과 아픔을 기억하며 나중에 온 사람들을 배려하는 이보다는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속담처럼 초보들을 다그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이성적으로·인격적으로·윤리적으로·신앙적으로·행위적으로, 냉철하고, 고매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텃세의 죄성으로부터는 피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특히 브랜드 목사, 교회의 지도자들, 담임목사와 부목사 간의 관계, 선배 부목사와 후배 부목사 간의 관계, 장로들 간의 관계 역시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이 세상의 가치관과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굴레를 최소화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 행해져야 할 우리들의 구원받은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저런 텃세의 죄성과 인간적 서열과 계급의식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 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교계의 지도자로, 브랜드 목사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내면은 온갖 죄성의 목록으로 인테리어하고 있는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모습은 우리보다 교회 밖에서 더 관찰되고 냄새를 더 잘 맡게 마련이서 교회의 신뢰도는 자꾸만 떨어져 가고만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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