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패'와의 무한 경쟁 버리고 '예수'를 모방하라
'짝패'와의 무한 경쟁 버리고 '예수'를 모방하라
  • 김기대
  • 승인 2009.07.04 15: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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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 (2) [멋진 하루], 신학적 주체의 회복을 위하여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5절, 10절. 표준새번역)

 

   
 
  ▲ 명품을 욕망하는 것은 다른 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멋진 하루>(이윤기 감독)는 그런 고민을 담고 있는 영화다.  
 

인간의 욕망은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욕망의 주체는 아담과 하와지만 욕망의 제공자는 사탄이다. 그런 점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지만 변명의 구실은 분명히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질책 앞에서 책임을 회피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것뿐이다. 아직 욕망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이 첫 번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가 지고 가겠다는 책임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하나님도 그것을 알았기에 그들을 낙원에서 내어 쫓지만 영원히 내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것은 이들 부부만이 아니다.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도 그렇다. 그는 최초 욕망의 제공자로서 음습하게 땅을 기어 다니는 운명이 되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땅을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형태로라도 욕망을 우리 가운데 남겨 두었다. 

욕망이 주체성을 갖게 된 것은 가인에서였다. 그는 누구의 유혹 없이 순전히 ‘인간적’인 욕망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다. 그의 부모가 하나님 같은 지혜를 갖고자 하는 욕망의 추구자였다면 가인은 선택권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의 추구자였다.

그는 제사를 드리는 주체이지만 동시에 제사를 받는 대상이 가진 선택권을 탐냈다. 대상을 조종하고 도구화하려던 못된 주체 가인은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인다. 모든 욕망에서 승리자는 하나님이듯이 가인 역시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부모들보다 더 먼 곳으로 내쫓긴다. 부모는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되었지만 가인은 떠돌이가 되었다. 겨우 자리를 잡은 놋 지역(창세기 4:16-놋은 떠돈다는 뜻)도 떠돌아다님의 은유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보다 타자(대상)를 조종하려는 것은 더욱 큰 죄라는 것을 성서는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첫 사람들과는 달리 모방과 경쟁이라는 현실 속에 던져진 존재다. 아브라함은 이 모방과 경쟁의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이 율법 이후의 인물인 모세보다 아브라함을 높이 샀던 것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었다. 아브라함의 주체의 자리에는 믿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욕망을 이겨내는 것은 오직 믿음임을 아브라함을 보여주었고 바울은 확인시켰다.

그러므로 욕망을 주체와 처음으로 관련시킨 것은 프로이드가 아니라 창세기 기자다. 다만 프로이드 덕분에 우리는 주체와 욕망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꿈의 분석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욕망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주체가 무시된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가 믿었던 사유 주체로서 근대적 주체는 그 힘을 잃고 욕망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주체의 비주체성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프로이드를 넘어서 욕망 이론을 정교화 시킨 사람은 라깡이다.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프로이드가 예수라면 라깡은 사도 바울이 된다. 그는 꿈을 넘어 욕망 자체가 구조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욕망의 구조성은 이미 첫 인류에게 나타난 것들이었다. 

르네 지라르는 '욕망 이론'을 모방과 연결시키면서 신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모방이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어서라기보다 다른 이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거나 욕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한다. 타자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모방은 차이의 상실을 가져오며 서로가 경쟁적인 '짝패'가 됨으로써 폭력을 불러온다. 지라르는 이 경쟁적 모방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를 따르라고 안내한다. 또한 이웃(짝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열 번째 계명을 모방하라고 주장한다.  

모방 욕망은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명품 가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들고 있기 때문에 모방한다. 미디어는 이런 모방을 충동한다. 제국주의는 사탄의 욕망을 모방하며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를 모방한다. 모방으로 인해 욕망은 타율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체성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모방하는 순간 우리의 근대적 자율성의 한계는 알게 되겠지만 ‘믿음’은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시킨다.

 

   
 
  ▲ 병운은 희수의 차를 얻어 타고 여기저기서 돈을 꿔다가 희수에게 조금씩 갚아 나간다.  
 

영화 <멋진 하루>(이윤기 감독)는 그런 고민을 담고 있는 영화다.

과거 연인이었던 희수(전도연)와 병운(하정우)은 이제 채권자-채무자의 사이가 되었다. 일확천금이라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최적의 장소인 경마장에서 전전하던 병운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옛 여자 친구가 돈(350만원)을 갚으라고 말한다.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는 병운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돈을 갚기로 나선다. 병운은 희수의 차를 얻어 타고 여기저기서 돈을 꿔다가 희수에게 조금씩 갚아 나간다.  

돈 많은 연상의 여성 사업가에서부터 호스티스, 대학 시절 승마부 후배, 사촌, 심지어는 스키 강사로 일할 때 만난 제자, 이혼 뒤 싱글맘이 된 초등학교 동창에게까지 병운은 가릴 것 없이 손을 벌린다. 병운은 능청스럽게 말한다.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거지. 내가 있을 땐 없는 사람 돕는 거고, 내가 없을 땐 있는 사람에게 도움 받고.”

그가 할 수 있는 스포츠의 종류, 골프 승마 스키는 자본에 가장 민감한 종목들이다. 병운의 스포츠 능력은 그가 과거에 풍요한 자본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른 형태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에게 있어서 자본의 유무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병운은 독특한 존재다, 그는 돈이 벌고 싶으며 사랑도 하고 싶다. 그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욕망의 노예는 되지 않는다. 즉 '짝패'를 만들지 않고 욕망의 타율성을 극복하려고 애쓴다. 그는 돈 많은 여사님의 성적 노예가 되지 않으며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이혼한 초등학교 동창과의 '있을 법한 뻔한' 관계를 넘어선다. 관객들은 관성에 의해 초등학교 동창과 병운의 관계를 판에 박힌 대로 추정해 보지만 영화는 그 상상을 비켜 간다.

그는 경마장에서 돈을 기다리지만 돈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본 경마계에서 만년 꼴찌로 유명해진 하루우라라 같은 신파에 빠져들지도 않으며 영화 <시비스킷>(게리 로스 감독)류의 인간승리(?)를 발견하려는 욕망도 없다. 이런 류의 욕망도 ‘자기 계발’이라는 옷만 다르게 입은 것이지 욕망의 기본 틀은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병운은 경마장이라는 욕망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존재지만 '모방 욕망'으로부터는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는 욕망의 모방이 얼마나 우리 삶에 뿌리 내렸는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방을 벗어나려고 하는 병운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바닥에서라도 유능하기 위해서는 우승 가능성이 있는 말에 승부해야 하며, 젊음과 좋은 성격을 무기로 돈 많은 후원자도 만나야 한다. 그것을 못하는지 안하는지 하여튼 병운은 무능하다.

그동안 영화에서 세속의 경쟁적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캐릭터들은 많이 있었다. 홍상수나 김기덕의 영화, 장정일이나 하일지의 소설에서처럼 욕망의 문제로 고민하며 모방을 벗어나려던 외로운 지식인들은 섹스에 집착하거나 특정 부분에 편집증적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를 차처하며, 술 한잔하면 싸움을 일삼는 부적응자들도 영화에서 많이 만났다.

 

   
 
  ▲ 돈 많은 연상의 여성 사업가에서부터 호스티스, 스키 강사로 일할 때 만난 제자, 이혼 뒤 싱글맘이 된 초등학교 동창에게까지 병운은 가릴 것 없이 손을 벌린다.  
 

이들과 달리 병운은 무능할지언정 다투지 않는다. 편집증적 증세도 없다. 욕망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빠져들던 그 지점에 가는 것도 모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돈을 벌고 싶은 보편적 모방 욕망은 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막걸리 집이라는 독특한 아이템으로 모방이라는 덫을 벗어나려고 한다. 

여주인공 희수는 모방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깨진 남자 대신 1년 전 돈을 꾼 뒤 홀연히 사라진 옛 남자친구를 찾아 경마장으로 간다. 남편감은 능력이 있어야 하며 그 능력이 없으면 그 순간 남편감으로서의 지위는 상실한다. 틀에 박힌 ‘행복한 결혼’을 모방하는 그녀에게 경제적 무능력은 견딜 수 없다. 결혼 무산의 이유가 그것이다. 

지질한 젊은 여성이 되지 않기 위해 자가용도 소유하고 있다. 그녀는 그 모방의 세계를 즐긴다. 병운과 함께 만나는 병운의 여자들은 그녀에게 경쟁과 모방 대상인 짝패가 아니다. 젊은 남자에 묘한 눈빛을 보내는 돈 많은 중년 여인, 호스티스, 우연히 마주친 개념 없는 부잣집 아들 같은 인간군들은 희수에게 있어서 짝패가 아니라 찌꺼기(leftover person)이다. 그녀에게 타자는 모방이거나 무시의 대상, 또는 돈을 매개로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다. 

희수는 차에서 내릴 때마다 휴대용 네비게이션을 숨겨 두고 내리는 소심한 여자다. 영화는 희수가 네비게이션을 분실할까 두려워하는 소심함 속에 그녀의 인생의 은유를 담는다. 그녀는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어디도 갈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들키는 것은 싫다. 타자가 시키는 대로 모방하며 살아가되 누가 알아차리는 것은 싫다. 영화 하반부에 그녀는 네비게이션을 보이게 두고 내렸다가 차가 도난당한다. 비로소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주체를 회복하려 든다. 

 

   
 
  ▲ 여주인공 희수는 모방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그녀에게 타자는 모방이거나 무시의 대상, 또는 돈을 매개로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면 희수는 왜 그토록 돈을 받으려고 했을까? 채무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모욕을 당하면서도 돈에 집착한다. 여기서 돈은 재화의 교환가치라는 기본 속성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녀는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으로 옛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할 뿐이다. 돈으로 파생된 잉여 가치(사랑의 회복)를 획득하고 싶어 한다. 잉여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소한 모욕은 얻게 될 쾌락에 비하면 잠시 당하는 수치심일 뿐이다. 돈이 매개가 되어서 다시 병운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지금 그의 삶은 부잣집 아들의 치기어린 방황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한 번 쯤 더 속아보는 것도 괜찮다. 

이 마음을 모르는 병운에게 꾼 돈은 갚아야 할 돈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 돈은 빌렸기 때문에 갚아야 하는 재화이지만 다른 것을 대체하지 못한다. 돈이라는 재화는 돈으로만 교환될 수 있을 뿐이다. 소유가 바뀌는 것이지 속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병운은 돈을 갚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할지언정 돈을 떼먹는 파렴치한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과 돈은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는 것이며 그냥 그렇게 이동하는 것이다. 돈처럼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여인과 돈에 대한 욕망은 있지만 결코 매이지 않은 두 사람의 만남은 하루가 저물면서 끝나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희수는 먼발치서 병운을 바라보면서 허탈하지만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그녀에게는 멋진 하루였다.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는 병운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땅을 기어 다니는 세속의 형태로 남겨두었다. 누가 보아도 욕망은 위의 것이 아니라 아래 것이다. 그러나 원죄에 빠진 인간은 기어 다니는 욕망에 매인 자되며 그것을 모방하기까지 한다. 그것의 끝에 사망이 있어도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14-17절, 표준새번역)

욕망 앞에 선 두 사람 희수와 병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하지 않기 위해 자유를 주었는데 인간은 그 자유를 다시 경쟁에 사용한다. 희수의 욕망은 짝패와의 무한 경쟁과 찌꺼기 인간에 대한 무시라는 두 가지 죄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녀에게 타자는 더불어 살아가며 연대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하거나 무시해야 할 글자 그대로의 타자일 뿐이다. 게다가 돈은 그 죄의 매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런 그녀가 무엇이 멋진 것인지는 조금 알게 되었다. 병운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아도 그녀의 것과는 다르기에 미소라도 짓게 한다. 

그렇다면 병운은 정말 괜찮은 인간일까? 영화는 희수보다는 병운이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방을 경계하며 누구와도 짝패가 되지 않으려는 병운은 멋진 놈은 아니어도 괜찮은 놈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욕망을 스스로 이겨내려는 뻔뻔스러움(presumption)을 가진 또 다른 죄인이다. 그는 소외되었지만 소외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는 덜 모방할 뿐 여전히 욕망 가운데 있는 타율적 존재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모른다.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피곤하게 살아간다. 병운은 희수보다 괜찮은 인간이기에 역설적으로 ‘회개’의 길이 멀어진다. 희수는 다른 식으로 살아가는 병운으로부터 희미하게나마 자신을 돌아보며, 마지막 만난 ‘찌꺼기’인 싱글맘 앞에서는 그녀가 중시하던 재화의 가치도 포기한다. 하지만 괜찮은 병운은 희수와 헤어진 후 자신의 문제점을 모른 채 여전히 ‘사람 좋게’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모순이며 한계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20)

매일 매일이 멋진 하루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일까? 여전히 우리 가운데 죄와 욕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믿음’의 주체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아는 주체이다. 이 주체에게 더 이상의 모방적 욕망은 사라진다.

모방을 극복하려는 뻔뻔한 인간의 노력도 사라진다.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면서 타자를 짝패가 아닌 동반자로 여기며 살아갈 때 땅에 기어 다니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연구실천아카데미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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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ybear 2009-07-09 04:25:17
상당히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