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loser)들에게 임하는 성탄의 은혜'
'루저(loser)들에게 임하는 성탄의 은혜'
  • 김영봉
  • 승인 2009.12.23 18: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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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하필 '루저'냐고요? '루저'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부터 한국 신문에 자주 거론되는 말이 있습니다. ‘루저’(loser)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갔는데, 신문 기사에서 혹은 명사들의 칼럼에서 계속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인터넷을 뒤져 보니, 사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최근에 어느 연예 프로그램에서 12개 대학 캠퍼스의 퀸들을 초청해 놓고 결혼과 사랑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토론하게 했습니다. 거기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외모가 중요해진 오늘날에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내 키가 170센티미터이니, 남자의 키는 180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 영화 <루저>의 포스터.  
 
영어 표현에서 누구에겐가 "You are a loser"라고 말하는 것은 심한 모욕입니다. 영어의 '루저'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승부에서 '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비속어(slang)로 쓰일 때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Amisfit, esp. someone who has never or seldom been successful at a job, personal relationship, etc. "("부적응자, 특별히 직장이나 인간관계 같은 일에 있어서 전혀 혹은 거의 성공한 적이 없는 사람"). 이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을 찾는다면 ‘낙오자’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루저를 의미하는 손짓이 있습니다. 손을 똑바로 세우고 엄지와 검지를 활짝 벌리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굽히면 영어 알파벳의 L자가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 이마에 대고 조롱하는 표정을 지으면, "너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낙오자야!"라는 험한 욕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욕이라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저주에 해당합니다. (여러분 보고 이 손짓을 사용하라고 가르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 그러지 못하도록 지도하시라고 가르쳐 드리는 겁니다.)

이 프로그램이 나간 후, '루저'라는 말이 급작스럽게 유행어가 되어 버렸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책임진 방송 관계자가 징계를 당했다고 하고, 한국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심각한 반성의 글이 연일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반성을 하기는커녕 어떻게든 루저가 아니라 위너(winner)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최근에 남성들의 '키 높이 구두'가 불티나듯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루저들의 이야기

오늘,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면서 루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야기들을 보면, 그것이 다름 아닌 '루저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2장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적으면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그 시대의 절대 강자, 최고의 위너였습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살해당한 후, 그는 안토니우스(Antonius)와 권력을 향한 치열한 음모와 투쟁을 벌였는데, 결국 승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주변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제국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평가하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그의 외모는 비범했고, 맑고 빛나는 눈을 가졌다"고 합니다.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키가 작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은 키는 그를 루저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최고의 강자였고 최고의 위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우구스투스를 성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호적 조사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 그 절대 권력에 복종하여 만삭이 된 아내를 이끌고 자신이 살고 있던 나사렛을 떠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 그리고 그의 아내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요셉은 목수였는데,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수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일거리를 찾아 전전해야 했던 블루 컬러 노동자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요셉이 혼기를 놓치고 늦게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서른 살쯤 되어 활동할 당시에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기를 놓친 목수 노총각에게 시집 올만한 여자라면 그 형편이 어땠을지 추측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래 전에 나온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라는 영화에서 마리아 역을 맡았던 여배우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을 맡은 사람들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듯한, 빼어난 미모의 여배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연중에 착각합니다. '아, 예수님의 어머니는 미인이었겠구나! 저렇게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니 예수님의 어머니로 뽑혔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미인을 좋아하시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구상에 태어난 여인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소명을 받았던 그 여인 마리아는 혼기를 놓친 노총각 노동자 밖에는 다른 혼처를 찾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택한 것은 그의 가문 때문도 아니고, 그의 미모 때문도 아니며, 그의 총명함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그의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임신한 약혼녀를 두고 사람들에게 "나는 이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투석형의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눅 1:38)

냄새나고 천대받던 노동자, 목동

성탄 이야기에서 목자들도 그동안 너무 미화되어 온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푸른 목장에서 양을 안고 있는 목자 예수님의 이미지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꽤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신약성서 배경 연구에 대해 권위 있는 학자인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에 의하면, 당시의 목자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하층민에 속했습니다. 양들의 주인이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 목자를 고용하여 양들을 쳤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 비가 많지 않고 풀밭도 흔하지 않기 때문에 목자들은 늘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해야 했습니다. 낮에는 양들을 풀밭에 풀어놓고 뙤약볕 아래에서 지켜야 했고, 밤이 되면 동굴이나 우리에 양들을 몰아 놓고 불침번을 서야 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음성에 순종할 사람들을 먼저 찾으십니다. 그래서 냄새나는 노동자인 목자를 택했던 것입니다. (출처 : free bible clip art)  
 
오늘 본문 8절에 보니,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내며'라는 헬라어 단어의 시제는 그 목자들이 들에서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고충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고향과 가정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변변한 기술이 없어서 전전하던 중에 겨우 양치기의 일을 잡습니다. 낮에는 더위와 고된 노동으로 인해, 밤에는 부족한 잠과 추위에 시달리며,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 같은 삶의 환경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도 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태양 볕에 그을려 있었고, 옷차림은 계속된 유랑으로 해어져 있었으며, 손은 거친 노동으로 딱딱하게 군살이 박혀 있는데다가, 시뻘겋게 될 정도로 박박 문질러 닦아도 양의 똥오줌 냄새가 가시질 않습니다. 게다가, 그 같은 노동을 통해 얻는 수입도 변변치 않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당시에 목자들은 부정직한 사람들로 취급 받았다고 합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장기간 주인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박봉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양이나 양털, 혹은 양 우유를 주인 몰래 빼내어 팔았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목자들과는 직접 거래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열에 아홉은 훔친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선입견 때문에 목자들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성전에서조차 그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옆에 사람이 다가오면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미심쩍다 싶으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목자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목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는 오늘의 이야기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은 그날도 추위를 녹이기 위해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꾸벅 꾸벅 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순간, 꿈인지 생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혼자만 보았으면 환상이라고 하겠는데, 여러 목자들이 동시에 경험한 것이니,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별빛도 아니고 햇빛도 아닌 광채가 그들을 덮습니다. 그들은 그 희한한 광경 앞에서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죽을 것처럼 두려웠습니다. 그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10-12절)

가까이 하기 거북한 이방인 점쟁이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왜 가장 가난하고 볼품없고 사람들로부터 의심이나 받는 루저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 주셨을까요?

이것은 전략적으로 볼 때도 참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책임을 맡기려면 당시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던 사람을 택했어야 마땅합니다. 가장 명망 있는 율법학자라든가,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받던 제사장을 택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시간 안에 그 복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이 같은 선택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들이 루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음성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위너들은 베들레헴 시내에서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없었고, 그런 음성을 들었다 해도 그것에 귀를 기우리고 순종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들으시고 이렇게 질문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누가복음으로 보면 그렇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동방박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동방박사를 루저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얼른 생각하면 그럴 듯한 반론입니다. 어린이들의 동화책에 보면 동방박사를 '동방의 왕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데, 그렇게 보면 그들은 루저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동방박사들은 고귀하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그들이 드린 선물도 값비싼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동방박사들은 팔레스틴의 동쪽 지방에 살던 점성가(astrologer)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점성가'란 별을 보고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운명을 점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우주 과학자(astronomer)와는 다릅니다. 상당히 미신적인 전제에서 천체를 관찰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점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멀었고, 부유한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져 온 세 가지 선물들,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물론 귀한 것이었지만, 그 선물로 인해 그들이 부자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 동방박사들은 미신적인 전제에서 천체를 관찰하던 점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멀었고, 부유한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동방박사들도 역시 루저에 해당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빛에서 본다면, 그들은 확실히 루저에 속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유대인 즉 선민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참된 종교가 아닌, 이방 종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해도, 유대인들의 눈에 동방박사들은 루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잘 난 유대인 지혜자들을 모두 제쳐 두고 이방인 점쟁이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사실을 전하십니다.

자, 이제 좀 그림이 분명해 지셨습니까?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 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루저들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이상한 선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이 들은 천사의 음성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10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고 가는 세대의 모든 인류를 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영혼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잃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백성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누구나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음성에 순종할 사람들을 먼저 찾으십니다. 스스로 위너라고 자고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에 대고 소리쳐 들려주어도 듣지 못합니다. 듣더라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그랬고, 대제사장이 그랬으며, 헤롯왕이 그랬습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율법학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기를 놓친 노총각 요셉과 남자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던 시골 처녀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냄새나는 노동자들을 택했고, 이방의 점쟁이들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별로 바랄 것 없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루저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위너라고 생각하고 자고하는 한, 그 사람에게 복음은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이며, 들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이해한다 해도 순종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이루었다고, 얻었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그들의 구원에 걸림돌이 됩니다. 반면, 어떤 의미에서든 이 세상에서 루저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희망으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사회에서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사셨습니까? 그렇게 살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로 인해 이제는 "I am a winner"라고 자위하면서 지내십니까? 경제력에 있어서든, 신앙 경력에 있어서든, 사회적인 업적에 있어서든 혹은 사회적 명성에 있어서든, 혹은 외모에 있어서든, 이만하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계십니까? 승승장구해 온것을 자랑스럽게 느끼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며 너무도 대견스럽게 여기는 여러분의 눈에 하나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익숙해진 여러분의 귀에 복음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아의 자리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공산이 큽니다. 즐길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고개가 너무 굳어 버려서 하늘을 쳐다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어쩌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도 여러분은 외면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음성에 제대로 반응했다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권력 면에서 위너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가진 권력이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그 높은 보좌에서 내려 와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대제사장과 같이, 종교적인 면에서 위너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쌓은 신앙적인 공로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 화려한 제복을 벗어 놓고 아기 예수님이 누워계신 외양간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짐승의 똥오줌으로 질척거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율법학자와 같이, 학문적인 면에서 위너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경제적인 면에서? 혹은 신체의 아름다움 면에서? 기도하기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냄새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그리고 가까이 하기 거북한 이방인 점쟁이들과 함께,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루저인가 위너인가…

혹시, 아무리 몸부림쳐도 루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과 한계를 탓하며 패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같이 어둠 속에 자신을 파묻고 살아가는 것은 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루저라고 생각하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에게 루저라는 딱지(label)를 붙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더 큰 희망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여러분에게 붙이는 딱지에 상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압니다. 상관이 안 되지 않습니다. 출신 학교로, 경제력으로, 직업으로, 아이들의 성공 정도로, 신체 조건으로, 가정환경으로, 직장에서의 성공과 업적으로 우리에게 루저라는 딱지가 붙을 때, 그것에 상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이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주눅이 듭니다. 하지만 속지 마십시다.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붙인 딱지가 진짜 여러분의 가치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들이 하나님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여 양육해야 할 책임을 혼기를 놓친 노총각 요셉과 볼 품 없는 마리아에게 맡기셨다면, 이룬 것 별로 없고, 얻은 것 초라하여 낙심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타지를 유랑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삶을 살던 목자들, 오늘이 힘들고 내일이 불안했던 그들을 찾아가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전해 주셨다면, 고단한 이민 생활에서 하루하루가 불안한 삶을 사는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미신과 점괘에 붙들려 살던 사람들을 찾아내어 인류의 왕이 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변변히 믿는 자의 도리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늘 하나님께 송구스러워하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이사야 9:2)

여러분은 어둠 속에 계십니까? 여러분을 향해 드리운 빛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살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빛나는 생명의 빛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탄의 소식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십시다. 그 빛 안에 거하면 세상에서 나에게 붙인 온갖 불합격 딱지는 금세 변색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능력과 조건과 외모와 업적과 경제력에 상관없이 온 우주보다 비싼 값을 매겨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맞바꾼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윈너가 되는 길은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루저들을 찾아가게 하소서'

루저들에게 임하시는 성탄의 은혜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 따라 위너와 루저를 가려내고, 루저들을 외면하고 위너들과 어울리는 것은 성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성탄의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루저로 판정 받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해 주어, 하나님 안에서 그들이 결코 루저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고귀한 과제입니다.

성탄과 새 해를 맞는 이 몇 주간 동안, 여러분은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스스로 위너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줄을 대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신도 위너로 인정받기 위해 분주하다면, 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위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스스로 위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귀에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즐길 일이 너무도 많고 어울릴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방향을 돌려 루저들에게 찾아가십시다. 위너로서 루저에게 뭔가를 베풀 심정으로 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루저임을 인정하고, 루저의 심정으로 이 사회에서 루저로 판정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시면서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루저들을 한 곳에 모아 놓으셨습니다. 그곳은 루저들의 집합소답게 냄새나고 지저분한 외양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허름한 외양간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루저들이 모였던 그 외양간이 인류 역사 상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났던 곳임을 기억하십시다.

루저의 심정으로 루저를 찾아가 그 마음을 보듬을 때, 하나님은 거기서 당신의 임재를 환히 드러내십니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루저로 낙인찍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면서 심사가 뒤틀리고 성격이 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상처 받기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상처가 깊은 곳에 하나님의 임재도 강합니다. 눈물이 많은 곳에 은혜도 많습니다. 2000년 전, 이 지상에서 가장 어둡고 낮은 자리에 임하셨던 주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어두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루저들이 숨어 든 곳으로 찾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2000년 전, 목자들이 추위에 떨면서 들었던 그 천사들의 음성이 다시 들릴 것입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14절)

우리가 루저의 심정으로 이 사회의 루저들을 찾아가 함께 있어줄 때, 하나님께서는 높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의 은혜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루저들의 모임 속에 주님께서 임재 하시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루저 중에 루저의 모습으로 태어나시고, 루저 중에 루저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은혜가 이 땅의 모든 루저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의 은혜 없이는
저희는 어쩔 수 없는 루저임을 고백합니다.
그 옛날, 마리아처럼
그리고 목자들처럼
고개 숙여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저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주님의 고귀한 자녀로 회복시키소서.
그 은혜를 마음에 품고
이 땅의 루저들을 찾아가게 하소서.
주님이 그러셨듯,
낮은 곳, 어두운 곳, 더러운 곳을 찾아가
주님의 빛으로 그곳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  

* 이 글은 김영봉 목사(와싱톤한인교회)의 12월 20일 주일 설교 내용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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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뉴스앤조이 2009-12-25 04: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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