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같은 인생'
'오후 5시 같은 인생'
  • 송병주
  • 승인 2010.01.11 16: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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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오후 5시 같은 인생' (1) '절망에 목 놓아 우는 그대에게…'

어둑어둑 해질녘, 한 사내가 오후 5시에 여전히 인력시장 앞에 서 있다. 약하고 왜소한 몸에 어깨는 늘어진 땅거미처럼 축 늘어졌고, 그의 긴 그림자는 마음속 깊은 곳의 삶의 시름이 배여 있는 듯하다. 작업도구가 들었을 것 같은 작은 가방을 매고 지친 몸이지만 눈빛은 여전히 잃어버린 귀중품을 찾듯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 '절망과 갈망'이란 병립할 수 없는 단어가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시계를 보다 깊은 한숨을 내뱉은 동료가 옷을 툭툭 털며 혼잣말처럼 말한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가세나. 오후 5시면 우리 같은 인생에게 오늘은 공친 날이야." 대답을 들을 마음 없이 혼잣말처럼 뱉어놓곤 바로 자리를 떠나는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이 사내는 가방끈을 다시 붙들어 잡고는 차마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입술 끝도 적시지 못한 채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고 삼키듯 속삭인다. "아직 한 시간은 남았어. 오후 5시 같은 내 인생이지만…."

   
 
  ▲ 남들은 열심히 일을 마치고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시간에 여전히 시작조차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오후 5시 같은 인생이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절망적이지만 절망할 수 없는 사람

남들은 열심히 일을 마치고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시간에 여전히 시작조차 못한 사람들이 있다.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는데 절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희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절망해선 안 되기 때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비린내 가득한 삶의 자리를 버티고 버티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다.

희망만으로 변화될 현실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미룰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이기에 쉽게 포기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자랑할 것 하나 없이 오히려 부끄러움이 더 많은 사람들…. 그래서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절망해선 안 될 절박함"을 가진 이들이 바로 '오후 5시 같은 인생들'이다.

바로 몸에 암세포가 퍼져 뼈를 깎아내어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몸뚱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어린 아들과 딸을 살리기 위해서 항암 치료의 후유증을 마다않고 붕어빵을 굽는 병든 어미의 모습이다. 중증 뇌성마비로 40세가 넘은 딸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딸을 위해, 자신도 손마디가 모두 붓는 고통 속에서도 대소변을 다 받아내며 "나는 절대 빨리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탄식하는 80세 노모의 모습이다. 척추가 휘어가는 고통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내를 들쳐 업고 평생을 살며 늘 아내 앞에서 밝게 웃지만,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옥상에 올라 아내 몰래 목 놓아 우는 남편의 모습이다. 희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절망할 수 없기에 절망해선 안 되기에 삶의 무게를 부둥켜안고 사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오후 5시 같은 인생들이다.

아침 8시 인생들의 착각 

반면 아침 8시 인생들이 있다. 그들은 인력시장에 나오자마자 일감을 찾았다. 힘 꽤나 쓰는 것처럼 젊어 보이기도 하고 건강해 보이기도 하다. 리더십도 있어 보이고, 일의 경험도 능숙하며 터줏대감처럼 인력시장의 좋은 자리는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인력시장에 사람 쓰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른 시간부터 불려나갔다. 불려가면서 사람들을 쳐다보며 "당연하다는 듯" 우쭐해 한다.

맞다. 어쩌면 그들이 먼저 불려 나간 것에서 그들은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아침 8시 인생의 가장 큰 착각은 "주인이 불러준 은혜"보다 "자신의 능력의 결과"라고 여기는 교만함이다. 먼저 된 자, 아침 8시 인생은 주인의 은혜보다 자신의 능력과 공로에 집착한다. 주인의 은혜조차 자신의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상급론과 공로사상에 빠진 구원론의 착각이다.

품꾼은 어떤 존재인가?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인생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단순하게 일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일을 굶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나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모두 굶어야 한다는 현실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에 내 공로와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나를 불러주는 주인의 은혜이다. 아침 8시 인생은 누구인가? 주인의 은혜보다는 자신이 잘나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는 처음에는 은혜에 감격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은혜는 잊어버린 채 내가 한 수고와 노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아침 8시 인생을 누구로 생각했을까?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율법을 잘 지킴으로 큰 축복을 받고 공로를 통해 하늘 상급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마태복음 19:16을 보면, 재물이 많은 청년도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며 구원을 공로와 연관시킨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지금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며 상급에 대한 질문을 한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도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것처럼 생각하며, "구원과 영생 외에도 뭘 더 받을 것이 없는가"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오늘 날 우리는 교회에서 이 함정에 빠지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은혜보다 나의 공로가 앞서기 시작한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분노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아낸다고 화를 낸다. 한 번은 교회에서 집사님 한 분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이 교회 와서 마신 성찬식 때 마신 포도주가 몇 잔인 줄 알아? 너 세례 받은 지 2년도 안 됐지? 나는 최소한 한 말은 될 거야?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야?" 혼자 생각했다. "보혈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술을 많이 드셨구나!"

굳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을 봐도 어느 틈에 '은혜의 추억은 멀고 나의 수고의 추억은 생생한 것 아닐런지' 두려움이 앞선다. 나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모래 위에 새겨진 것 같고, 나의 공로는 가슴에 깊게 다이아몬드에 금을 박아 넣은 듯 새겨놓은 아닌지….

오후 5시 같은 인생의 자리 

나중된 자 오후 5시 인생을 살펴보자. 유대인들의 당시 노동환경은 하루 10시간 노동이었다. 그런데 오전 시간이 지나면, 오늘 하루는 공친다는 생각이 가득하게 된다. 낮 12시 정오에라도 누군가 불러주면, 반 품삯이라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시간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일꾼을 찾는 사람 주변으로 모여든다. 허리를 다쳤든, 부러진 손목에 전기 충격 오듯 아파와도 밝게 웃으며 최선을 다해 잘 할 수 있음을 보인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불려나가지만,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을 때 밀려오는 실망감은 마음을 갉아 먹는다고나 할까….

과거 인력시장에 일하러 나간 적이 있다. 점심시간이 되니 오전을 날려버린 아저씨들이 싸온 샌드위치 한 조각을 베어 먹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모든 신경세포는 샌드위치가 아니라 일꾼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주차장 입구였다. 정말 샌드위치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 옆에서 보니 대화가 아니다. "한국은 군사정권이 다 말아먹었어." 그러자 대답한다. "맞아! 정말 그 시대는 먹고 살기 좋았어. 새마을운동 좋았잖아?" 대화를 하지만 대화가 아니다. 점심을 먹지만 점심이 아니다. 뭔가를 씹고 있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집중력은 그저 주차장 입구를 향하고 있을 뿐…. 지금 이야기하는 이 사람보다 더 빨리 뛰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점심시간. 조금 가져온 샌드위치 한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 나마 없으면 빈 배를 움켜지고 마지막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그래 아직도 조금은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오후 2시 그리고 3시가 지나고 나면, 모두가 그 인력시장을 떠난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까….

하지만, 오후 5시 인생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오후 5시면 누가 생각해도 포기해야 할 상황,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이다. 모두가 떠나 버린 곳. 그런데 그 시간까지 버티고 남아 있었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 그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했을까? 그 시간까지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왜소하고 병들어보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들고 힘을 써야 하는 일에 부적격자인지 모른다. 그 시간까지 아무도 쓰지 않은 것을 보면 특별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사내….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집으로 발걸음을 돌이키지 못하게 했을까?

   
 
  ▲ 오후 5시 같은 인생을 묵상하다가 미국 대공황 시절, 짐 브래독이라는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신데렐라맨>이 생각이 났다.  
 
자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아빠!'하며 달려 나올 아이들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떡 한 조각이라도 내어놓아야 할 가장이 아니었을까? 오늘 내가 먹을 것 들고 들어가지 않으면 내일 우리 아이들이 굶어야 한다는 그 절박함이 남들 다 떠난 자리에 여전히 남아있게 한 것은 아닐까? 마태복음 20장 7절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는 그의 말속에, 자신에 대한 무능함과 현실에 대한 절망으로 인한 쓰라림과 탄식이 배여 있음을 발견한다.

오후 5시 같은 인생을 묵상하다가 미국 대공황 시절, 짐 브래독이라는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신데렐라맨>이 생각이 났다. 라이트 헤비급 권투선수 유망주였던 짐 브래독은 오른쪽 손목뼈가 골절되는 치명적인 부상으로 권투선수의 삶을 접고 부두 막노동자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대공황이 밀려오고, 얼어붙은 겨울에 불을 피울 수 없는 극도의 가난의 현실 앞에서 감기와 폐렴에 걸린 아이들을 포기해야 할 단계까지 갔다. 자식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자존심을 접고 champion's club에 가서 모자를 벗고 동전 몇 푼이라도 부탁하는 구걸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짐 브래독. 어쩌면 이것이 바로 오후 5시까지 그곳에 남은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

절대 마침표를 찍지 말라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처럼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찾고 있다. 자랑할 것 없고, 그저 부끄러움 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절박한 심정으로 버티는 사람에게도 당신의 나라는 임하신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런 분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구원을 가르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님은 통렬하게 메시지를 주셨지만, 오후 5시 인생 같은 절망의 유대 땅을 향해 예수님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시간까지 인력시장이 있는 곳이면 자기 발로 찾아오셔서, 나에게 사명을 주시고 처음 된 자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채우신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낙심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향해 마침표를 찍지 말라." 모두가 끝장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희망 이 없다고 말하며, 남아 있는 자존심조차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상황일 때, 그런 상황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지 않으셨는데 내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실패도, 그 어떤 좌절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내 육신과 영혼을 할퀴고 지나갔다 할지라도, 그래서 오후 5시 같은 인생의 자리에 서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의 나라의 일꾼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오후 5시 같은 우리 가정에 오신 예수님

청소년 시절, 사업 하시던 아버님이 리비아 수출 금지조치와 함께 하루아침에 완전히 망해버린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참 많이도 방황하셨고, 자살하려 하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필자는 Business 하시는 분들이 "참 힘듭니다"고 하면 그 심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딱지, 달동네, 좁은 골목길의 가로등, 한 지붕 4가족, 판잣집, 연탄아궁이, 다락방" 이 모든 단어는 드라마와 책에서 볼 때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렇게 낭망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살고 겪어보니 그것은 추억에 남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니라, 가슴에 흉터처럼 남는 트라우마가 되는 것을 느꼈다.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무너졌던 아버지가 마음을 잡고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 그렇고 완고하던 아버지가 그 인생 막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하셨다. 물론 여전히 가슴의 화병을 이기지 못해서 밤새도록 술을 드시고 교회 새벽기도 가서 소리 지르고 울며 기도하다가 잠들어 버리시면, 교회 목사님 연락 와서 필자가 모시러 가기도 했다. 부끄럽기도 했고, 다 토해버린 모습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었다. 몸무게 110킬로그램에 허리 48인치인 아버님. 이른 새벽 기도 이후 술에 취해 토설한 것까지 온몸에 안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갈 때면, 복잡한 골목길이 평생 벗어나지 못할 미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신용을 상실한 실패자,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빚더미 위에 앉아있던 아버지를 불러주신 이가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셨다. 현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을 바꾸어주셨다. 희망을 주셨고, 그 절망에서 가족들이 함께 찬양하게 하셨다. "초가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멋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박수치며 그 찬양 부르며 소망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조금씩 일을 얻어 가시며 어디서 돈을 좀 받으셨는지 하루는 갑자기 갈비 먹으러 가자고 온 가족을 데리고 나가셨다. 5명의 가족을 데리고 가셔서 최소한 10인분은 먹어야 할 텐데 5인분만 시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덩치를 보나, 나의 덩치를 보나 최소한 이것은 정말 사자 앞에 참새고기다.

하지만 상황을 아는지라 아무도 더 요구하지 않았다. 모처럼 만의 외식, 즐겁게 시작했다. 처음으로 가족들이 식당에서 식사기도란 걸 해보고 몇 년 만에 외식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에 보니 아버지가 갈비를 드시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좀 드시라고 했더니 뼈에 붙은 살을 발라 드시는 거였다. 원래 갈비에서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면서 고기 먹을 줄 아는 사람은 이걸 먹는다고 하시면서 겸연쩍게 웃으셨다. 왠지 마음이 아파서 저도 갈비뼈에 붙은 갈비살만 발라먹었다. "허허 우리 아들이 고기 먹을 줄 아네" 하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에 그렁그렁 하던 눈물이 생각난다.

그 외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다. 다섯 명 식구가 다 앉기도 힘든 방에 앉아서 반주도 없이 그날 찬송가 495장을 불렀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는데 그렇게 눈물 나보기는 처음이었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속에 저며 들어 왔다. 바로 필자가 처음 만난 하나님나라였다. 절망과 배신과 수치와 상처 속에 임하신 하나님나라였고,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잠언 4:23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절망과 한숨 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 와도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향해 열려있다. 내가 가서 열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지금도 우리를 불러주신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지옥을 만들고 살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집이 되고, 천국이 되길 기대해본다.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절망해선 안 되기에 버티는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소망은 있다. 아무도 찾지 않을 시간, 버티는 자신도 포기한 시간까지 우리를 당신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주인이 열어주시는 당신의 나라이다.

오후 5시 같은 인생에게 한 가지 할 일이 남았다면

오후 5시 같은 인생에게 지금도 하나님나라는 열려있다. 하나님나라는 나의 공로와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임을 지금도 예수님은 도전하고 계신다. 천국은 나의 공로로 가는 곳이 아니다. 동시에 천국은 내가 인간적으로 부족하다고 갈 수 없는 곳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다.

앞에서 말한 짐 브래독은 가정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오후 5시 같은 인생에 다시 권투선수로 재도전한다. 헤비급이라 할 수 없는 뼈가 드러나 보일 것 같은 왜소한 체구에 부러진 오른쪽 손목 부상을 안고 권투 선수로서는 할아버지라 불러도 될 나이에 다시 링 위에 섰다.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라는 독백 같은 그의 말에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품꾼의 마음이 보인다. 그런 짐 브래독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팔아가며 그의 재기를 돕는 친구가 있었다.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격려하고 돕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도움과 부두 노동자 친구들의 눈물어린 후원 속에 황혼 길에 선 노인 같은 그가 다시 링 위에 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의 재기, 그러나 그는 미국 최강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챔피언 결정전에 오른다. 이 스토리를 알기에 사람들은 짐 브래독을 <신데렐라맨>이라 불렀고, 결국 그의 가슴시린 재기는 대공황에 빠져 절망 가운데 살던 미국인들의 희망이 되었다. 결국 2명이나 링 위에서 죽게 만든 절대 강자 맥스 베어와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에서 치열한 공방을 거친 끝에 결국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온 세상을 향한 희망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오후 5시 같은 품꾼의 인생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일은 '절망'밖에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할 일이 남았다면 지금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마지막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시다.

송병주 목사 / LA 선한청지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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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지문서 2010-01-13 12:38:16
amen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