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베짱이의 아름다운 동반을 꿈꾸며
개미와 베짱이의 아름다운 동반을 꿈꾸며
  • 송병주
  • 승인 2010.02.03 18: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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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재해석(3) [개미와 베짱이]

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소위 말해 '사(士)'자 들어가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는 극복해야 할 우리의 왜곡된 사고이다. 노동이라는 단어는 소위 '노가다'라는 전문용어(?)로 자리 잡아서 저학력자들이나 무능한 사람들 혹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직업의 총칭을 표현하는 말처럼 여기고 있다. 한국에서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때, "선생님이 노가다에유?" 하고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로 질문하는 한 시장 상인의 말에서 우리가 얼마나 노동을 천시하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통념에 비춰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 대해 유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개미와 베짱이에는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훌륭한 윤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노동관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배 블록의 헤게모니 전략에 이 동화가 선택될 때 대중들을 향한 지배 블록의 효과적 사회 학습 효과를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 근본적으로 여름에 게으르고 겨울을 준비하지 않은 베짱이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나눔의 부재 역시 공범이었다면 과연 개미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출처 : wikipedia)  
 
나눔과 재활의 부재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 나눔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이 오고 베짱이가 개미집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할 때, 어떤 개미도 베짱이를 맞아주지 않는다. 차가운 한마디는 "넌 여름에 놀았잖아"였고, 철저하게 "벌어서 남 주지 않는다"는 정신이 깔려있다. 이 나눔의 부재의 결과, 베짱이는 거리에서 비참하게 굶어서 얼어서 죽는다. 근본적으로 여름에 게으르고 겨울을 준비하지 않은 베짱이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개미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베짱이의 사인은 자신의 게으름이 주범이지만, 나눔의 부재 역시 공범이었다면 과연 지나친 의도적 해석인가? 사회적 실패자에게 다시 재활의 기회가 주어지기보다는 "놈팽이는 죽어도 싸다"는 논리가 자연스러워져서는 안 된다.

노동과 문화의 대립

개미는 열심히 일했다. 이 점에 있어서 한 치의 유감도 없다. 문제는 베짱이를 바라보는 시각이며 개미와 베짱이 사이에 대립된 관계이다. 베짱이의 행위가 소위 '딴따라'로 설명되고, 개미에게 있어서 노동과 문화는 대립적 요소로 인식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베짱이 역시 개미 만큼이나 창작 활동을 하는 문화 생산자이다. 그런데 그의 행위는 전혀 '일'로 인정받지 못한다. 소위 '무위도식하는 딴따라'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개미 같은 존재에게 '문화생활은 노동 생활의 걸림돌'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죽도록 일하느라 문화를 생산하고 누리는 것은 죄악으로 인식된다. 그저 먹고 살려면 부지런히 죽어라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노동의 개념이 "생존 윤리에 기초한 노동"이다. 이런 노동을 보면 '올바르다'는 생각보다는 '처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이 윤리가 된 노동, 겨울을 나기 위한 '호구지책'으로서 존재하는 노동 속에는 삶의 가치와 즐거움은 없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목적과 자기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다."

국민 대중을 향한 효과적인 학습 효과

이런 코드의 배치 속에 지배블록의 근로 국민 대중을 향해 효과적인 학습 효과가 깔려 있다고 하면 과연 지나친 생각일까? 플라톤은 이상국가론에서 각 계급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이상사회가 만들어 진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계급구조에 기반한 통치 철학은 효과적으로 국민 대중을 통제하고 자신의 계급적 운명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노동 윤리를 생산해 왔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근로 대중들로 하여금 자기 계급과 신분에 철저하게 순응적 태도를 갖게 하는데, 개미와 베짱이는 훌륭한 도구다. 동화를 통해서 가치관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무의식의 세계에 개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시민들에게 노동 윤리가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미 같은 평민들은 철학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통치 철학 같은 '위의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땅만 쳐다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소위 '올바른' 것이라는 '윤리의식'을 심는 이 동화의 '계급주의적 학습 효과'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작가가 그런 의도로 적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동화가 광범위하게 선택되고 읽혀질 때 이것을 선택하는 지배 블록의 '사회선택설'이 살아나는 것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평민을 향한 효과적인 학습을 기대하는 사회적 선택 때문에, 개미처럼 열심히 살자는 훌륭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문화와 노동의 아름다운 동반을 꿈꾸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의도적 해석은 저자 비평이 목적이 아니다. 좋은 의도로 썼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그것이 '선택'되어질 때 발생하는 '선택에 의한 부작용'을 찾아 선택의 의도를 점검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에 개미와 베짱이는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문화와 노동의 아름다운 동반"이다. 무더운 여름에 열심히 일하던 개미들이 베짱이로 인해 휴식의 즐거움을 얻고, 베짱이는 일하는 개미들을 위해 열심히 창작의 노동을 하는 아름다운 '동반'을 생각해본다. 그래서 긴긴 겨울밤, 음유시인 베짱이의 노래와 시를 들으며 그저 먹고 자는 겨울이 아니라 문화를 향유하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의 아름다운 겨울밤을 상상하는 것이 우리 같은 평민에게 과연 사치인 것인가? 

송병주 목사 / 남가주 선한청지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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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 2010-02-08 18:30:1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