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대한 관용에서 텍스트에 대한 관용으로'
'이웃에 대한 관용에서 텍스트에 대한 관용으로'
  • 김기대
  • 승인 2010.03.16 0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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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박 사건으로 촉발된 성서 해석학 논쟁을 보며

그간 많은 논란을 불렀던 로버트 박 씨의 방북 사건에 대해서 '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의  김진호 목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김 목사는 로버트 박 사건을 통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예언자적 영성이 불러오는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송병주 목사(LA 선한청지기교회)는 김 목사의 지적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무분별한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로버트 박의 방북 사건으로 촉발된 해석학 논쟁에 대해 김기대 목사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편집자 주)

아주 오래전 일이다.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동료들과 조그만 연구소를 하나 내면서 개소식을 하는데 명색이 종교연구소인지라 개소 의례로서 고사를 지냈다. 모두들 자신의 종교에 상관없이 절을 하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짓던 실망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평소에 내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탓인지 고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자 동료들은 나의 행동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차피 신앙고백을 하는 자리가 아니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자리인데 사실 그깟 절 한 번하는 게 뭐 대단한 배교라도 되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하지 않은 이유는 기독교인으로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는 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고사는 번성을 기원하는 것인데 종교연구소를 한답시고 늘 종교의 기복화를 비판하던 이들이 전통과 관용, 또는 대화라는 이름 아래 절하려는 모순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이런 모순에 둔감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한국 문화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굿판에서도 영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같은 입으로 한국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한다. 그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이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사실 굿판보다 더하면 더했지 별 다를 것이 없는 욕망의 기독교 의례 현장과 굿판임을 천명한 무속신앙과 뭐 다른 것이 있다고 하나는 대화의 상대가 되고 하나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제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제사에 대해서 특별히 반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 진보적 목회자들이 기독교가 제사를 반대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는 이벤트를 벌인 것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제사로 인한 배타적 가족주의, 제사에서 소외되었던 신주가 없는 천민 계층, 여성의 소외, 제사 문화 아래서 배출된 수많은 열녀와 효부의 희생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없이 진보의 이름으로 제사에 관용하는 그 용기(?)가 무척 가상하다.   

물론 기독교의 배타성이 안팎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이때에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은 중요한 화두다. 다른 종교, 소수자, 전통문화에 대한 그들의 관용이 있었기에 기독교에 쏟아지는 뭇매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뭇매를 피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은 좋은 것이지만 관용을 멈출 지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접근에는 항상 관용의 편향이 보인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나 느헤미야나 에스라에 나오는 토착 문화와 히브리(또는 유대인) 사이의 폭력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사실 불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고개를 들 수가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성서는 상대방을 폭력으로 이긴 승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 승자였다고 생각(착각)하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겼던' 대상들은 힘없는 제3세계 민중이 아니라 토호들이었으며 계급적 유산자들이었다. 토호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를 서슴지 않았고, 물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건국 혁명을 성공해야 하는 히브리인들은 물질적 풍요가 혁명의 목표가 아님을 확신해야만 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차마 바치지 못했던 그 인신제사를 여전히 행하는 부족에게는 관용할 수 없었다. 결혼이 정략이 되어버린 그런 문화와도 공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계급이나 정의보다는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그것도 이겼다고 믿는 사람들의 과장된 표현)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다 보면 그로 인해 잃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물신주의에도 관용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제단 앞에 바쳐지는 수많은 '인신제의'(산재 노동자, 매매춘 종사자)에 대해서도 외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성서를 관용의 시각으로만 읽다보면 오늘 정말 싸워야 할 대상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전투력은 약화된다.

성서를 자꾸 관용의 시각으로 읽게 되는 것은 보수 기독교인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질러지는 폭력 뒤에 기독교 우파가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분노한다. 한국의 분단 현실에 대한 우파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혼돈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배후에 구약의 폭력적 세계관이 있음을 보면서 우파와 구약을 초록의 동색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여기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왜 성서를 그들의 전유물로 주는가. 누가 그들에게 성서를 폭력적으로 해석하고 오늘날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을 일으키도록 허락했는가.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기독교 좌파들이다. 성서가 폭력을 후원하고 있음을 좌파들이 확인시켜 주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용이 아니라 우파들에게 빼앗긴 성서의 해석권을 되찾아 오는 일이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성서의 폭력적 표현들에 대해서 먼저 관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보여준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결말이다. 성서에서 폭력의 과장된 표현에 분노하는 사람들이나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성서에 접근하는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건에 천착하기보다는 해석을 통해 그 숨겨진 뜻을 찾아야 한다. 그때 이방인들과 공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 우리에게 여전히 공존하지 말아야 할 자본과 권력과 탐욕이 있음을 가르친다. 구약에서 이방혼의 금지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하나님의 의지는 오히려 혈통주의라는 우상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방혼의 허용을 가르치는 텍스트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그때 비로소 이웃에 대한 관용이 시작되고 악마적인 것 앞에서 관용이 멈추는 지혜가 생기게 될 것이다.
 

   
 
  ▲ 김기대 목사.  
 
영화 <반두비>에는 우리에게 관용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반두비>를 그리워하던 여자 주인공은 그를 추억하며 카레를 손으로 집어 먹어 본다. 처음 볼 때 낯설었던 손으로 직접 음식을 먹는 그 일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은 몇 번 해보다가 포기한다.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그러나 그 낯섦이 싫음은 아니다. 그것이 모든 것에 관용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 장면을 기독교에 적용해 보자. 오늘날 진보는 무조건 손으로 밥을 끝까지 먹어주는 것이 관용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반면 보수는 나와 다른 것은 이웃이 아니라 악마라고 할 것이다. 꼭 그러한 해결방법 밖에 없을까. 싫지 않다고 해서 내가 꼭 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조르조 아감벤이 <남겨진 시간>에서 이야기했듯이 두 대립 사이에 분할된 남겨진 영역은 없을까. 영화 <반두비>의 여자 주인공은 그 남겨진 영역을 보여준다.

성서의 폭력에 대한 비판과 무조건적인 옹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텍스트를 무수히 분할하다 보면 텍스트도 받아들여지면서 여전히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그 지점이 발견될 것이다.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몫은 세상에서 이미 편을 갈라놓은 보수나 진보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고민과 분할을 통해 그 지점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분할의 작업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은 성서의 세계관에 대한 관용과 신뢰다. 싫어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숙명인 것을.

김기대 / 평화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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