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불법까지도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는 불법까지도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 정기호
  • 승인 2010.08.1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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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용어 따라잡기(5) '은혜'

은혜란 무언인가? 흔히 감동적인 설교를 들었을 때 교인들은 목사에게 "오늘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목사가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서적인 '은혜'의 뜻은 아닙니다. 국어사전에는 은혜의 뜻을 "자연이나 사람에게 베푸는 고마운 혜택"이라 하였고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웃기는 것은 은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많이 울려면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도 가능합니다.

성서적으로 은혜라 함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 중 가장 큰 은혜입니다.

구약의 은혜는 신명기 8장 11-20절의 모세의 설교에서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라. 감사하는 자에 복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의 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바울로부터 받았으나 그 지역의 유대인들은 “그게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아왔습니다.

멀리 있는 일가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속담대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바울의 가르침보다 유대인들의 유혹이 더욱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신앙에 갈등과 방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율법과 복음 (은혜) 사이에서 방황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가 유일한 희망이며 복음으로 당하는 현재적인 환란과 핍박을 달게 받음이 은혜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모세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사랑의 용서)를 주셨다" 하였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온 것이요 은혜(새 계명, 언약)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 은혜는 지식적으로 알고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에 깊이 새기며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복음서에 나오는 8복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8복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8복은 사도들에게 계명으로 주어진 것이며 우리에게는 언약으로 주신 것입니다.

좀더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이 8복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보려고 애쓴다면 그 애쓰는 모습 이 그리스도인들의 매력이요 사랑스러운 모습이 된다"(바클레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매력을 줄 수 없는 기독교란 참다운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애굽인들이 호감을 갖게 하였다”(출11:3) 하였습니다. 스가랴는 "세계 만민들 중에서 언어가 다른 열 사람이 와서 유다 사람 한 명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당신들 편에 계시다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으니,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간청할 날이 온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은혜란 내가 베푸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바 이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선물은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내가 받을 자격이 있다거나,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거나, 똑똑하다거나, 인물이 빼어나게 예쁘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길로 가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즉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배려와 관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바울이 갈리디아서를 쓸 때에는 감옥에 있었고, 복음을 전함에 있어 많은 고난이 뒤따랐으나 이 고난을 달게 받음으로 그 심령에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체험하는 것임을 그의 몸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신자들에게 어떤 복음으로 인하여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 오시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평안히 쉬고 마시고 즐기자(눅 12:19)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일들, 악한 욕망들을 다시 말하면 성욕에 미치거나,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나 다 사고 싶어하거나, 재산이나 지위를 자랑을 앞장세우거나 부추기는 분위기입니다(요1서 2:16-17).

이와 같은 일들은 영혼을 깊이 병들게 하여 신자들이 신앙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환란과 핍박이 온다면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에 대한 특권,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다”(빌 2:17)고 하였습니다.

은혜란 쉬운 표현으로 값을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낳아주시고, 키워주신(기저귀 수만 번 갈아 채워 주시고, 교육 시켜주시고,) 은혜를 값을 수 없음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까마귀 새끼는 성장하여 독립하기 전 6개월간 낳아 준 부모 까마귀 에게 먹이를 날라다 먹여주고 떠난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적인 입장에서 보면 은혜란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 심어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에 동참한 것입니다.

은혜는 육적인 은혜와 영적인 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육적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피를 흘리심으로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믿고 마음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일 때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혜는 예수의 말씀을 은혜(새언약)로 인해 하나님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임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세상 꿈을 버리니 육체가 애통하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세상 꿈을 버리고 육체가 애통하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지지 겸손해 집니다. 가진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교만해집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땅에서 죄인은 하늘에서 의인이 됩니다. 하늘에서 죄인은 땅에서 의인이 됩니다. 하늘에서 인정받으면 땅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체는 많은 불편함 따르게 됩니다.

당시에 바울은 언제 죽음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교인들도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최고의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를 기쁘게 인정하는 것을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이제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기뻐했습니다. 현대 교회 신자들은 이와 같은 '은혜'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약의 은혜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상황이 오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왔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혜를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물질이 많다거나 적다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물질이 넉넉하게 있고, 산해진미가 있음으로 인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말은 구약적인 차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달게 받게 하려함이라” (빌1:29)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질을 주시면 선한 나만을 위하여 쓰지 말고 주님을 위하여 청지기 정신으로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자들은 예수를 엉터리로 믿었기 때문에 고난이 오고 물질의 축복을 받지 못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오면 예수를 엉터리로 믿어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구약적인 차원(율법)에서는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차원(복음) 의 차원에서는 보이는 물질이나, 육체의 세계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나 물질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 형편을 가지고 그의 신앙에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이는 복음의 신앙이 아니라 율법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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