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싸움'이기보다 '사귐'이다
전도는 '싸움'이기보다 '사귐'이다
  • 박지호
  • 승인 2010.08.1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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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3)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도 방식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요약되는 한국 교회의 전도 방식은 공격적이다. 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긴 하지만 ‘전쟁’, ‘정복’, ‘싸움’, ‘확장’ 등의 용어가 주로 등장한다. 절대적 진리와 권위를 부정하는 시대에 이런 전도 방식은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비춰지기 쉽다. 

<미주뉴스앤조이>가 마련한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셋째 날, 김영봉 목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도는 ‘정복’(conquest)이나 ‘전쟁’이기보다는 ‘여행’이고, ‘사귐’”이라고 정의하며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봉 목사는 “전도 폭발 훈련 등의 대중전도 집회나 사영리 전도, 고구마 전도, 이슬비 전도 등의 전도 방식이 꽤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도 많다. 반성할 필요가 있다”며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도 방식을 풀어갔다. 

우선 김영봉 목사는 전도를 어떻게 정의할까.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고’ 내 이야기를 ‘진실하고 겸손하게 나누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재정의하도록 돕는 측면이 있다”며,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해리 리 포(Harry Lee Poe)의 <Christian Witness in a Postmodern World>를 통해 하나하나 설명해나갔다.

   
 
  ▲ 김영봉 목사는 전도를 어떻게 정의할까.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고’ 내 이야기를 ‘진실하고 겸손하게 나누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리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관계를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적인 문화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회복시켜주는 경향이 있다. 과도기적 사회(Transient society)로 인해 관계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대화를 좋아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므로 그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훈련 기관(institution)’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community of faith)’로 강조해야 한다. 과거에는 교리를 전달하고 정리하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했지만, 신앙을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소개하며, 우정을 나누는 것을 주요 전도 방법으로 여겨야 한다. 소그룹 속에서 전도를 하는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다. 브라이언 맥클라렌는 “전도는 춤과 같다”고 정의했다. 그는 “단순한 회심(conversions)이 아닌 대화(conversations)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대화를 통한 회심을 강조했다.

독선적이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려면

"Live and Let Live(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고, 모든 것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복음의 전도는 자주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시금 소수자로 혹은 약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가 가장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가 다수자요 강자가 되면 늘 부패했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이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는가” 하는 것이 기독교의 큰 고민이다. 포우는 C.S 루이스를 포스트모던 시대 전도의 모델로 들었다. 

“루이스는 열심히 노력했고 선하게 살았다. 영문학자로서 탁월성을 얻었고,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특권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바울의 원칙을 따랐다. 그는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행동을 분별하여 행했다. 그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었다.”

통합적인 경향…축소된 복음의 회복

모던 시대의 특징은 분업, 분화, 분산에 있었다. 이성과 감성의 분리, 영과 육의 분리, 정치와 신앙의 분리, 지식과 삶의 분리 등 끝없는 분열이 되풀이 된다. 반면, 포스트모던 사람들은 통합적인 경향을 추구한다. '통섭의 학문(interdisciplinary study)'이 그 예다. 모더니티가 헬레니즘적이라면, 포스트모더니티는 헤브라이즘적이다. 헬레니즘적인 틀을 벗겨내고 복음의 본질을 찾으면 포스트모던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 경향은 복음에게는 기회다. 통합적인 경향도 기독교에게 기회일 수 있다.

복음은 영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해당한다. 개인 구원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구원을 개인적, 관계적, 사회적, 전 우주적으로 이해한다. 내세에만 집중한다는 오해가 있었지만, 현세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신약성서의 특징이다. 종교적인 영역에만 관심을 가지던 복음이 모든 영역에 관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이시다. 이렇게 통전적인 복음 제시는 포스트모던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복음을 새롭게 재정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측면들이다.

   
 
  ▲ 김 목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재정의할 수 있도록 돕는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권위 거부하는 시대에 어떻게 권위를?
 
포스트모던 시대는 모든 형식의 권위에 대해 불신한다. 그로 인해 ‘냉소주의’(cynicism)가 널리 퍼져 있다. 기독교 전통, 교회, 교권, 성경, 교리 등에 대해 자동적으로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자신을 지탱시켜 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찾는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설득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교회나 교리나 목사를 소개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어야 진정한 권위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한다.

어떻게 권위를 얻을까. 먼저, 우리 스스로 진짜가 되어야 한다. 믿는 일과 사는 일에 ‘완전성’이 아니라 ‘정직성’과 ‘진실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진리를 소개하기보다는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소개한다.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애정이 느껴져야 한다. 전도가 실적이나 업적으로 변질되어버렸기 때문에 나의 아젠다가 되면 안 된다. 사랑의 궁극적인 결과로서 전도가 되어야 한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여정(journey)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이벤트 혹은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에서 여정으로 생각해야 조급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전에는 내가 결신하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 된다. 그래서 당장 건져내지 않으면 저 사람은 당장 죽는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려고 한다. 그런 강박이 책임감을 극대화하긴 하지만 신앙을 여정으로 본다면 내가 당장 그 사람을 결국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더라도 죄책감이 조급함 없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도는 하나님이 하는 것이며,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도구가 되어서 사용되는 것뿐이라는 인식도 중요하다.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축소하려 들면 안 돼

모던 시대는 이데올로기의 전쟁 시대였다. 이데올로기는 삶을 불태울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데올로기가 붕괴되고 사람들은 오직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다. 누구든지 뭔가 생명을 바치고자 하는 무언가를 원한다. 그런 것을 찾지 못하면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빠져들게 된다.

교회가 이 경향을 이용하여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조엘 오스틴이 대표적인 예다.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이 시대의 요구를 성경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야 한다.

모든 이데올로기(ideology) 혹은 주의(isms)는 복음의 정신과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진다. “진실로 따라갈 대상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찾는다.” 복음은 ‘인격체’(예수 그리스도)요 또한 ‘살아있는 거대한 실체’(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이념으로 축소할 수 없다. 어떤 명칭으로도 복음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포우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한 사람의 인생에 방향을 주고 열정을 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점에서 복음은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 강의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자신의 전도 실패담을 나눴고, 참석자들은 웃음으로 공감을 표현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아는 것’

모더니티는 이성을 중시했으나, 포스트모더니티는 경험을 중시한다. 알고 나서 경험하려기보다, 경험하여 알려고 한다. 모더니티 시대의 관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이었는데, 포스트모더니티의 관심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experiencing God)’이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이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아는 것’이므로 이것도 역시 복음 전파에 유익한 변화라 할 수 있다.
 
논리와 변증이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경험의 이야기에 더 솔깃하고,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을 원한다. 하지만 경험을 강조하다보니까 나 중심적 영성이 생긴다. CCM의 경향도 자신의 감상에 충실한 경향이 있다.

모더니티는 합리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머리와 논리가 전부였다. 합리성을 경시하는 포스트모더니티는 이야기를 중시한다. 가슴에 호소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논리적인 설득’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동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간증’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간증이 효과적인 이유는 삶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기(Unique)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든 자신에게 대한 적용점을 찾고(Identifiable),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다(Interesting). 복음이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Relevant) 동시에 공식이나 암기한 내용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공감이 강하다(Personal). 내가 아는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Authoritative).

잡탕 영성이 점점 강해지는 시대

포스트모더니티는 무시간적인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모든 가치관은 그 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복음을 전하는 데 매우 큰 장애물이다. 무시간적인 진리와 영원한 가치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편이 좋다. 그분을 만나면 진리와 가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다”라는 새로운 금언이 유행하고 있다. 영적인 것이면 무조건 좋다는 흐름이 있으며, 동시에 제도적 종교는 무조건 배척한다. 각종 이단과 사이비 종교 운동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잡탕 영성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기회이며 또한 위기다. 어떻게 영적 세계의 실상을 알게 할 것이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건강하고 바른 영성을 추구하도록 할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다. 교리 혹은 교권에 의존하지 말고, 살아있는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라.

포스트모더니즘적 전도의 샘플로 ‘복음 전도의 다섯 단계(Five Steps of Evangelism)를 들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일이 우선이다.(Building Relationship with God).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일어난다(Prayer). 내가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과 순전한 관계,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가 아닌 사귐이 필요하다. 전도자가 사람에 대해서 순수한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Building Relationships with People).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Sharing My Stories)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야기로 이끌어가야 한다(Telling His Story).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도는 ‘정복’(conquest)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시대의 버려야 할 전도적 용어들은 crusade, 영적 전쟁, ‘이 도시를 바친다’(taking this city), “잃어버린 자를 얻는다”(winning the lost) ‘전쟁’이기보다는 ‘여행’이고, ‘싸움’이기보다는 ‘사귐’이다. 시공간(Time and Space )의 중요성을 인식하자. 너무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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