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목사를 성공적인 CEO로 바꾸어 놓았는가?
왜 목사를 성공적인 CEO로 바꾸어 놓았는가?
  • 최태선
  • 승인 2010.08.16 14: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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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들, '뒤틀린 기독교'

"특별히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겠다는 기독 청년들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신다는 그들의 부모님들이다. 이들은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들이요, 수십 년을 교회 생활을 해오신 베테랑 신자들이다. 이런 분들이 "예수를 믿어도 왜 그렇게 유별나게 믿느냐", "그렇게 광신자나 이단적으로 믿지 말아라" 따위의 이야기로 예수를 따르려는 자녀들의 앞길을 막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자녀들이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원한다. 누구도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녀가 순직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그리스도인 부모들이라고 차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 많은 청년들이 부모들의 그런 불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인 소원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망설이고 주저한다. 그리고 또 그중에 대부분의 청년들은 부모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부모와 손에 손을 잡고, 아주 '평화롭게' 지옥을 향해 뻗어 있는 멸망과 사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송강호, "자녀를 멸망으로 이끄는 부모의 성품" 중에서)

글의 내용이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참으로 통렬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라면 누구라도 필자가 말하는 대로 자녀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순직하거나 신앙을 위해 순교하는 것을 권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부모가 가지는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늘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이웃을 네 자식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마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맙다는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

하지만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 기독교의 비극입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도무지 세상과 구분이 가지 않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진리에서 벗어난 뒤틀려진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어쩌면 그리도 천편일률적으로 초점을 벗어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자녀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것, 좋은 대학에 갔다는 것, 좋은 직장 얻었다는 것, 잘 생기고 훌륭한 배우자 얻었다는 것, 남편이 승진했다는 것, 병이 나았다는 것, 돈 많이 벌었다는 것, 아파트에 당첨되거나 아파트 평수를 늘려갔다는 것 등등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이 믿음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고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심었으니 그렇게 자라 그렇게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란 세상의 요구에 따라 춤추는 곳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기호에 따라 구색을 맞추고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교회는 바로 그러한 일에 성공한 교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 중에 하나인 교회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예수 성공, 불신 실패"라는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는 설교 비평가의 글을 아픈 마음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대형교회의 목사님은 지난 2월 14일 설교를 통해 "나사로를 하나님을 잘 믿으나 상 주시는 것을 모르고 평생 거지로 산 사람"이라고 폄하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도 잘 믿고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부자가 되고 그래야 참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는 내용을 다른 목사님의 글에서 읽은 적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분의 생가를 복원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목숨 걸고 나옵니다. 부모가 위급해도 이웃이 곤경에 처해도 하나님이 최우선이라며 예배에 참석합니다. 새벽기도에 열심입니다. 새벽기도로 유명한 교회 근처의 아파트 값이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열심으로 참석합니다. 그 교회 모든 교인들이 다 근처 아파트를 살 수 없어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별로 기도처소라는 곳을 세우기까지 합니다.

십일조 열심히 합니다. 남에게 진 빚 못 갚아도 십일조는 먼저 합니다. 건축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집 팔아 전세로 가고 전세에서 월세로 옮길 정도 열심히 헌금합니다. 선교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환갑잔치 안 하고 돌잔치 안하고 그 돈을 모아 헌금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교회도 세우고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도 돕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그러면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무병장수하는 것입니다. 자손들 잘 되고 잘 사는 것입니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이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신앙생활 잘 하시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이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남들처럼 반듯한 직장 갖고, 결혼해서 손주 녀석들 재롱 피우는 것 보며 살자는 데 너는 그런 애미 애비의 청도 못 들어 주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나 몇몇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 전체가 그러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의 참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가 아니라 그들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감히 되도 않은 놈이 위대한 목사님들에게 흠집을 내냐는 것이지요. 아니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나쁜 말만 골라 한다고 하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그런 분들이 발가락의 때처럼 하찮게 여기는 유대인들의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한 존경받는 선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 랍비가 어떤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증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법정에는 율법의 요구에 의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을 빌려주었고 꼭 돌려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되니 말은 하지 말고 그 한 명의 증인을 따라 그냥 법정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달라고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인 랍비를 향해 "제가 그곳에 들어가서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결국 그것은 증인이 되는 것인데 이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제자는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하여도 자기 교회 목사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며 더 크게 아멘을 외쳐대는 사람들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서까지 지탄을 받는 지도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방송국을 점령하고 폭력까지 휘두르는 어떤 교회의 교인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또한 이야기는 이보다 더욱 심각합니다.

한 어머니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포로였던 그들은 그 나라의 신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왕 앞에 불려왔습니다. 왕은 그들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 아들씩 불러 세운 후 지금이라도 신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주겠으니 절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하지 말고 죽으라는 손짓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네 아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살짜리 막내아들이 불려나왔습니다. 당황한 왕은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전을 하나 바닥에 떨어뜨릴 터이니 막내아들보고 그것을 줍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막내아들이 그것을 주우면 멀리서 보는 사람들이 절한 것으로 알 테니 자신의 체면도 살고 막내아들도 계명을 어기지 않은 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타협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왕의 마지막 제안마저 거절하고 막내아들과 어머니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목사님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예수가 없던 시절이니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실까요? 거지 나사로처럼 상주시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씀 하실까요?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목사들을 약한 자들을 돌보는 목자가 아닌 성공적인 CEO로 바꾸어 놓았는가? 왜 우리는 고난 속에서 모델이 될 수 있는 목사를 찾기보다, 인상 좋고 세련되고 카리스마적인 목사를 찾는가? 왜 우리의 교회는 기업의 경영 기법과 성취 모델을 배우려고 하는가? 왜 우리는 말씀에 순전히 귀 기울이는 대신에 비법에 의존하려고 하는가?" (마르바 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질문의 의미를 잘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답이 보일 것입니다. 그 답은 질문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약한 자들을 돌보는 목사들을 찾으십시오. 고난 속에서 모델이 되는 목사들을 찾으십시오. 커지지 않아도 감사하며 하나님나라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를 찾으십시오. 말씀에 순전히 귀를 기울이십시오.

당연하고도 간단해 보이는 이 일들이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까지 단짝이었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광신자나 이단으로 취급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많이 외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송강호님이 말하는 부모와 손에 손을 잡고, 아주 '평화롭게' 지옥을 향해 뻗어 있는 멸망과 사망의 길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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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의기도 2010-08-20 12:30:19
최근 몇 년간 계속 고민중인 문제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글을 보며 깊이 동감합니다.

"어제까지 단짝이었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광신자나 이단으로 취급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많이 외로워질 것입니다" 라는 부분이 마음에 많이 와 닿네요..

조만간 그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누지문서 2010-08-18 21:29:05
글의 전반에 걸쳐 목사님의 통찰력을 깨닫습니다.
좋은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