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대화하는 그리스도인
자연과 대화하는 그리스도인
  • 최태선
  • 승인 2010.09.0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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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들

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창을 통해 비를 맞고 있는 숲을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비가 들이쳐 창문을 활짝 열지도 못했지만 숲의 향기가 빗소리와 함께 가슴을 적셔옵니다. 참으로 호사라는 생각과 함께 온 몸에 생기가 차오르는 듯싶습니다.

집값이 모자라 산 속으로 이사 온 것이 유배가 아니라 금의환향이었던 셈입니다. 비 맞은 나무는 언제나 교만해 보일 정도로 행복해 보입니다. 녀석들의 마음이 전해져서 제 마음속의 우울함이 날아가 버립니다. 이럴 땐 한 마리 새가 되어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어집니다.

숲이 제 삶의 일부가 된 이후부터 나무는 더 이상 제게 나무가 아닙니다. 저는 이제 나무들을 녀석들이라 부릅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나이든 녀석들도 많지만 녀석들이 소리 내어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제 마음대로 녀석들을 깔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녀석들이란 제 표현에는 친구라는 의미의 제 관심과 함께 녀석들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녀석들도 아마 어느 정도는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무를 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 건 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 제 속을 슬쩍 보여주는 것이 녀석들의 태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가 쓴 나무에 관한 글을 얼마 전에 보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느껴왔던 것들과 많은 부분 일치하는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언제나 감명 깊은 설교자였다. 나는 숲 속에 있는 나무들을 존경한다. 아니,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나는 더욱 존경한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과도 같다. 허약함으로 세상을 등진 은둔자가 아니라, 위대함으로 고독해진 사람과 같다. 마치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나뭇가지는 세계를 향해 살랑거리고, 뿌리는 무한한 침묵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들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모든 힘을 발휘하여 오직 하나만을 추구한다. 그들 속에 내재한 법칙을 이룩해 가는 것, 그들 고유의 모습을 형상화 하는 것, 제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한 그루의 아름답고 강인한 나무처럼 귀감이 될 만한 것은 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 넘어져 그 상처 입은 몸을 태양에 드러내면, 우리는 이윽고 그 묘비처럼 찬연한 원반의 그루터기에서 나무의 전 생애를 읽어낼 수 있다. 나이테 속에는 모든 투쟁과 고통과 병고와 행운과 번영, 근근이 살아온 세월과 넉넉히 자라온 시절, 힘겹게 물리친 침입자들, 그리고 견디어 이겨낸 풍랑들이 쓰여 있다. 나무는 성소다.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그는 진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나무들> 중에서)

가수 홍순관의 나무에 관한 시는 조금 더 신앙적입니다.

"나무는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가만히 있음으로 그늘을 만듭니다. 뜨거운 태양을 먹고 시원한 그늘을 낳습니다. 가만히 있다는 것은 그친 것이 아닙니다. 묵묵하다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 속으로부터 끝없는 생명 춤을 추는 것입니다. 녹색의 절정이 있어도, 그 춤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에게 대답해 주는 자상함일 뿐입니다. 그런 고요한 삶이 그늘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한 낮에도, 혼자 있는 밤  중에도 나무는 철저히 세월을 삽니다. 견디는 시간이 둥근 나이를 만듭니다. 속으로 여무는 나이는 그만큼 둥글고 단단합니다. 느리게 자라는 만큼 오래 갑니다. "

떠든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떠든다고 신자가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향이 흐르고, 춤이 되고, 노래 절로 나오는 자유의 샘이어야 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늘 되어 쉬게 하는 나무가 됩니다.

정말 나무처럼 되어 나무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도 당신의 말씀을 새겨 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이름이라." (창2:19)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빚으신 후 아담에게 데려오셔 인간인 아담으로 하여금 거기에 이름을 붙이게 하셨습니다. 창조의 화룡정점과도 같은 그 일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토록 엄청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와 같은 영광을 허락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지으신 창조물들을 소중히 다루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만물이 당하는 고통에 죽기까지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산업화와 경제발전은 사람들의 끝도 없는 이기적 욕망을 줄곧 부추기면서 자연 학대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의 위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뒤로 물러나 본적이 없는 인간의 욕망은 파멸이 가까운 것을 알면서도 아니 이미 파멸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피폐하고 황폐화 되는 자연환경을 외면하고, 이미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지구촌 이웃들의 고통을 나몰라라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초목들, 터지고 갈라지는 대지, 장마와 홍수로 무너져내린 산자락들, 쓰레기 더미로 변한 골짜기들, 태풍과 폭우로 폐허가 되어버린 숲과 들판,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헤매는 야생동물들, 경쟁적인 화석연료의 남용으로 인한 기상이변과 구멍나버린 지구의 보호막 오존층, 점점 더 넓어져가는 사막과 말라가는 호수,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물, 해파리와 불가사리만 득실거리는 바다, 이 모든 것이 병들어가고 있는 생태계의 모습입니다.

병듦을 넘어 이미 생태계의 구조 자체에 이변이 일어나 각종 기형의 생물들이 태어나고 암세포처럼 생명의 자궁이요 생명의 질료 자체인 지구를 죽이고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온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만물이 병들어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이름 붙인 만물을 자기의 소유인 양, 자기 손 안에 있는 물건인양 함부로 아무렇게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협력자요 관리의 책임자이어야 할 인간이 도둑처럼 강도처럼 자연을 수탈하고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불신앙입니다.

유엔에서는 “새천년 생태 평가”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2005년에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복지를 인간 복지와 생태계 복지로 나누어 연구하면서, 우리나라의 수준을 세계 180개 나라 가운데 인간 복지는 28위, 생태계 복지는 162위로 평가하였습니다. 인간 복지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생태계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와 생태계와 관계를 맺고 사는 수준은 세계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생태계에 대해서 그만큼 무지하고(생태맹 현상) 폭력적(무분별한 개발 현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듯 오늘도 이 땅에 경제라는 이름의 괴물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자극하여 4대강 사업이라는 자연 파괴를 마치 인간과 미래를 위한 투자인양 위장한 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품위는 창조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을 통해 유지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먼 곳도 아니고 이 나라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 파괴의 참람한 고통의 현장을 그리스도인들이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일이 하나님의 창조에 협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본연의 임무임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용택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보일러 점검하고 따뜻한 방으로 바꾸는 시기였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여든이 되신 어머니가 "용택아, 보일러를 다시 때려고 불 넣어보니까 보일러에 에아가 찼는 갑다” 그러시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불을 넣어도 방이 안 따뜻해져서 수리공을 불렀답니다. 수리공이 와서 보일러를 보고는 물을 빼야 한다면서 뜨거운 물을 땅으로 흘려버리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노모가 물이 줄줄 흐르는 데로 가서 엎드린 채 뭐라뭐라 하시더라는 겁니다. 수리공이 간 다음에 “엄니, 아까 마당에서 엎드려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아이고 얘야,” 하면서 이렇게 말하시더랍니다. “땅 밑에 마당에는 땅강아지도 살고, 작은 그 물것들(미생물들)도 많이 안 사냐. 거기다가 뜨거운 물을 찌끄러 불면 눈이 멀까 봐, 눈 감아라… 눈 감아라… 그랬다.”

보이지 않는 땅속 세상까지 품어 안고 사는 어머니 마음이 우리의 마음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를 보게 하고, 우리의 사랑이 통하게 합니다. 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하고 살게 합니다. 노모의 그런 생태심(生態心)은 땅바닥에 귀를 기울여 살아 있는 것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 가는 신앙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사명과 축복을 일깨우는 초대와도 같습니다.

비 내리는 숲 속 향기가 제게 말을 걸었던 것처럼 헤르만 헤세에게 그리고 홍순관 님에게 말을 걸었던 나무들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소리 없는 말을 건넵니다.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고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처럼 땅 속 미물들에게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신앙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 대화해본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신앙의 필수이며 신앙의 본질 자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느끼게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연과 대화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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