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게 말고 복음에 헌신하세요
목사에게 말고 복음에 헌신하세요
  • 노진산
  • 승인 2010.09.3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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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산 목사의 복음 여정 ② 갈라디아서 2:15~21

갈라디아서는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 과정과 복음을 변증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고, 우리는 이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보존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싸울 대상은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에는 위험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위험한 것을 꼽으라면 저는 율법주의를 꼽겠습니다.

율법주의가 왜 가장 위험합니까? 율법주의는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했으니까 '하나님, 저를 인정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뭔가를 하면 교회라는 조직은 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복음의 제시와 용기 그리고 적용을 말합니다.

복음의 제시는 1절부터 3절까지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14년 만입니다.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교계 어른들에게 복음이 무엇이냐 물어보러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것을 전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두 명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바로 바나바와 디도입니다. 바나바는 사도 바울을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해준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네트워크가 아주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갈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도는 왜 데리고 갔을까요? 바로 복음의 능력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디도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헬라인입니다. 유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얻고 예수의 제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받지 않았습니다. 

디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면 그것은 억지입니다. 디도는 헬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었으니까, 할례를 받으라는 것도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할례의 여부로 기독교인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 할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 디도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 안에서 자유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도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가 무엇이길래 바울이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4절과 5절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종교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합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 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은혜와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도 중요하지만, 행위도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오직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직 은혜라는 얘기는 은혜 하나만 있다는 얘기입니다. 은혜에서 뭘 더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 진리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이 절대적인 진리는 부인하면서 절대적인 힘은 얻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과 진리를 얼마나 잘 믿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실 진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젊은 사람이 꽉 막혔냐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주의를 겸손하다고 생각하지만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라고 말했습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우리가 잘못 알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당돌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종교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뒤에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혹시 대상만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내가 열심히 살면 신이 내 부탁을 들어줘서 나와 내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그저 대상만 바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 생활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다른 종교인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놀랐습니다. 강남을 하루 갔는데요, 큰 절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오래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수많은 사람이 와서 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갑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는 무엇이 다를까. 여러분은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종교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똑같이 규례나 율법에 얽매여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는 그 피곤한 종교 생활을 왜 합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오신 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 노예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복음에 서 있길 원합니다. 자유함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이기심과 규례 율법에서 뛰쳐나왔을 때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오는 자유는 죄에서부터 오는 자유지, 죄로 들어가는 자유가 아닙니다.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내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꽉 조인 것에서 자유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해 왜 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를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봉사하실 때 누구를 위해 합니까. 그걸 왜 하십니까? 

복음을 적용할 때 사람에게보다는 복음에 헌신하십시오. 목사에게 헌신하지 말고 복음에 헌신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계속 얘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헌신하지 마십시오. 꼭 복음에 헌신하십시오. 의리를 복음에 지키시기 바랍니다. 

또 복음을 받으면 다른 신앙의 표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내 길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말씀과 함께 객관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만, 같은 복음에서 다른 표현과 다른 방식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형제, 자매라면 못 받아들일 것이 없습니다. 자녀들도 성격이 다르고, 여러분도 다릅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사역을 열심히 하십시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전도하는 사역을 했고, 바울은 이방인들을 전도하는 게 사역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역이 있습니다. 코가 들으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하십시오. 목사는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집전하는 게 사역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야 합니다.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고 부탁합니다. 복음은 겸손하게 우리보다 못한 분들을 섬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내가 저렇게 되지 않았으니, 있을 때 좀 도와줘야지'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받아주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만이 우리보다 못하고 가난한 분들과 겸손하게 동등하게 설 수 있도록 합니다. 

가난함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 가난입니다. 선택 사항이 없어지는 것이 가난입니다. 돈이 없는 것과 가난함은 차이가 있고 다른 것입니다. 정말 가난한 삶은 선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철이 없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게을렀으면 저렇게 살까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이었고,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죄책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절대로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주신 자유는 우리가 서로 나눠야 합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용기를 가지고,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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