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피하는 "빛의 아들들"은 어디에?
돈을 피하는 "빛의 아들들"은 어디에?
  • 최태선
  • 승인 2010.11.16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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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기독교 은행 설립 시도

"장로 대통령을 주신 하나님, 이번엔 은행도 주소서"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맘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삼성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맘몬이란 참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막강한 권세입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은밀한지 사람들이 도무지 그것의 실체를 보거나 느낄 수가 없습니다. 돈이 영적 실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알면서도 그것을 거슬러 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돼지 같은 목소리로 "믿습니까?"를 외쳐대고 거기에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쳐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타산지석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빛의 아들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빛의 아들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열심히 종교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과장되거나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방의 빛이 되라는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은 정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빛의 아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비판하기에 앞서

그들의 잘못된 점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신실한 종교인들이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지도 않고 비난부터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곳이 되었습니다. 비판을 하려면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대상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도 자신의 비판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는 물론 자신과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끼칠 영향을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경우에만 실시되어야 합니다.

비판에 있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그와 같은 과정이 없이 피상적인 결과만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비판으로 쏟아내는 것은 모두를 위해 불행한 결과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해야 하는(눅6:37)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한 번 말씀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인간이란 매사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거룩함을 체험하는 인간입니다. 그 사람은 일상의 모든 사건, 모든 시간 안에서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느끼며 거룩함의 현현을 체험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은 물론, 심지어는 파괴적인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길을 느끼고, 계절의 조화와 우주의 광대함 그리고 세상 이치의 부조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을 느낍니다. 신실한 인간들뿐 아니라 속된 사람이나 범죄자에게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체험합니다.

삶이 미치는 모든 곳 지각이 인식하는 모든 대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실재와 관련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그분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경외의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예를 들라면 저는 주저 없이 바리새인들을 들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종교적이었고 그들의 삶이 미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지고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는 열정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가치란 항상 상대적이기에 오늘날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나 일명 '선데이 크리스천'들이 주류를 이루는 현실 속에서 몇 가지 열심을 내는 일만으로도 그 사람의 믿음은 대단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믿음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과 말씀이 모든 삶을 규정하고 이끌어가는 경우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삶의 태도는 철두철미했습니다.

예배, 구제, 금식, 기도, 성경연구 그밖에 모든 신앙과 관련된 부분들을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놀랍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의 종교와 관련된 모든 삶은 철저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삶이 곧 예배이며 동시에 영성 수련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유대인들의 삶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교회력 지키기는 그들의 절기 지키기와 비교하면 참으로 허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대를 이어 이어지는 그들의 종교적인 삶은 우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든 면 모든 부분에서 그들의 삶은 철저히 종교적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신앙은 회당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상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은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며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섬기는 일에도 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들을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삶을 살펴보는 데는 너무도 많은 시간과 지면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모든 삶이 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말씀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그들의 일상의 삶은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회사가 다른 나라로부터 물건을 수입하게 되는 경우 물건을 선택하고 상대 회사와 계약을 맺는 것으로 상거래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약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면밀히 살핍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방식과는 상이합니다.

물건의 질과 경제성을 계산한 후에 그들은 계약을 하기 6개월쯤 전에 랍비를 상대 회사에 파견합니다. 그래서 랍비로 하여금 그 물품 생산의 전 과정을 빠짐없이 체크하도록 합니다. 그 과정 속에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 과정을 살핀 후에 문제가 없으면 파견되었던 랍비가 수입해도 좋다는 서류에 서명을 합니다. 그런 후에야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수입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랍비가 한 번 서명을 하면 그 서명은 하나님이 서명한 것과 똑같이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랍비들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랍비들이 철저히 율법에 따라 살고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랍비는 물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로만 말씀을 전하는 일 따위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이 특별히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그것은 이미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란다가 반드시 하늘이 보이도록 짓는 그들의 아파트(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기에 얼마나 비경제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늘이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짓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유제품과 고기를 요리하는 주방이 따로 설치되고 심지어 사용하는 그릇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 일과 같은 일들을 그저 그들의 강박관념 정도로 하찮게 여기고 간단히 넘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보아야 할 것은 경제적인 이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 하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의 사고는 경제보다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모든 세상을 움직여나가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그들의 사고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이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날 교회가 타락한 것처럼 그렇게 타락했던 것일까요? 그 대답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위 예를 통해 살펴본 것과 같은 그들의 삶의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보다 더 철저하면 철저했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이 그들 스스로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인간 중심의 신앙을 만들고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식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겉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잘못된 자신들의 신앙의 모습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되었던 이유

예수님의 지적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잘못된 이유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로 그들은 돈을 좋아하였습니다.(눅16:14)

돈이 그들의 마음을 잠식했습니다. 그것이 은밀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악한 인간의 본성이 그것을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추어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통해 울려 퍼지는 말씀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과 같아지거나 세상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희년을 선포해야 할 이스라엘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겉치레로 바뀌고 그들은 위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위선자는 하나님 나라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겉만을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이 보는 곳에서만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선행을 남에게 잘 퍼뜨릴만한 사람을 골라 행했습니다. 남이 보기를 기다려 선을 행하되 짐짓 쑥스러워 하며 그것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선행을 알림과 동시에 겸손하다는 명성까지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에 따라 상대방이 함구하는 경우 섭섭해서 어쩔 줄 모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선행이 전해지는 경우 "그 사람 참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한적한 여리고 도상의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친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그야말로 언중유골의 정확한 지적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말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눅16:15)

한 마디로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위선자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은연중에 자랑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말없는 실천이 그들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마음이 그것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토록 많은 지적을 받았던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멀어지게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은 반드시 교만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두 가지는 항상 짝을 이룹니다. 부 없는 교만도 보기 어렵고, 교만 없는 부는 더더욱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일은 안 그럴 것 같아도 반드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막상 당사자는 그 교만을 오히려 겸손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새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모두가 "빛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이라는 호칭은 스스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스스로를 높여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그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지옥행이라는 판결을 받은 것은 바로 그 교만 때문이었습니다.(마23:33)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엄청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참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길을 걷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감히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종교의 고수들이요 달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런 그들을 넘어지게 만들었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위선자로 만들고 교만에 빠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사도요,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였던 바울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박아 놓으셨습니다. 그를 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핍에도, 풍부에도 상관없이 어느 때건 만족할 수 있는 자족의 비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음처럼 내뱉은 자신의 성공비결은 약함이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타고 흐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고후12:9) 사망의 몸인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롬7:24) 

경제라는 괴물을 등에 업고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이 시대는 짙은 어둠의 시대입니다. 상대적으로 "빛의 자녀들"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참된 "빛의 자녀들"이 되기 위해 우리는 돈과 사람들의 인정을 피하고 오직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향한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돈과 사람들의 인정을 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중력을 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의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사실입니다. 종교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아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돈과 사람들의 인정을 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지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 때 우리는 기꺼이 연약한 자가 되어 힘을 추구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처럼 내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하는 자로서 하나님 나라 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시는 아버지의 방식을 아는 자들만이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빛의 자녀들"로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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