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교회 운영', 그 너머엔?
'민주적 교회 운영', 그 너머엔?
  • 최태선
  • 승인 2010.12.07 22: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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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남용이 아니라 힘 그 자체가 문제… 그럼 대안은?

서울의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진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교회의 직전 담임목사였던 원로목사와 오래도록 그 교회를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은퇴장로들이 만나 눈물을 흘립니다. 어깨를 부둥켜안고, 두 손을 맞잡고,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교인들의 시선이 싸늘합니다. '꼴값들 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들이 그렇게 일 년에 한 번 만나 우는 모습을 쳐다보며 빨리 그들이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간혹 그분들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그분들에게 다가가지는 못합니다.

그 교회는 이십여 년 동안 부목사를 하던 분이 담임목사가 된 아주 특별한 교회입니다. 사실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교단은 법으로 그것을 금지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가 되고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되었다면 담임목사였던 원로목사님과 담임목사가 된 부목사의 사이는 굉장히 좋았을 것입니다. 요즘 같이 세습이 대세인 현실에서 그 같은 일은 참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는 아주 각별한 사이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원로목사의 영향력이 남아 새 담임목사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원로목사의 집을 교회에서 떨어진 먼 곳에 마련해 주고 특별히 필요해서 교회에서 초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교회 출석을 일 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는 원로목사는 예배가 끝난 후 은퇴장로들과 악수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눈물은 늙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이 아쉬워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평생을 바친 그 교회에 와서 함께 고생하던 장로들을 만나면 오랜만의 만남이 반갑기도 하고 또 온갖 만감이 교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인들도 그분들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을 휘어잡고 있는 확고한, 진리 아닌 진리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머리가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입니다. 원로목사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담임목사가 특별히 독재를 원하는 것도 아니지만 교인들의 머릿속에서는 세상은 몰라도 교회에서만은 지도력이 일원화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가 교회를 헤게모니 싸움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처럼 원로목사와 은퇴장로들이 만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힘에 관한 교인들의 이해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잘못된 문제 인식

어느 교회를 가던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긴 목사에게 교인들은 자기 교회 목사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하며 자랑스러워합니다. 목사가 그렇게 카리스마가 있어야 교회가 부흥한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들이 교회를 사단의 회로 만들고 교인들을 참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사고로는 힘없는 조직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를 선호하고 자신도 나름대로 힘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란 반드시 희생양이라는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더 큰 힘을 가지고 더 큰 일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곧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리장성, 타지마할, 피라미드 같은 역사적 위대한 유물이 된 세계적 명소들이 그것을 말없이 증언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들이 많은 문제점들을 보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힘을 추구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건 장로건 누구건 더 많은 힘을 가질수록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들의 그러한 현상들의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은 교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임기제와 같은 전에는 없던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재신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들은 교회에서 그러한 운영 원칙이 세워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임기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분들은 예외 없이 능력이 있다고 인정을 받은 분들뿐입니다. 사실 그런 그분들은 언제 다시 교회를 시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다시 교회를 시작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자신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인정을 받고, 책도 더 잘 팔리게 됩니다. 결국 더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와 같은 방법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엉뚱한 행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민주적이라는 말은 헤게모니 싸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차선책으로서의 자구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목사, 장로들의 전횡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의 힘의 분산은 결코 하나님나라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는 힘의 분산이 아니라 힘의 역할 자체가 사라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랑이 대신 자리매김한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다수결로 정책이 결정되는 곳이 아닙니다. 다수결 또한 힘의 대결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결코 다수에 의해 밀려난 소수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힘을 기르면서 와신상담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다수에 의해 소수가 희생되어야 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추구되는 곳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

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도 힘 자체에 관해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근본적으로 힘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선악과 기사는 단지 상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서로 사랑해야 할 인간이라는 존재가 힘을 추구하는 존재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해설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로 인간의 모든 역사는 헤게모니 싸움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건, 사회건, 국가건 간에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힘이라는 양날을 가진 지배욕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아이들이 하던 '달나라, 별 나라' 놀이처럼 마주치는 모든 이들이 힘에 의해 우열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힘의 남용이 아니라 힘 그 자체입니다. 힘의 문제는 결코 힘의 분산에 의해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독재를 집단 지도 체제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민주화는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향하게 하기 때문에 얄팍한 상술처럼 참된 신앙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근본적으로 힘을 무력화시키는 곳입니다. 힘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항상 힘겨루기와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독재와 전횡을 제도적으로 막는 노력이 아니라 사랑을 강화시킴으로써 섬김과 희생이 모두의 일상이 되게 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 되기 위해 우리들의 교회는 민주화에 힘쓸 것이 아니라 이런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1. 작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너무 커졌다는 사실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가 일정 한도를 넘어가는 순간 인격적인 관계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군중 속의 숫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군중을 다스리고 군중 속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한 통치라는 비인격적인 지배 관계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하게 마련입니다. 힘을 강화하여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조작과 개인의 우상화가 진행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거기에서 큰 만족을 느끼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모두에게서 생명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커졌다는 사실에서 이미 그 교회가 힘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간교한 사단의 속임수이며 어리석은 인간의 자기합리화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신 후에 무리들이 당신에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피하셨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방식으로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섬김과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실천하고 가르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은 세상의 왕들이나 고관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힘에 의한 지배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사로부터 교회의 적절한 크기의 한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오십여 명씩 나누어 앉게 하셨습니다. 그 기사에서 숫자에 포함된 사람들은 성인 남자였으므로 우리는 오십여 가정이 적절한 인격적인 나눔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의 한계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당시는 자녀들을 많이 낳았으므로 한 가족의 평균을 열 명 정도로 본다면 최대 500명 정도가 될 것이요 오늘날 가족의 수를 4명으로 본다면 200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그 정도 수 이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힘의 사용 없이도 질서가 유지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가능할 것입니다.

2.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렵게 된 말 가운데 하나가 섬김입니다. 섬김이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 의도대로가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대로 따르면서 나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종이란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큼 섬김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후에도 주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눅17:7-10)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진정한 섬김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종이 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섬김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김이라는 말을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것을 확보한 후에 그중의 일부를 자신의 의도대로 나누어주는 것을 섬김이라고 착각합니다. 그것은 결코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힘을 강화시켜나가는 노력의 일환일 뿐입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위선이라는 인간의 교만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섬김이란 반드시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김이란 가진 것이 없어도 능력이 모자라도 행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참된 섬김을 배우고 그것을 일상화 하는 것입니다.

서로 섬기는 일이 교회에서 일상화된다면 힘을 추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놀부의 하는 일처럼 심술 맞고 무정한 우스꽝스러운 행위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놀부 같은 사람도 결국엔 섬김에 의해 녹아질 것입니다. 놀부와 같았던 자신의 행위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롬5:20) 성경의 말씀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되는 상황과 도구가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힘을 무력화한다는 헨리 나우엔의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3.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다수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지 않고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교회인 것은 그것이 성령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의사 결정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곳에서 권한 위양이라는 말이나 대의 정치와 같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실행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동안에는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실 때는 그것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려는 순종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만일 그 인도하심을 기다리지 않고 그 인도하심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을 일컬어 교회라 하고 하나님 백성이라 하여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아무리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도 한 개인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경우는 잘못되기가 쉽습니다. 거의 모든 경우 그런 경우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경우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에게 악령이 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악령의 백성일까요? 바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도 결국 자신의 지혜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수에 의해, 혹은 대표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회의 의사결정은 교회의 세속화이며 교회를 인본주의의 늪으로 깊이 빠트려 영원히 힘을 추구하는 희생의 구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교회의 의견은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를 때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누구도 희생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만일 우리의 교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작아지고, 서로 사랑하기에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고 상대방을 섬기면서, 매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순응하는 성령 공동체가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처음에 예로 들었던 원로목사의 일 같은 것은 처음부터 발생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은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힘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습니다. 힘으로 지배하려는 의도 자체가 사라졌기에 담임목사니 원로목사니 부목사니 하는 명칭 자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사도 요한이 90이 넘었어도 아무도 그에게 은퇴를 종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사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힘을 추구하지 않고 섬기는 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단 목사들뿐 아니라 교인들 모두는 동역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신 교회에서 함께 일하고 섬기는 그러면서 한 목적을 향해 함께 일하는 협력자로서의 동역자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 열심히 일하면 격려해 주고, 지치고 힘들 때는 위로가 되어주고, 위기가 닥치면 기꺼이 앞장 서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 공동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해 놓은 교회에 디모데가 가고, 디도가 가고, 베드로가 가고, 요한이 가고 아볼로가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각자가 가진 은사와 지혜에 의해 공동체가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로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운다고 말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원로 목사님이 멀리 떨어져 살면서 일 년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의 온갖 굳은 일에 앞장서고, 책임과 희생의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행해지는 그 노력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바라보며 모두가 기쁨을 느끼고, 아무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평등하고도 평화로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권고하는 대로 양 무리의 본이 되어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가르치려는 자세가 아니라 말없이 복음을 사는 것으로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아무도 지도자나 선생이 되려 하지 않는 하나님나라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또한 축복입니다. 아무도 힘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 그것은 꿈과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이 땅에서의 과제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었던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오늘 우리의 교회들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는 주님께서 원로목사와 장로들의 눈물도 씻겨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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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귀한 말씀 2010-12-14 20:09:21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국에 갈 기회가 되면 한번 꼭 뵙고 싶습니다.
최태선 목사님의 가정과 사역 속에 늘 우리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 좋은말씀 2010-12-09 07:09:57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상교회에서 가능한 일 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교회법을 들여다 보면
세상법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