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가 공명하는 그 자리까지
'은혜'와 '진리'가 공명하는 그 자리까지
  • 김영봉
  • 승인 2011.01.05 21: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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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복음 1장 14, 16-17절, 새해에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1.
새해를 맞은 우리는 "Happy New Year"라고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인사를 하자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가 됩니다. 새해를 맞아 나누는 인사는 나라마다 그 형식이 조금씩 달라도 핵심은 동일합니다. 그 사람이 새해에 좀 더 행복하게 살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인사법을 잘 보면, 그 나라의 문화가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샬롬(Shalom)'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뜻으로 풀 수 있지만, 실은 더 넓고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육신과 정신과 영혼 그리고 환경과 조건 모두가 온전한 상태를 가리켜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항상 다른 나라에 의해 생존을 위협 받으며 살았던 유대인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제가 듣고 자란 인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혹은 "밥 먹었어?"였습니다. '진지'는 식사를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제가 자란 집 가까이에 작은 할아버지께서 사셨는데, 그분은 매일 이른 아침에 큰 집인 저희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때마다 부모님과 삼촌들이 작은 할아버지께 "진지 잡쉈대유?"라고 인사하는 것을 듣고 자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딱한 인사법입니다. 이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먹어서 문제인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하긴,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나라들이 지금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은혜’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값없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신에게서 온다고 믿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운명이나 운으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어떻게 믿거나 간에, 그리스인들은 그들만의 노력으로 인생이 모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뭔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그 ‘덤’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바라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또는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은혜는 ‘받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받는 사람은 기다릴 따름입니다. 주는 대로 받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은 때로 절박해집니다. 은혜를 간절히 바라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은혜가 올 때까지 망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2.
요한복음 1장 14절, 16-17절을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14절)고 합니다. 또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17절)고 말씀합니다. 16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지 않고는 인생을 복되게 살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디선가 은혜가 떨어지기를 막연히 바라고 망연히 하늘만 쳐다보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가 있되, ‘충만히’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우리의 상상력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거대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찾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하면,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혹시, '나는 은혜 없이도 자신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거뜬히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아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진정한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을 알기에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진정한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욱 든든히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물론, 새해에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조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의 인생이 나 하기에 달렸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나보다 더 큰 것에 의해 결정될 때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결정 요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에게서 은혜를 입지 않으면 우리의 싸움은 ‘지는 싸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찾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온 우주보다 더 크신 그분 안에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은혜가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면 그 은혜 위에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변덕스럽게 은혜를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끊임없이 공급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굳게 잡고 그분 안에 둥지를 틀고 살아감으로써, 처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들은 축복의 인사, 즉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진리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철학이 다양해지고 깊어졌다 하지만, 서양의 모든 철학적 기초는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그리스인들에게 특별했습니다. 이 점에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밤을 밝혀 기도하고 묵상하며 또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진리와 지혜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유대인들을 따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은 강하고 높은데, 그것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철학파들이 나와 서로 진리를 다투었습니다. 대중들로서는 어떤 철학자, 어떤 철학파가 진리를 말하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로라는 랍비들이 서로 진리를 두고 논쟁을 했습니다만, 누가 옳은지 판가름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컨대, 바리새파는 죽은 후에 내세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사두개파는 그런 것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위 권위 있다는 랍비들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입장을 위해 싸웁니다만,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진리에 대한 주장은 도처에 있었지만, 진리다운 진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진리에 대한 촉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 촉수가 예민하고, 누구는 그 촉수가 무디어져 있을 뿐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열망은 항상 만족되지 못한 채, 진리 아닌 것들로 대리 만족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터넷을 접속하는 순간 펼쳐지는 거대한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면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하지만 그 정보(information)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정보’와 ‘진리’는 그 깊이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정보는 아주 피상적인 사실만을 전합니다. 비유하자면, 땅에 고인 물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손에 넣기는 쉬우나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주기에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반면, 진리는 아주 깊은 진실을 가리킵니다. 지하 암반수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물을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그 물은 우리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줍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우리의 시대를 가리켜 ‘참을 수 없는 피상성의 시대’(age of the unbearable superficiality)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가 충만하다는 증언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하는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바닷물처럼 가득 일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터넷에 접속되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정보의 바다가 열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속되는 순간, 퍼내고 또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지하 암반수가 터져 올라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이 진리의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공존했던 두 가지 즉 ‘은혜’와 ‘진리’는 알고 보면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본질상 상극의 성격을 가집니다. 은혜는 본질상 상대방의 자격이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 진리는 본질상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옳고 그름을 따지다보면 은혜를 베풀 수 없고, 은혜를 베풀려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누구에게는 은혜가 많고, 누구에게는 진리가 많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 이 두 가지가 서로 섞여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서로 상극처럼 보이는 은혜와 진리가 서로 섞여 조화를 이루며 바닷물처럼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최근에 저는 지난 12월 5일 세상을 떠난 리영희 교수와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와의 대담을 엮은 책 <대화>를 읽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리영희 교수는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의 젊은이들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시대의 스승’입니다. <대화>는 리영희 교수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 책을 읽다가 저는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 안에 충만했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리영희 교수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본능적인 진실 규명 정신과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때까지 파고드는 집념……이것이 나의 강점이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약점이기도 해요. 인간적인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이 없고, 치밀하게 따지기 일변도지요. 나의 인간적 품성에도 그같은 면이 약점이예요"(547-48쪽).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실 평생을 두고 독불장군으로, '외로운 늑대'처럼 소리지르는 처지였어요"(563쪽). 그는 오직 진리 추구를 위해서 일생을 불태웠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은혜의 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산 리영희 교수에게 임헌영 씨가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참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리영희 교수는 서슴없이 장일순 선생을 꼽습니다. 나이로 따지면 자신보다 한 살 반 정도 많은데, 그는 장일순 선생을 만날 때마다 그 인간의 크기에 압도당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만난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예수님의 모습에 가깝게 산 사람을 꼽으라면 장일순 선생 한 사람을 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장일순 선생을 직접 만나 본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는 그분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다행히 책을 통해 오래 전부터 그분을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젊은 시절에 정치에도 발을 담가 보았고,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중년 이후에는 원주에서 재야 운동가로 인권과 생명과 민주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며 살다가 1994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여러 종교의 경전을 두루 꿰고 있던 사상가였습니다. 

그분을 만나 사귀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인격 안에 은혜와 진리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 커다란 품으로 모든 것을 품어 안았던 분입니다. 그분의 됨됨이를 느끼게 해 주는 일화들이 적지 않은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한 번은 어느 젊은이가 찾아와 시대와 세태를 비판하는 바른 말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후에 장일순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잠시 후에 선생은 말을 잇습니다. "그 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 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좁쌀 한 알>, 116쪽)

또 한 번은 외국의 한 기자가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그 외국 기자가 깜짝 놀라 되묻습니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선생이 대답합니다.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 (157쪽)

또 한 번은, 누군가가 장일순 선생을 방문했을 때, 방바닥에 신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펼쳐진 지면에는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씨의 사진이 나와 있었습니다. 방문한 사람이 그 사진에 눈길을 주자, 장일순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이가 위험한 사람이야. 우리가 저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야 돼."(230쪽) 장일순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당시에 국민 대다수가 증오하며 외면했던 인물들을 그분은 기도로 품어 안았다고 증언합니다. 리영희 교수의 말대로, 그는 ‘애증을 초월한 인간’이었습니다.
 
5.
저는 지금 장일순 선생을 위인으로 미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 은혜와 진리가 공존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 예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밝힌 리영희 교수가 장일순 선생을 ‘가장 예수의 제자다운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된 이유는 그분 안에서 느껴지는 은혜와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져 알고 옳은 것을 위해 희생하며 일생을 산 사람이지만, 악하게 사는 사람들까지 품어 안고 기도하며 변모시키는 은혜의 힘이 장일순 선생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진리 자체이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진리가 바닷물처럼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또한 은혜도 넘쳤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았고 옳은 것을 위해 사셨지만, 그 위에 은혜를 입혔습니다. 그분 앞에 설 때, 그분 안에 충만한 진리가 나를 고발하지만, 그분 안에 있는 은혜가 나를 감싸 안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 압도당하게 됩니다. 장일순 선생을 만날 때마다 사람들이 그 인격의 크기에 압도당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인격의 크기는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진리만 충만했다면, 그분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당신의 사역을 끝냈을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진리의 기준으로 하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그분은 죄와 악으로 타락한 이 세상을 말끔히 쓸어내는 선택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 심판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분 안에 은혜만 충만했다면, 그분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값싼 복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죄와 벌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여러분을 모두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분 안에 충만했던 은혜 때문에 예수님은 한 영혼이라도 멸망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혼이 구원 받는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 안에 충만했던 진리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모른 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모든 영혼을 구원할 길은 섬기는 길, 낮아지는 길, 희생하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기에 그분 앞에 서면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분의 인격이 결국 십자가에서 결정이 된 것입니다.

어느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감옥을 드나들면서 부모의 속을 썩였습니다. 바깥에서 악행을 일삼다가 가끔씩 집에 돌아가 휴식을 하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아들을 반겨 주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태도를 ‘무식한 아버지의 맹목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며칠 쉬다가 몸이 근질거릴 때면 다시 집을 나가 범죄를 저지르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범죄의 가속 궤도를 달리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무기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느 날, 면회 온 어머니는 아들 앞에 아버지의 일기장을 꺼내 놓습니다. 아들은 그 일기를 읽으면서 비통하게 웁니다. 그동안 자신이 집에 돌아갈 때마다 무식한 아버지처럼 자신을 받아 주셨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행적을 알고 계셨습니다. 때로 자신으로 인해 경찰서를 드나들며 모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죽일 듯한 증오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아들이 돌아올 때마다 맞아 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값비싼 것이었는지, 아들은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 이후로, 아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엄청난 은혜를 깨닫는 순간,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로워지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새로워졌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값비싼 은혜를 증언합니다. 나의 모든 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나의 죄를 모른 척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똑바로 보시고, 그것을 당신의 죄로 짊어지셨습니다. 그 대가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알고 보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면, 우리는 같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의 충격이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우리 또한 그 은혜로써 남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6.
2011년도 맞으시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구체적인 소망은 각각 다르겠지만, 올 한 해는 과거와 다른 특별한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소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한 해를 맞기 위해 오늘 말씀에 비추어 세 가지를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새해에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거대한 인격의 품을 경험해 보십시다. 복음서를 읽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인격의 품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인격’(human character)이 아니라 ‘신격’(divine character)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만난 그 자리, 십자가를 더욱 자주 바라보십시다.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 보여 주신 값비싼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로 인해 충격을 받을 때까지 십자가를 묵상하십시다. 그 은혜의 충격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도록 변화시킬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인격 안에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를 소망하십시다. 무신론자인 리영희 교수가 장일순 선생을 두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예수의 제자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공존했던 은혜와 진리가 장일순 선생 안에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 안에서 조화롭게 자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 인격이 더욱 성숙하고 무르익어 예수의 제자로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애증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을 품어 안고 모든 것을 정성으로 대하는 인격적인 변화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을 새롭게 다짐하십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십자가는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거기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 길을 걷기를 기대하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순간, 십자가의 길이 열립니다. 참다운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 그 은혜를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 때, 우리 속에서 은혜와 진리는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올 한 해 동안, 이 두 가지 단어를 기억하고 사십시다. 은혜와 진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은혜와 진리가 공존하는 신앙 인격을 소망하며, 또한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힘쓰십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
저희로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님 안에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은혜가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알게 하시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가게 하소서.
저희에게도 은혜와 진리를 주소서.
주님의 제자답게 살게 하소서.
저희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그 길을 기뻐 뛰며 걷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

* 이 글은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1월 2일 설교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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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1-01-08 13:48:09
무신론자인 리영희 씨가 장일순 선생에게서 예수를 보았다?
무신론자는 예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예수는 무신론자들에게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리영희 씨가 본 것은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킨 한 시대의 위인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위인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은혜가 왜 우리에게 꼭 필요했는가를
배우는 자들입니다.
김영봉 목사님은 장일순 선생을 본받자고 하는데, 그것이 무신론자인 리영희 씨가 본 장일순의 행사를 본받자는 것이라면 김영봉 목사님은 설교를 잘 못 하신 겁니다.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가 본 어떤 위인의 삶을 본받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어야 살아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를 증거하는 자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