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쓸기'
'낙엽 쓸기'
  • 최태선
  • 승인 2011.01.13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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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요즘 저의 산행은 산행이 아니라 낙엽 쓸기입니다. 등산로 초입부터 정상까지 쌓인 낙엽을 등산 지팡이로 쓸어나가고 있습니다. 예년 같았으면 낙엽 쓸기가 완료되었거나 거의 정상 부근의 낙엽을 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처음으로 농사를 조금 지었습니다. 그래서 심은 것들을 돌보다 보니 산에 가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산 중턱에도 이르지 못한 곳을 쓸고 돌아왔습니다.

낙엽이 쌓이면 걷기가 힘이 들어집니다.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푹푹 빠지기 때문에 걷는데 많은 힘이 듭니다. 또 움푹 패인 곳의 낙엽을 잘못 밟으면 발목을 겹질리거나 넘어져 다치기가 쉽습니다.

올해는 특히 깊이 팬 곳이 많습니다. 산악자전거들 때문입니다. 산악자전거들이 지나가면 땅이 많이 팹니다. 경사가 심한 내리막에서는 브레이크를 잡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자전거가 지나가고 나면 땅이 깊이 패이게 됩니다. 어떤 곳은 거의 30센티미터 이상 패이게 됩니다.

그렇게 패이고 난 후에 비가 오면 그 깊이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곳에 낙엽이 쌓이는데 겉으로 보면 평평하지만 밟는 순간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낙엽 쓸기를 하는 이유는 낙엽을 쓸고 난 길을 걸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해지는지 모릅니다. 발에 힘이 가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습니다.

낙엽을 밟는다는 것이 때론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산행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낙엽이 매우 거추장스럽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산에 가보면 깊은 병에 걸리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산행의 이유가 기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맑은 공기를 마셔 몸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분들이나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는 더욱더 결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비경제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몇 명 다니지도 않는 등산로의 낙엽을 쓰는 그 일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할 일 없는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산행은 사람들에게 넓은 마음을 선사합니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그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특히 헉헉거리며 중간에 멈추어서며 산을 올라야 하는 창백한 표정의 등산객들을 생각하면 비생산적인 낙엽 쓸기는 결코 의미 없는 비생산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뭔가 가시적이고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일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무언가 큰일을 하고 싶은 속마음의 투사입니다. 사람이란 큰일을 하면 반드시 교만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영성은 작아지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일은 오히려 피해야 할 장애물입니다. 그리고 큰일들은 자신이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작은 일이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이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 작은 일들을 주님께 하듯 하다보면 거기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기쁨이 숨겨져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진정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낙엽을 쓸고 있을 때 사람들 소리가 나면 낙엽 쓸기를 멈추고 서있거나 그냥 산행을 하는 것처럼 산을 올라갑니다. 제가 낙엽을 쓸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낙엽 쓸기에 몰두하다 보면 사람이 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낙엽을 쓸고 있는 저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성격이 내성적인 분들이라 아무 말하지 않는 경우도 그분들의 표정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서 그분들과 제가 우리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 짧은 만남에서 모두의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지는지 모릅니다.

숲의 정화 작용에 인간의 깨끗한 마음이 더해지는 그 순간 그곳이 성소가 되어 모두의 마음에 잊고 있던 온기가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또 일단 낙엽을 쓸기 시작하면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길이 거기에 더해집니다. 제가 쓸지 않은 곳의 낙엽을 누군가 쓸어놓기도 하고 쓸어놓은 곳도 더 말끔하게 치워놓거나 더 넓게 낙엽을 치워놓은 곳을 보게 됩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곳에 더해진 수고의 손길을 바라보면 제 마음이 더 넓어지고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러면 산행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더 정겹게 보입니다. 그래서 더 살갑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저에게 조금 당황스러워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항상 사람들을 경계하는 그분들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분을 두 번 만나게 되면 대개의 경우는 그분이 먼저 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상적인 지위나 소유나 학식이나 뭐 그런 세상적인 것에 관계없이 편안하고 대등한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행은 적대감을 없애주는 영성수련의 도장입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더해지는 손길을 통해 넓어지는 등산로를 바라볼 때면 늘 하나님나라가 생각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같은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싸우는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려고 합니다. 열정은 가상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례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난 번 봉은사 사건처럼 대결의 국면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마음이 더해지고 똑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하나님나라는 마음이 합쳐지는 나라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소리 없이 선을 행하고 감추어진 그 선을 보고 감동하여 그 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소리 없이 확장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이 은밀한 방식을 너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조급하고 그만큼 힘과 경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커지려 하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안타깝지만 하나님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누군가 쓸어놓은 등산길을 보고 참여하게 된 낙엽쓸기를 통해 참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은 누군가의 그런 노력들에 의해 살만한 곳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엽이 없는 길을 걸으면서도 그것이 누군가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낙엽을 치운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또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낙엽을 쓸다가 옴닥옴닥 모여 있는 벌레들이 나와도 징그럽다는 생각보다 낙엽 밑에 겨울잠을 준비한 그 녀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자연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게 되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선교사가 되겠다든지, 목사가 되겠다든지, 자기가 하던 사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겠다든지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달라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기고 자신의 심장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화되기 전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의 왜곡된 모습에 일조하는 또 한 사람이 되고 말뿐입니다.

성인들 가운데에서도 위대한 현자로 통하는 리지외의 테레사는 당시의 엄격하고 위협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수도원의 분위기 가운데에서 스스로 일상적인 사랑이라는 작은 길을 발견하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복잡한 영성 체계를 버리고 사랑을 믿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인간의 비밀을 느끼는 심오한 직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위대한 영성가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어떤 위대한 일을 꿈꾸기 전에 우리의 일상에 사랑을 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사랑을 담아 내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 하듯 성심을 다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은 물론 자신의 주변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흐름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로렌스 수사에게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생을 평수사로 지내면서 부엌일과 구두 수선이라는 평범하다 못해 천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연습하는 동안 어느 결에 그는 어떤 신학자도 어떤 높은 교회 지도자도 도달하지 못했던 높은 경지의 영성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비천한 일에도 푸념하지 않고 주님의 일로 알고 성심껏 그 일들을 해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산행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낙엽을 쓰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운전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을 담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과 마주치는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마주치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키우고, 직장에 나가 일하고 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사랑을 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일상에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소리 없이 확장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산에 가서 낙엽 좀 쓴 걸 가지고 너무 떠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 제가 느꼈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을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기쁨과 넓어지는 마음 그리고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그 변화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들이 더 이상 위대한 일을 꿈꾸지 않고 큰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될까요?

그곳이라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이기를 힘썼다던 초대 교회 공동체가 다시 재현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제게 하나님나라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살게 하시는 주님께 오늘도 감사를 드립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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