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음반 듣기의 곤혹스러움
예배 음반 듣기의 곤혹스러움
  • 김성한
  • 승인 2011.01.19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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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하나님나라 ⑪ 상황이 실종된 예배 음반

언제부터인지 예배 음악들, 정확히 말하면 워십밴드들의 예배곡을 듣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찾아 듣는 것도 아닌데, 가끔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예배 음반을 듣는 게 편하지 않았다. 특히 각종 예배 실황을 담은 음반들은 때때로 음악을 듣고 있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주변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을 받아서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 나만의 것인지 아니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매체로서의 예배 음반

   
 
   
 
예배 시간에 부르는 곡들을 담은 예배 음반(worship album)은, 다른 음악들과는 그 목적도 쓰임새도 다르다. 예배 음반에 담기는 음악들은 단지 감상용이 아니다. 예배와 더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실제 예배 현장에서 불리는 곡들이다. 그러므로 예배 실황을 담은 음반들은 우리에게 독특한 질문들을 제공한다. 먼저 예배 실황 음반의, 매체로서의 특성을 생각해 보자. 커뮤니케이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미디어(매체)를 다음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현시 매체(presence media)란 목소리, 얼굴, 신체와 같은 것들이다. 현시 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스런’ 구어적인 언어, 표현, 제스처 등을 사용한다. 현시 매체에서는 송신자 자신이 곧 매체이기 때문에 송신자가 커뮤니케이션 현장에 있어야 한다. 송신자는 ‘여기 그리고 현재’라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하게 된다.

재현 매체(represence media)는 책, 그림, 사진, 건축물과 같이 어떠한 유형의 ‘텍스트’를 창조하기 위해 문화적이고 심미적인 관습을 사용하는 수많은 매체를 의미한다. 재현 매체는 현시 매체에 비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술 매체(mechanical media)는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이 현시/재현 매체의 전달자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미디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 세 가지 매체 중에서 재현 매체와 기술 매체인 경우가 많다.

예배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매체 중 어느 것에 주로 의존하는가? 예배 안에는 세 가지 매체가 모두 등장한다. 예배에서의 테크놀로지 사용, 설교와 설교자의 문제, 공간의 배치와 운용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배가 갖고 있는 다중 매체적 특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시도와 방법이 등장하고 예배에 적용되더라도 예배가 갖는 현시 매체로서의 고유한 특징은 사라질 수 없다. 나는 이점에 주목하고 싶다. 예배하는 이들은 더불어 함께 성삼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물며 예배한다. 거기에 이미 성삼위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예배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것, 더불어 함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함께하는 것이란 예배하는 이들을 둘러 싼 ‘상황’을 포함한다.

예배와 상황, 상황의 실종

   
 
   
 
시편 앞에 등장하는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와 같은 괄호 안의 짧은 설명들은 시편이라는 책으로 남겨진 노래들이 얼마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분노하고, 기뻐하고, 저주하고, 탄식하며 하나님을 높였는지 보여 준다.

내가 예배 실황 음반을 들으며 불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예배를 둘러싼 상황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예배에 참여한 이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교감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제한되어 있는 반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상당히 높고 깊은 수준의 관계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

그러다보니 피상적이다. 구체적인 상황을 담을 수 없는 예배가 되다 보니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매우 한정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거룩과 경건의 회복, 교회의 순결에 대한 강조, 해외 선교 동원과 같이 적당하고 무난한 의제 선정이 오늘 우리의 예배가 상황을 잃어버리고 탈역사적이며 피상적인 신앙의 사유화로 달려가는 상황과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예배 음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상적이며 개인에게 몰입된 우리의 신앙이 그런 곡을 쓰고 음반을 만든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거나 분리된 예배에서 불리는 곡들은 우리의 일상과 처한 상황을 신학화하며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보자.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에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던 주님의 메시지는 이제 “여러분을 어렵게 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십시오 …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어떤 적극적인 상황 부여와 해석과 함께 음악으로 제공된다. 회중들이 함께 예배하는 자리를 음반의 형태를 빌어 공적으로 배포하는 실황 음반에서 시의적이며 구체적인 상황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배 실황은 가장 아름답고 역동적이며 정교한 방식으로 담기지만 정작 그 예배와 예배자들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은 담길 수 없는 모순이 거기 있다면 과장된 것일까?

더불어 예배하는 이들의 실종

예배 실황을 담은 음반이 편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더불어 함께 예배하는 이들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자주 등장하는 “우리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와 같은 멘트는 예배의 현장감을 살려 준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그날 처음 만났을 사람들이 군중(mass)으로 모였다 흩어져야 하는 자리에서 서로를 축복하며 찬양하는 모습은 참 어색하다. 잘 모르던 신부 친구들과 신랑 친구들이 결혼식 마치고 한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환하게 웃으며 함께 서 있는 정도의 느낌이다. 뭐,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 함께 예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아무리 잘 만든 예배 음반이라도 내가 내 형제자매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대신할 수 없다. 믿음의 형제가 같은 잘못을 일곱 번씩 잘못해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자주 보는 사람들, 매주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 어느 훌륭한 예배 팀의 예배 음반보다도 우리 교회의 주일 예배가 더 아름답고 더 훌륭하다. 역류하는 하수도에 침수되어 버린 듯한 구질구질해 보이는 일상도, 골든벨을 울리고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이 빛나는 순간도 함께하는 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배 음반이 나를 현실에서 가상현실로 이동시켜 주는 매개여서는 곤란하다.

만들어진 실황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제작된 어느 예배 실황 음반의 제작 과정을 알고서 매우 실망했었다. 악기 연주는 (한국도 아닌) 영국의 스튜디오에서 세션 연주자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한국에서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스튜디오에서 이미 녹음한 연주 음악에 맞춰서 보컬과 회중들의 반응을 녹음한 후 인도자의 멘트를 수정하는 것과 같은 후반 작업을 거쳐서 예배 실황 음반의 느낌이 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고생 많이 하셨다. 하지만 그건 가짜(fake)다.

지난 몇 년 동안 각종 예배 팀의 정기 집회나 공연 실황을 담은 예배 음반들이 꾸준히 소개되었다. 나를 실망시켰던 가짜 예배 실황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연주와 현장감을 잘 담아낸 음반들도 만나게 된다. 십 년도 되지 않은 시간 내에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에는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 음향 엔지니어들의 탁월한 역량, 잘 훈련되고 준비된 예배 인도자들의 등장, 연주자들과 보컬들의 놀라운 내공, 적절한 수준의 인원 동원과 녹음이 가능한 공간의 사용, 그리고 음반 시장 환경의 변화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예배는 거기 투입되는 물량과 연주자들의 완성도 높은 연주와 인도자의 탁월함으로 판단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기름 부으심”이라고 표현되는 영역일 것이다. 아름다운 것, 진실한 것, 멋진 것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면 누구나 그것을 남겨 놓기를 원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 혹은 자신의 기억이 확장된 사진, 비디오, 녹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 놀랍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해서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예배에 담긴 본래의 신비를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달리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이야기와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만나는 예배 음반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공연 실황을 선호한다. 같은 곡이 스튜디오 버전과 라이브 버전이 있다면 언제나 라이브 버전에 먼저 손이 간다. U2의 공연 실황은 현기증이 난다. 연주자들과 관객들의 교감, 공연장의 환호와 에너지가 여기저기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황 음반을 선호하는 진짜 이유는 실제 그 공연에 가 보고 싶은, 거기 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직접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돈과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라디오에서 소개 되는 각종 공연 소식은 늘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아무리 실황 음반을 잘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퍼포먼스를 재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배라는 상황은 그래서 더욱 실황 음반과 잘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예배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기에 깊은 고민이 남는다. 예배 음반들이, 특히 예배 실황을 담은 음반들이 나의 예배, 우리의 예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나와 우리의 이야기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가 만나 하나의 이야기로 쓰여질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주기 바란다. 예배라는 고단하고 외로운 사역에 헌신해 온 이들도 아마 같은 생각일 것이다.

김성한 / 한국 IVF MEDIA 총무

김성한 님은 한림대학교 철학과(B.A)를 졸업하고, George Fox Evangelical Seminary (M.A.)에서 교회사, Associated Mennonite Biblical Seminary (M.A.)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 서울장신대학교 예배찬양사역대학원에서 예배와 커뮤니케이션, 예배와 선교 등을 가르치고 있다.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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