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가는 없고 테크니션만 난무하는 시대'
'영성가는 없고 테크니션만 난무하는 시대'
  • 김기대
  • 승인 2011.02.14 21:26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로 신학하기'(8) [라스트 엑소시즘] 테크놀로지가 있는 곳에 신비를

"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다.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보아라, 그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 18-20)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누가 복음 8: 28)

영성보다 테크놀로지를 따르는 현대인들

테크놀로지 시대의 영성 기독교와 과학은 불편한 동거의 관계다. 인류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점에서 둘의 목표는 같을 수 있기에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목표에 이르는 이해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실험에 그치고 만다. 과학에서는 실체적 증거가 있어야 진리로 입증된다.

이미 우리는 영화 <살인의 추억>, <조디악(zodiac)> 등에서 실체적 증거의 한계를 확인했지만 수많은 과학의 혜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 속에는 증명된 것만이 진리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 건조함을 극복하기 위해 영성을 가미한 프리초프 카프라의 신과학(new science)이 잠시 과학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과학은 결국 영성보다 테크놀로지를 택했다.

테크놀로지란 사전적 정의대로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 적합하도록 주어진 대상을 변화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기독교 모두에게 위협이 된다. 반면 기독교는 가능하면 과학의 토대가 되는 인과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순종과 축복이라는 율법서의 인과관계가 실제 삶에서 실현되지 않는 것에 회의하던 히브리인들은 욥을 만나면서 그 모든 고민을 해소해 버린다.

 

   
 
  ▲ 영화 <엑소시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마커스의 퇴마의식

영화 <라스트 엑소시즘>의 주인공 코튼 마커스 목사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영적 능력을 보이며 성장했다. 뛰어난 언변을 가진 그는 설교시간에 카드마술을 이용하는 등 교인들을 보다 재미있게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커스는 부자는 되지 못한 것 같다. 귀가 안 좋은 아들의 보청기를 바꿔주기 위해 돈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귀신을 좇아내는 퇴마의 능력이 있다. 영화는 마커스 목사의 퇴마의식을 방송사에서 취재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로 만들어졌다. 그는 취재진과 함께 넬이라는 소녀의 퇴마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루이지애나로 간다. 마귀에 걸린 딸을 치유해달라고 마커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던 아버지는 딸의 현상을 치유하는 데는 퇴마의식밖에 없다고 믿는다. 병원도 기성 교회도 믿지 않는 넬 아버지의 부탁으로 마커스 목사는 퇴마의식을 시작한다.

그런데 마커스의 퇴마의식은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는 귀신 소리를 내게 하는 도구를 숨겨 놓고, 옆에서 보는 사람이 모두 그 자리에 마귀가 나타난 것처럼 속게 만드는 장치를 이용한다. 여러 가지 조작 속에 퇴마의 분위기는 달아오른다. 결국 소녀는 치유된다.

마커스에게 있어서 마귀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단순한 몇 가지 속임수 장치로 제거될 수 있는 존재다. 아니면 심리학적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존재다. 그동안 퇴마를 위해 진지한 의식을 행하던 다른 엑소시즘 영화 속의 가톨릭 사제들과 달리 이 개신교 목사는 전혀 다른 퇴마사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 또는 영화를 본 네티즌들은 떨어진 개신교의 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사기꾼”, “속임수”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영화는 바로 이들의 어리석음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마커스에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아 고통 받는 환자를 치유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그는 현대 테크놀로지가 잊고 있는 영성까지 가미했는데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사의 취재를 허락한 것이다. 모든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방송은 이 시대에 또 다른 종교다. 마커스가 자신의 일을 속임수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속임수가 있고 거짓이 있는 미디어에 현대인은 현혹된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보면서, 영화 <아바타>를 보면서 감동을 받지 누구도 속임수라고 흥분하지 않는다. 마커스는 바로 그것을 노렸다.

퇴마라는 신비한 일을 하지만 실제로는 신비와 마귀를 인정하지 않는 이 ‘담대한’ 목사는 보기 좋게 퇴마에 성공하고 두둑이 돈을 받는다. 그리고 보청기 값을 구했다고 아이에게 전화한다. 보청기라는 테크놀로지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장치다.

목사들이 즐겨 쓰는 예화인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뒤에 많은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이야기는 의미 없다. 아이는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들어야 한다. 이 귀 나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의 기도도 아니고 의미의 부여도 아니고 오직 보청기 밖에 없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내의 수태 소식을 천사로부터 듣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사가랴는 아내 엘리사벳과 더불어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던 의인이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의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에 가브리엘 천사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사가랴가 말을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마커스 아들의 보청기는 합리적인 이야기만 들으려는 마커스를 은유한다. 이해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불편했던 사가랴는 말을 못하고 근대성의 산물인 테크놀로지 안에 머물려는 마커스의 아들은 듣지 못한다.

 

   
 
     
 

처음으로 경험한 풀 수 없는 문제에 고민하다

소녀를 치유한 뒤 시내 모텔에 투숙하고 있던 일행에게 넬이 잠옷 바람으로 찾아온다. 소녀의 발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 발작은 마커스 일행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지 못하던 넬이 모텔로 찾아왔다는 기이함과 동의어다.

근대 사회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광기로 규정하며 격리시켰다고 걱정하던 이는 미셀 푸코였다. 시골에서 기술적 목회만 익히던 마커스가 푸코를 읽기는 했을까? 여하튼 그의 눈에는 넬이 자신의 거처를 알아낸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여전히 광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마커스는 넬에게 필요한 것은 퇴마의식이 아니라 병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근대성이 병원이라는 더 큰 근대의 권력 앞에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인정한다.

푸코가 언급했듯이 18세기 이후 몸을 통제해온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서의 병원 제도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넬의 아버지는 환자를 비인격화시키고 세속화시키는 병원을 거부한다. 영화에서 병원 직원들은 마커스를 취재하는 카메라를 치워줄 것을 요구한다. 환자를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 병원은 자신들이 미디어에게 감시당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넬의 아버지가 병원을 거부하자 마커스는 넬이 다녔던 동네 교회를 찾는다. 쇠퇴를 거듭하는 전형적인 미국 교회의 모습이다. 한가해 보이는 목사와 목사의 아내일 수도 있고 비서일 수도 있는 뚱뚱한 여성, 미국 교회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이다.

동네 교회 목사는 오래 전에 넬의 가족이 교회를 떠났던 것을 안타까워했다. 기성 교회가 주는 영성에 넬 가족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커스는 자기의 이해를 넘어서는 이 사건으로 부터 속히 발을 빼고 싶은 마음에 소녀의 치유를 동네 교회 목사에게 부탁한다. 자기와 같은 세련된 목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통적인 목회 현장에 종사하던 이에게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작은 기대 때문이다. 마커스는 비로소 전통적인 교회 제도 앞에 작아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근대적 치유 방법은 병원에 굴복하고 구원을 향한 그의 세련된 목회 형태는 전형적인 동네 교회 목사에게 부탁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초라해진 자신을 돌아보던 중 우연히 들은 전화 메시지를 통해 넬의 임신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인과관계에 집착한다. 영화가 이쯤 되면 관객들은 소녀의 증상에 대해 마커스 목사와 함께 추리를 시작한다. 관객들은 외딴 농가에서 사는 기괴한 분위기의 아버지나 오빠에 의한 근친상간이 소녀의 발작 원인은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신문에서 읽은 비슷한 사건, 영화에서 본 듯한 비슷한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관객들은 모두 퇴마에 동참한다.

관객과 마커스의 추측에 어긋나지 않게 영화는 소녀와 잠시 알고 지냈던 한 소년으로 초점이 옮겨진다. 그러나 소년은 모두의 추측을 비켜간다. 소년은 소녀에 관심이 없는 동성애자이며 넬과 잠시 알고 지냈던 기간 또한 지금 임신 상태의 원인이 되기에는 오래 전 이야기다. 마커스가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처음으로 그 인생에 풀 수 없는 문제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냥 모른 척하고 동네를 떠나도 될 마커스지만 그의 탁월한 기술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시 넬의 집으로 향한다. 그는 거기서 그 동네 교회 목사가 주관하는 넬의 퇴마의식을 본다. 거기에는 장치도 없고, 속임수도 없다. 그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퇴마의식 속에서 넬은 뱃속에 있는 아발람이라는 마귀를 출산한다.

그때 숨어 보던 마커스와 방송사 직원은 발각되고 아발람을 불에 태워 없앤 퇴마의 승리자들은 비밀을 목격한 이들을 무참하게 제거하는 또 다른 마귀가 된다. 이들은 퇴마의식을 치르고도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마귀를 보여주는 <라스트 엑소시즘>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라스트) 엑소시즘이다. 기존의 엑소시즘 영화가 마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마귀를 보여준다. 마귀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인간이 마귀를 불러내는 매개다. 기존 영화에 나오는 퇴마사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부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근대의 세례를 더 많이 받은 개신교 목사가 퇴마사다. 그는 마귀를 얕잡아 보다가 당한다. 마귀는 기술에 물든 내 안에 숨어 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미 우리 모두는 마커스와 넬처럼 자신 안에 여러 형태의 마귀를 품고 살아간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악령의 지배를 받는 기존의 엑소시즘 영화의 마귀와는 달리 라스트 엑소시즘에서 마귀는 마귀 그 자체로 잉태되고 실재한다. 영적인 영역으로 이해했던 기존의 마귀가 유물론적 실체를 가진 존재로 나온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 삶 속에 여러 가지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가상의 공간까지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가?

오늘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장치를 이용하는 마커스와 같은 목회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령이 직접 임하기보다는 화려한 무대 장치로 교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적치유 같은 얄팍한 심리 기술이 구원으로 가는 넓은 길이 된다.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욕망의 마귀를 치유하기보다는 성공학 서적에서 읽은 몇 마디 이야기로 교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심어준다.

영화 초반에는 마귀가 마커스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듯이 이 세상 부귀영화와 자녀의 성공과 행복한 가정은 목사들의 손 안에 있어 보인다. 영성가는 없고 테크니션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다. 그러나 영화에서 마귀가 퇴마되지 않았듯이 가벼운 심리적 안정과 성공의 욕망 속에서 우리 안의 마귀는 더욱 교활해진다. 슬라보에 지젝이 존 밀맹크와의 대담에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마귀는 마치 제거된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적절한 해석이다.

영적 기술자가 전하는 세계는 모든 것은 인간의 능력 안에 있다고 믿는 테크놀로지의 세계관이다. 그들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보조자로 언급된다. 보조자 하나님을 잠시 제쳐둔 현대인들은 더 큰 재앙에 노출된다. 마귀에 걸린 넬은 겨우 몇 마리 가축들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죽였지만 마귀를 부정하는 현대인들은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한다. 마귀가 아니라 구제역이라는 과학적 명칭이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지만 이 이해 속에 농민들의 아픔에 대한 헤아림은 없다.

집권자들은 이 재앙을 방치한 채 강바닥을 파헤치는 마귀의 놀음을 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광신자들이 산과 강을 통째로 재배열하라고 시킨다고 표현했던 이는 토마즈 휴즈다. 그리고 이 기괴한 놀이의 관객들은 혹시 파헤쳐진 강바닥으로부터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을 기대하며 애써 현상을 외면한다.

신자유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삶의 물적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모든 불평과 불만의 마귀는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목사들도 그렇다. 헌금하면 돈을 벌고 돈을 벌면 행복하다는 이 순환은 부흥사들의 단골메뉴다. 이렇게 모든 것이 기술적으로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사이 죽음의 세력은 우리를 덮칠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광신도들이 횡행하는 대한민국

거라사 지역의 광인은 예수를 만나고 괴로워한다. 힘과 집단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그는 욕망의 사슬로부터 풀려나고 싶기도 하고 계속 유지하고 싶기도 한 갈등 속에 있다. 그래서 예수 앞에서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쇠사슬 같은 몇 가지 테크놀로지로 묶어 두나 예수는 그 내면을 끄집어 내셨다. 귀신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나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을 모두 돼지 떼에 옮겨 놓으셨다. 돼지 떼는 죽었지만 군대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자는 예수와 함께 가고 싶어 한다.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욕망의 죄를 대신 지기라도 하듯 소와 돼지들이 집단으로 살처분된다. 그런데 정작 인간은 거라사 광인처럼 괴로워하지 않는다. 차라리 욕망과 죄 때문에 괴로워하기라도 하면 치유의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동물들을 보며 여전히 다른 욕망으로 자신들을 채우고 예수를 따를 생각도 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컴퓨터, TV, 스마트폰 등을 통해 재앙의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해줬다. “테크놀로지는 타인의 고통은 경험해 보지도 않고 그 참상에 정통하게 만들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수잔 손택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기야 누가 요즘 세상에 힘든 방법으로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며 예수를 따르겠는가! 교회에서 화려하게 제공되는 여러 가지 보조 장치의 도움을 받으면 예수를 따르는 일이 쉽게 되는데 말이다. 신비가 사라진 시대는 불안하다. 모든 것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사회는 마귀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마귀가 오히려 신비를 안내하는 이 기괴한 현실 속에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hanna 2011-07-18 11:02:56
I might be betanig a dead horse, but thank you for posting this!

바두기 2011-02-19 00:55:13
100%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참 재미있게 읽었고 또 느끼는 점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그저 그런 공포영화 중 하나로 생각했는데 한번 볼 가치가 있는것 같습니다. (근데 이 글로 내용을 다 알아버렸으니...... T.T)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1-02-19 00:43:23
대단히 공감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집에서 즐기는 라 이 브 강 원 2011-02-18 21:10:48
집에서 즐기는 라 이 브 강 원 랜 드
.
주소창에 H A J A 9 9 . C O M
.
1억까지 스피드 출금 - 1:1 안전전용계좌 운영
.
5년연속 합법회사 채팅.전화상담 홈피참조
.
연예인,운동선수,정치계쪽에 종사하시는분들이 인정하는곳
.
충전시 5%로 추가충전 이벤트중!!! 무료머니로 연습.감상하시고 판단
.
스트레스 확~ 날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