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에 관한 슬픈 이야기
헌금에 관한 슬픈 이야기
  • 최태선
  • 승인 2011.02.1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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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냐 맘몬이냐

저희 교회에서는 헌금을 할 때 가급적 무기명으로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기명으로 헌금을 한 경우라도 이름을 불러가며 헌금기도를 하거나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올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헌금을 불투명하게 관리하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하고 정확하게 결산해서 모두에게 공개합니다. 헌금의 사용도 모든 교인의 동의를 원칙으로 하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공개하지 않고 재정을 담당하는 분과 목회자들의 동의를 얻어 집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과 여행 중에 헌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중 저희 교회는 가급적 무기명으로 헌금하는 것을 권장한다는 말을 듣고 그분은 펄쩍 뛰며 헌금을 무기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분이 나가는 교회는 역사가 오랜, 규모가 상당히 큰 대도시 교회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기록 될 정도로 이름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교인 한 분이 2,000만 원이라는 상당히 큰 금액을 목적 헌금으로 드렸답니다. 그런데 다음 주 주보에 그 목적 헌금란이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달의 헌금 결산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니 자신의 헌금이 누락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가지고 조사를 해보니 교인들 가운데 자신과 같은 경우가 자신 외에도 꽤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이 가지만 함부로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모두들 의아해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나씩 추적을 해보니 믿지 못할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재정을 담당하는 권사가 무명으로 드리는 헌금들을 빼돌려 담임목사에게 바치고 그 중 일부를 챙겼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나눠먹기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권사가 담임목사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헌금은 절대로 무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삼재사 강조하셨습니다.(참고로 그 목사는 정기적으로 필리핀 등으로 골프 여행을 하며 90년대 말에 20억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헌금 사용이 불투명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바른 헌금 사용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헌금과 관련된 글들이 많아졌습니다. 십일조와 일천번제에 관한 글은 너무도 흔한 소재이면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보이는 글이 되었습니다. 그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참 마음이 아픕니다. 헌금이란 자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사용에 대해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지고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그분의 공의가 시행되는 일에 사용되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면 그것은 아무런 저항 없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가장 필요가 절실한 사람에게 돌아가 공동체 가운데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는 하나님나라가 임해야 하고 그 같은 공동체의 모습이 세상을 치유하고 희망을 전해주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헌금 없는 교회 ?

그런데 일부도 아니고 너무도 많은 교회들에서 상식의 범위를 넘어 사람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들이 발생하다보니 이제는 의심이 일상화 되었고, 일일이 헌금의 사용처를 명백하게 밝혀야 하고 밝힌 사실에 대해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일반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목사를 먹사라고 부르고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명백한 위법 사실과 상식적으로 통용될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도 그것이 처리되는 방식이 또한 천편일률적입니다. 바람직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정반대의 현상이 주류를 이룹니다. 힘을 가진 목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를 위한 공헌이 지대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거나 아니면 목사에게 까불면 당장 하늘에서 불이 떨어질 것이라는 식의 저주를 하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효과적인 처방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례로 문제가 많은 한 목사의 아파트가 70평대라는 사실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성직자로서 그와 같은 호화주택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사회적 지적이었습니다.(물론 성직자라는 말에 두드러기가 나는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알지만 일단 일반적 사회적 통념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목사는 자신의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크고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데 그 정도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박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의 사고로는 목회의 성공과 사회에서의 성공이 구분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비슷한 문제로 방송의 지적을 받은 다른 목사의 경우는 그 교회 장로들이 나서서 자기 교회 목사를 흠잡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과 같다는 참람한 신성모독의 발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최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한 목사는 그것을 지적하는 기자를 향해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 당신보다 똑똑한 사람들이야"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도무지 마이동풍인 이러한 목사들의 반응에 마침내 교인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헌금에 관한 성경적 이해가 율법과 복음의 대결로 첨예하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방금 전에도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성경적 이해입니다. 개신교 교회의 주된 수입이기도 한 십일조가 도마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분위기에 밀려 십일조를 하긴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사람들이 십일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십일조가 신약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이론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이 글은 십일조에 관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헌금 없는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 교회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문제 인식

그러나 과연 헌금이 없는 교회가 되면 바른 교회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식의 사고입니다. 인간의 모든 삶에서 돈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은 없습니다. 장이 있는 곳에는 구더기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삶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돈이 있습니다. 돈 없는 인간의 삶이란 인간의 삶에서 물질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한 예수님에게 사단이 나타나 돌들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 바로 그 시험입니다. 물론 주님은 물질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먹을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돈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 돈 없는 교회를 추구하는 것은 삶이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 반대로 삶을 나누는 곳입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과 삶을 나누지 않습니다. 일정한 범위를 정해놓거나 자격을 제한하여 거기에 합당한 사람들만이 삶을 나누는 대상에 포함시킵니다. 혈연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해관계나 목적이 관련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정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정한 범주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형제요 자매가 되어 이제까지 세상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열어놓고 다른 이들과 기꺼이 삶을 나누게 됩니다. 물론 그 일이 언제나 좋고 편한 것은 아닙니다. 힘들고 불편하고 회피하고 싶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변했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의 삶의 나눔입니다. 때론 흔들리거나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에 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돈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돈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이 돈을 택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돈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완벽한 종교적인 삶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의 마음속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인류 최고의 지혜를 가진 솔로몬도 자신의 속에 그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운 어느날 그것을 흘낏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삼는 인간의 선택입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착각하기에 빚어지는 착시현상에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며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입니다. 헌금을 유용하는 교회 지도자의 마음과 헌금 없는 교회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똑같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선택한 마음이며 결국 그 마음이 일만 악의 근원이 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목사의 마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버리고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헌금 없는 교회를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교회 자체를 의미 없는 모임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과 관련된 교회의 문제 해결은 헌금의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하거나 헌금을 없애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참된 제자됨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교회의 모든 행동들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말로만 전하는 복음, 무례하기 짝이 없는 공격적인 전도, 행함이 없는 믿음, 진정한 고백 없이 주어지는 세례,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교회, 참된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무지함,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 축복의 본질인 것으로 여기는 번영신학, 종교적인 행위에 몰두하게 만드는 피상성 등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교회의 모든 문제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마음의 산물이며 그것은 동시에 돈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바른 해결

헌금 문제의 올바른 해결은 근본적인 우리의 신앙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거기에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물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달라집니다. 내게 있는 모든 물질의 소유권자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청지기 정신이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돈이 헌금이 아니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헌신의 상징으로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공의와 이웃 사랑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내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드린다는 의식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라는 인식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더 감미롭기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이나 억울하다는 생각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고 자라나 마침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태도와 마음 씀씀이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존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기에 적합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너와 나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영원을 함께 살아갈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에 참여하는 참된 성령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2-35)

오늘날 우리의 사고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모습이 참된 교회, 그리고 참된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거기서는 헌금이라는 말 자체가 사용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발적인 동의와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고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더해서 나눈다는 의미의 연보가 있을 뿐입니다.

국가에서 조세 저항을 줄이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목적 헌금들도 없고, 헌금을 하면서 자기 뜻대로 사용되기를 원하거나 이름을 밝혀 자기를 과시하고 영향력을 늘려나가려는 인간적인 욕망도 없고, 그것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확인하려는 제도나 감시 기능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라는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동하여 고취된 그들의 사랑이 내 것 네 것이 없는 원시 공산사회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복음의 복음됨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까지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던 요한 웨슬레는 자신의 말대로 지갑이 회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지갑은 가난한 사람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돈을 제외한 모든 돈이 그의 연보였습니다. 그의 수입이 점차로 늘어났지만 그의 생활비는 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는 모든 돈은 연보로 드려져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웃의 몫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위에 인용한 말씀대로 사는 성령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요 사명입니다. 중간에 잘못된 현상들을 보고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목표를 잃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헌금 없는 교회가 아니라 헌금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는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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