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쓰나미보다 우리 곁 '인간 재해'부터 인식하라
피할 수 없는 쓰나미보다 우리 곁 '인간 재해'부터 인식하라
  • 김기대
  • 승인 2011.03.15 03: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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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9) [더 로드] 먼저 좋은 사람 되어주기

재앙을 다룬 영화들 대부분이 해일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또는 우주인의 침공을 화면에 담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붓는다. 그런데 영화 <더 로드(The Road)>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색 톤이다. 이 영화에서 재앙은 흥밋거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실존 그 자체다.

우리는 일본에서 일어난 대참사를 최상의 화질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형제자매가 당한 일이 아니라 화면 저편에서 일어난 일로 간주한다. 보는 이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이 더 발전하면 사이버 상으로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처럼 인간의 아픔 자체도 사이버적이다. 아픈 마음에 진정성은 있을지언정 폐부를 찌를 정도는 아닌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사이버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스펙터클한 재앙영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비난을 피해가기라도 하듯이 <더 로드>에는 ‘영화 같은’ 장면이 없다.

   
 
  ▲ 코맥 맥카시 원작, 존 힐콧 감독의 <더 로드>.  
 
이 영화는 매우 불친절하다. 앞뒤 없이 마구 총질을 해대는 원저자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또 다른 소설을 영화화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보다도 더 불친절하다. 화면의 우중충함도 그렇고, 재앙 영화의 단골 메뉴인 휴머니즘도 없다. 가장 불친절한 것은 이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핵전쟁일 수도, 대규모 지진일수도, 전염병의 창궐일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해 주지 않는다. 이 불친절은 모든 생물이 거의 다 죽은 현실에서 원인을 분석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장치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자의 생존뿐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아버지와 아들, 그들의 이름도 우리는 모른다. 아버지는 간혹 단란했던 그들의 삶을 회상하는 꿈을 꾸다가 놀라 잠에서 깨곤 한다. 어느 날 밤 시계가 멈춰버린 새벽 1:17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그 날짜는 중요하지 않다. 모년 모월 모일에 일어났을 뿐이다. 멈춰버린 시계에서 그 일이 새벽을 기다리는 한 밤중에 일어났다는 것만을 알 수 있다.

그날 밤 이상한 느낌에 잠을 깬 남자는 창밖을 본다. 창밖 섬광으로 미루어 볼 때 뭔가 일어났다. 그 이상한 일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남자와 여자는 살아남았다. 현실이 끔찍한 여자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지만 오히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불친절한 영화에서 생략된 모든 시간들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죽거나 죽였다. 약탈과 강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자살한 아내와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

새 생명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이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여인은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하려고 한다. 남편의 설득으로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여인은 계속되는 공포를 더 견딜 수 없어 죽음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자살을 택하고 아버지와 아들만 아내의 마지막 부탁에 따라 사람이 살 것 같은 남쪽으로 향한다. 아이의 나이도 알 수 없다. 8세에서 10세사이로 추정될 뿐이다. 지구의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그날 이후로 이 두 사람은 용케도 10여년 세월을 살아남았다.

남쪽을 향하는 이들을 보면 구원의 길을 찾아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는 듯하다. 이 둘은 슈퍼마켓용 손수레에 모든 생필품을 싣고 하염없이 걷는다. 다운타운의 홈리스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친숙한 장면이다. 그런데 홈리스들의 작은 손수레에는 항상 물건이 수북이 쌓여있다. 욕망의 도시에서 거리로 쫓겨난 이들이건만 이들 역시 자신들의 손수레를 채운다. 반면 영화 속 두 사람의 손수레는 그리 가득 채워져 있지 않다.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파괴된 세상에는 채울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남쪽을 향한다. 이 과정에서 총과 트럭을 가진 폭력배들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원작에는 강도의 무리와 행군자라고 하는 ‘완장’(본래는 스카프)을 찬 훈련된 집단이 분리되어 있는 반면 영화에서 이 두 집단은 한 무리다. 공포만이 남은 시대에 여전히 폭력의 광기를 내세우는 조직의 위선을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다면 영화에서 강도와 폭력으로 자신들을 보존하려는 조직은 같은 무리다.

   
 
  ▲ <더 로드>.  
 
그래서 원작에서는 행군자들의 복장 중 하나인 마스크가 영화에서는 일부 폭력배들이 쓰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얼굴이 드러나는 미디어도 사라진 시대에 마스크를 쓴 자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 여전히 폭력 속에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서일 수도 있고, 아직도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미디어의 위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불씨를 지키며 식인을 거부하기

아버지와 아들은 가는 길 곳곳에서 식인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먹을 것이 없는 현실에서 사람은 좋은 식량이 된다. 식인을 거부하고 끝까지 인간다움을 유지하려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불씨를 잘 간직하라고 말한다. 단순히 추위를 피하는 불을 피우기 위해 불씨를 간직하라기보다는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을 먹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들에게 이야기 한다.

어느 날 운 좋게도 이들은 지하 식량창고를 발견하고 많은 식량을 비축하게 된다. 어느 집에서는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다시금 새 출발할 수 있는 정신과 물질을 비축한 뒤 떠난 길에서 어떤 노인을 만난다. 아버지는 이 노인을 외면하고 싶다. 지금 비축한 식량을 한 사람과 더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싫다. 그러나 아들은 이 할아버지를 외면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떼를 쓴다.

결국 이 노인과 두 사람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된다. 영화는 처음으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 해준다. 노인의 이름은 엘라이(Eli-나의 하나님)다. 이 노인에게도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아픔을 떠 올린다면 이 노인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겠다는 말라기 4:5을 생각하면 그는 엘리야일 수도 있다. 그는 아이를 가리켜 마지막 남은 신이라고 이야기 해준다. 신은 남아 있지만 사람은 없다는 것이 엘라이 노인의 이야기다.

아들을 지켜주는 좋은 아버지고 싶은 아버지이지만 그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재앙은 계속되고 사람의 위협은 그들을 조여 온다. 아버지는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지만 남게 되는 아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즉 선악을 가르쳐 주고 싶지만 사람을 판단하는 데 아들과 늘 생각이 부딪힌다. 아버지의 생각에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모두가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아들의 생각에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선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가르쳐주고 싶지만 아들은 이미 알고 있다. 어느 바닷가에서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고 아들은 잠시 잠이 든 사이 그들의 식량을 도둑맞는다. 식인이 난무한 세상에서 이 도둑은 아들은 죽이지 않고 물건만 훔쳐간 비교적 점잖은 도둑이다. 그러나 이 도둑을 잡은 아버지는 도둑을 용서하지 않고 그의 옷을 모두 벗긴다. 그 도둑은 곧 얼어 죽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에게 정의를 실천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 나쁜 사람이 아니다.

   
 
  ▲ <더 로드>.  
 
이 철없어 보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화를 낸다. “너는 세상에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 때 아버지는 놀라운 대답을 듣는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아이는 세상을 걱정하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준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찾는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고선 “네가 가서 그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어느 바닷가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남겨두고 마침내 숨을 거둔다. 아들은 혼자 남은 것 같은 상황에서 어디선가 좋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아들은 이들에게 묻는다. “불씨가 있나요?” “사람을 먹지 않나요?” 그런데 이 가족에게는 개까지 있다. 개가 아직 살아있음은 사람을 먹지 않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아들은 이 가족과 함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영화가 끝나면서 스태프를 소개하는 자막이 올라갈 때 그 뒤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 가족이 키우던 개일 것 같은 개 짖는 소리, 마켓에서 계란을 사야 한다는 소리 등이 불투명하게 들려온다.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계란이 있고, 장난감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 등은 행복한 세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아버지는 과연 좋은 사람이었나?

영화 속 아버지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며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애틋한 아버지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모두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정체불명의 재앙이 닥치기 전의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다른 이를 공격하지 않을 뿐 돕지 않는다. 먼저 공격하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화살로 그를 공격한 사람에게는 총으로 응징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철저하게 응징한다.

여행 중에 그들 역시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지만 자신의 행위는 살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고 다른 이가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참지 못한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이 선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악을 가르치려 든다. 그러나 아들의 생각은 다르다. 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재앙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지만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로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에는 내가 기준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좋은 사람을 찾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 만난 가족은 홀로 남겨진 아이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한 그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 사이에서 잠시 혼란에 빠진다. 당신들은 좋은 사람이냐는 당돌하면서도 어리석은 질문에 4명과 한 마리 개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아이에게 좋은 사람들이 되어 준다. 아버지의 세계관이 구약의 세계관이라면 아들은 예수의 세계관을 대변한다.

길에서 만난 엘라이 노인의 이야기처럼 이 아이는 마지막 남은 신이다. 옛 세계관이 등을 돌려 떠난들 두려운 것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모세에게도 등을 돌렸지만 그것은 외면이 아니다(출애굽기 33:23). 하나님은 묵은 가치관을 버린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나갈 새로운 세상을 꿈꾸신다.

따라옴의 은유

파괴된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언제부터 따라 왔느냐? 또는 왜 따라왔느냐고 묻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의 인사말처럼 영화는 따라옴을 강조한다. 파괴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따라옴이 싫은 세상이다. 누군가와 동행하는 것은 물론 따라 오는 것조차 싫다. 물론 그들은 잡아먹기 위해 추격해 오던 강도들의 공포가 기억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살아남아야만 하는 전쟁 같은 현실에서 누군가가 따라온다는 것은 나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공멸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추격자와 달리 함께 가자고 따라 오는 자를 구별하는 지혜를 갖지 못하는 한 세상의 비극은 극복되지 않는다. 따라 오는 사람은 내가 어떤 방법으로든 점유한 것을 빼앗는 사람으로 보인다. 영화 속 아버지는 여행을 하는 것은 자기들이건만 어떤 집에 있던 사람을 죽이고서는 슬피 우는 죽은 자의 아내에게 언제부터 따라 다녔냐고 묻는다. 따라옴이 병적으로 싫어질 때 걷는 자가 멈춘 자에게 왜 따라오느냐고 묻는다.

최근 한국에서 복지 논쟁이 뜨겁다. 가진 자들은 한국처럼 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시혜적 복지의 가치관이다. 감히 따라가지 못해 멈추어 선 이들에게 왜 따라오느냐고 질책한다. 따라오지 않겠다고 약속만 하면 먹을 것은 던져줄 수 있다며 자신들의 선행을 내세운다. 저 뒤쳐져 있는 아이들과 앞서 있는 내 아이가 함께 공짜밥(무상급식)을 먹을 수 없다. 그들이 뒤쳐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라오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공짜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진 자들의 논리다.

그러나 아버지의 세상이 끝나고 시작된 아들의 세상에서는 따라옴이 도와줌이다. 바닷가에서 만난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을 돕기 위해 따라 왔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죽은 상황에서 아들은 이 따라온 가족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시작한다. 따라오는 사람은 나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의 작은 베풂에 대상이 되는 사람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자들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마태 25:40)은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윤리적 선포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구원이 온다는 구원의 선포다.

자연 재해보다 더 무서운 것

일본에서 일어난 엄청난 재앙 앞에서 우리는 간접적 두려움만을 느낀다. 잠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만 그것의 효력은 길지 않다. 일본의 방재 시스템과 침착한 민족성에 놀라면서 그나마 피해가 적어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민족주의자는 슬픔을 억지로 드러내고 과학자는 과학의 이름으로 분석을 한다. 우상숭배의 결과라는 근본주의자들의 분석은 그들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더 로드>는 분석하지 않는다. 그 비극을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거기에는 섣부른 휴머니즘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남는 방법 그것은 쫓는 자가 아니라 따라오는 자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세상은 이미 파괴된 세상이거나 파괴가 임박한 세상이다.

자연 재해 앞에서 겸손해진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뛰어난 방재시스템도 피해를 줄일 수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무력하다. 문제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 재해다. 지축을 뒤흔들지도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지 않아도 야금야금 모든 인류를 파괴로 몰고 간다.

가장 기본적인 연료와 식량이 투기물이 되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인간은 파멸을 준비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 재벌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영화 <더 로드>에서는 파괴된 세상에서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을 잡아먹는다. 오늘날은 먹을 것이 넘치는 자들이 사람을 죽게 만든다.

대규모 제약회사들의 담합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들의 에이즈 환자들을 방치한다. 한국의 재벌은 동네 골목 치킨 장사에 뛰어들고 가난한 상인들은 죽어 나간다. 7~80년대 민주화를 외치던 주역들은 어느새 스펙 좋은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교육 불평등의 현장 속으로 몰아넣는다.

열사 한명의 죽음에 분노하던 20년 전 그들은 아이들이 1년에 수백 명씩 죽어가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부추긴다. 이 시대를 과연 식인 풍습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만 우리는 잡아먹고도 입을 닦는 후안(厚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 속 사람들은 길거리에 달러가 굴러 다녀도 줍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왔건만 그것을 휴지보다 못하게 바라보면서 또 목숨을 걸고 도망간다.

물질 축복이라는 바알 신앙

조용기 목사는 일본의 재앙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킨다. 분석보다 애도가 필요한 시기에 목사랍시고 종교적 분석을 하는 그가 가증스럽다. 조 목사야말로 한국 기독교에서 "물질 축복"이라는 용어를 처음 소개하며 기독교 신앙에 바알 신앙을 결합시킨 최초의 인물이 아니던가!

물론 누구든 종교적 해석은 자유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의 해석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바알 신앙에 먼저 재앙이 내려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아직도 의기양양한 그들에게 먼저 재앙이 내려야 한다. 영화 원작 속 소설에 나오는 행군자들처럼 힘의 시위를 하는 이들에게 먼저 재앙이 내려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분석이 자기 죄를 돌아본 고백의 분석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희망이 사라지고 재앙이 시작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연 재해는 우리에게 그 재앙이 오히려 별 것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이 재해 앞에서 사이버적으로 아파하기 보다는 지금 내 곁에 다가와 있는 재난의 현실을 깊이 깨닫는 일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호의 손길도 제 의미를 찾을 것이다. 막을 수 없는 재앙보다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는 재난을 두려워 할 때다.

김기대 /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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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0 09:13:14
감사합니다.

짜장라면 2011-03-20 06:50:04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