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은 알고 우리는 모르는 것?
'칸'은 알고 우리는 모르는 것?
  • 김기대
  • 승인 2011.05.25 16:5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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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⑪ [내 이름은 칸], '다름을 허하되 네 것은 지켜라'

빈 라덴이 죽었다. 그가 테러리스트임에는 틀림없기에 그의 죽음에 안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재판 없이 사살 당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 할 말을 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 정부는 이 비난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전 중 사살이라는 부언을 하지만 별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또 다른 무마책으로 미국 정부는 나쁜 무슬림과 착한 무슬림을 구별하며 착한 무슬림을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 영화 <내 이름은 칸>.  
 

<내 이름은 칸>은 착한 무슬림에 대한 영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이름은 칸>은 썩 좋은 영화는 아니다. 미국에 편하게 살기 위하여 무슬림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미국적으로 계몽하는 영화다. 그런데 굳이 이 영화를 택한 것은 그 가벼운 계몽 영화조차도 알고 있는 것을 혹시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마음에서다.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인도 사람 리즈완 칸은 어머니의 죽음 후에 인도를 떠나 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향한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칸(칸은 성이지만 편의상 주인공만을 칸으로 부르기로 한다)의 동생은 형에게 화장품 외판원 일을 주선해 준다. 특별한 영업 전략은 없지만 자폐증 환자의 솔직함으로 제품 설명을 한 덕분에 칸의 고객은 늘어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첫 번째 미국식 계몽이다.

자기의 모국 인도에서조차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했던 칸은 머나먼 땅 미국에 와서 자립한다. 첫 번째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칸은 화장품 외판을 하며 드나들던 미용실에서 만디라를 만나 사랑을 나누며 결혼에 이른다. 만디라는 힌두교도로 아들(샘) 하나를 가진 싱글맘이다. 무슬림인 칸과 결혼하게 되면서 아들의 성은 무슬림식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행정적인 절차일 뿐 이들의 집에서는 아무런 갈등 없이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종교적 편견으로 아들도 살해당해

이들은 백인 중산층 가정과 이웃사촌이 되어 꿈같은 미국 생활을 시작한다. 칸과 샘도 어느 친부자 관계 못지 않게 가깝다. 이 꿈같은 시간이 흘러가던 중 미국에서는 9.11 테러가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인의 무슬림 혐오증이 심해지고 칸의 가정도 그 박해로부터 피해갈 수 없었다. 만디라의 미용실은 문을 닫아야 했고 칸의 동생의 아내는 히잡을 두르고 있다고 모욕을 당한다.

칸은 무슬림으로서 9.11을 조금도 비호할 생각이 없다. 그는 9.11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집회에도 참석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수모 속에서도 6년의 세월은 흘렀다. 칸의 식구들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이웃집의 마크가 아프카니스탄에 종군 취재를 갔다가 사망하면서 그 가족과도 멀어진다. 그러던 중 아들이 무슬림이라고 놀림을 받다가 친구들로부터 우발적 구타를 당해 죽게 된다.

만디라는 이 현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자신과 아들은 무슬림도 아닐 뿐더러 결혼으로 바뀐 아들의 성이 죽음의 원인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 같은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게다가 그 죽음의 자리에 있었던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화가 난 만디라는 칸에게 미국 대통령을 만나 “내 이름은 칸입니다. 저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라고 시킨다. 또 다른 자폐증 영화인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이 하염없이 뛰듯이 아내가 홧김에 한 말을 실천하기 위해 칸은 미국 여행을 시작한다.

영화는 이 부분부터 시작한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 D.C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다가 무슬림에 대한 과도한 짐 수색으로 비행기를 놓치면서 칸은 공항직원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자신은 무슬림일 뿐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 만디라가 남편 칸에게 요구한 “내 이름은 칸이고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칸은 힌두교적 주문(mantra)처럼 외운다. (ⓒ 2010 Drama Productions)  
 

"저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칸은 비행기 대신 버스를 타고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 미국 대통령이 항상 백악관에 있을 리 만무할 터, 그는 대통령의 동선을 따라 다닌다. 그러나 대통령의 기동력을 당할 수 없기에 그는 항상 한 발 늦는 것이 아니라 열 발쯤은 늦는다.

여행 중에도 무슬림의 기도 시간을 빼먹지 않았던 칸은 어느 도시에서 무슬림 대중 집회에 참석한다. 모임의 리더격인 무슬림 지도자는 미국의 이슬람 정책을 비판하면서 무슬림 청년들에게 궐기할 것을 요구한다. ‘착한’ 칸은 집회 중 그를 사탄이라고 비난한다. 집회 장소를 떠난 칸은 이 모임을 FBI에 고발한다. 이 영화 중 가장 작위적인 장면이다.

착한 무슬림인 칸을 부각시키기 위해 울분을 토하는 무슬림들을 모두 고발의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식 계몽의 두 번째가 있다. 이민자들도 투철한 고발 정신으로 미국의 이념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제재 장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슬림의 분노에 대한 원인은 설명되지 않고 울분만 범죄시 된다. 영화는 그 지도자가 진짜 극렬세력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의 추종자에 의해 칸이 공격받는 장면을 삽입한다. 불편함이 극에 달하는 부분이다. 영화 평론가 황진미 역시 이 장면을 불쾌해했다.

“자신이 ‘착한’ 무슬림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쁜’ 무슬림을 적극 신고해야 한다. 마치 월남한 서북청년단이 극렬 반공주의자로 활약하거나, 식민지 엘리트가 제국에 더욱 충성하듯이. 그가 신고한 교수는 진짜 테러리스트였을까? 알 수 없다. 무슬림만 모이는 사원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등을 비판한 그를 (아스퍼거장애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파악하는) 칸은 ‘사탄’이라 부르며 신고해버린다.

이웃끼리 막걸리 마시며 정부를 비판하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끌려갔다는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이지만, 영화는 체포에 협조해주어 고맙다는 기관원의 인사로 혐의를 확신시킬 뿐 그가 무슨 혐의로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영화에서 칸의 신고 정신은 ‘착한’ 행위의 귀감이며, 마지막엔 칼까지 맞음으로써 ‘우리 편’임을 재확인시킨다.” (<한겨레21>, 853호)

칸은 여행을 계속한다. 부시의 환영 인파 속에 있던 칸은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외치지만 인파의 함성에 묻혀 테러리스트라는 말만 들린다. 결국 경호원들에 의해 진압되고 테러리스트로 오해되어 불법 구금되고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취재하던 인턴 기자의 노력으로 칸의 사연은 전국적으로 소개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미국의 대통령은 부시에서 오바마로 바뀐다. 결국 대통령을 만나고 아내가 시킨 말을 한다. 아내와의 화해도 이루고 아들을 죽인 범인들도 잡히고 칸은 착한 무슬림으로 미국 전역에 각인된다.

서구, 중국 그리고 인도

이러한 단순한 계몽 구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우리에게 종교적 암시를 준다. 칸의 순례는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소원을 이룬다. 이것은 고생 끝에 옛 여자 친구를 만나는 또 다른 인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같은 사고 구조를 갖고 있다. 인도 종교(힌두교, 불교)는 지리적 위치와도 비슷하게 기독교와 중국 종교의 중간 지점에 있다. 중국 종교가 개인의 세속적 삶의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래서 진인사 대천명 즉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종교라면, 기독교에서 천명(계시)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인도의 종교는 그 중간에 있다. 칸의 순례는 값진 것이었지만 그 순례가 대통령과의 만남을 직접적으로 성사시킨 것은 아니다. 칸이 대통령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전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거기서는 진압당했다. 새로운 대통령의 우연스러운 접근이 칸의 소원을 성취하게 만든다.

중국 종교에서 수행이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라면 인도 종교에서 수행(순례 또는 삶 그 자체)은 인간의 책임이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초월의 영역이다. 칸이 백악관으로 간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칸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처럼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부터 다르다. 종교는 같을 수도 없고 같을 필요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다양한 종교는 이미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차이 앞에서 우리는 양극단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한쪽에서는 타종교를 배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인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속해 있다.

 

   
 
  ▲ 부시는 만나지 못하게 하고 오바마를 ‘강림’시킨 인도 감독 카란 조하르의 연출이 흥미롭다.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모든 종교는 다르다

한편으로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대화를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산의 정상(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정상에 이른다는 논리를 가지고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지점을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길을 택하냐에 따라 정상에 선 감동도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지점에 올랐다 해도 같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모든 종교는 다르다.

판넨베르그가 종교 간의 대화의 목표는 종교 간의 일치가 아니라 차이의 비폭력화라고 말한 것은 그런 점에서 옳다.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종교 간의 대화는 서로간의 본질적인 차이점과 대립을 전제하고 시작하며 불필요한 오해나 선입견을 대화 중에 제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결국 종교 간의 대화는 종교와 종교의 진리 주장 간의 대화이며, 이 진리 주장은 각각의 종교 전통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에 대화를 위해 제거되거나 포기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인도의 종교학자 파니카 역시 기독교인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해 “예수의 중요성을 축소시켜 버리거나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그리스도교 핵심교리를 덮어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리즈완과 만디라는 무슬림과 힌두교도로서 만났지만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간다. 이러한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것은 상대방의 신념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결코 같아지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칸의 동생은 무슬림인 형이 힌두교도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고 형제는 절연한다. 그러나 이슬람 혐오증 때문에 모욕을 당한 동생의 아내를 위로하기 위하여 칸 부부는 오랜만에 동생 집을 찾는다.

여기서 동생은 형에게 기대어 눈물을 흘린다. 칸은 결코 이슬람 신앙을 배교한 적이 없지만 힌두교도와 결혼한다는 이유 때문에 잠시 형제 간의 의가 상했을 뿐이다. 오히려 칸은 가장 신실한 무슬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 5번의 기도 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믿는 신에 대한 신뢰가 있다. 그 신은 편협하지 않기에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의 다른 신앙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은 조지아 주에서 밤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다친 흑인 아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그 집 식구들과 며칠 함께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 집의 큰 아들은 이라크에 가서 전사했다. 무슬림과 이라크 전사자 집안의 동거는 적대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화평을 누린다.

칸은 이 가정과 함께 교회를 찾는다. 흑인 아이는 형을 회상하며 예배에서 간증한다. 칸은 자기의 신앙 언어로 간증을 한다. 두 간증 사이에 누구도 내 간증이 더 진실하다고 상대방을 강요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이루어진 무슬림의 간증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자리에 누구도 무슬림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믿는 신의 관용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자기가 믿는 종교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다른 이의 신앙을 폄하하지 않는다. 나의 믿음이 아름다운 만큼 다른 이의 고백도 아름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이의 고백이 아름다워 개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이전에 자신의 종교에 신실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찾기

그러므로 일부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서로의 신앙 체계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의미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다만 그 차이를 횡단할 뿐이다. 앞선 판넨베르그의 지적처럼 다른 신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신의 진리 체계를 유보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신앙에 진실 되게 투철한 사람만이 다른 이의 신앙을 존중한다.

만디라가 남편 칸에게 요구한 “내 이름은 칸이고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칸은 힌두교적 주문(mantra)처럼 외운다.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던 시절 그는 아내의 주문 외우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제 칸은 주문을 외운다. 하지만 그것은 힌두교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샘에 대한 추모이고 아내와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조지아 주의 작은 마을을 떠난 칸은 다른 지역을 여행하다가 자기에게 소중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준 그 마을에 홍수가 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뉴스를 접하고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간다. 그는 진리를 찾는 일(대통령을 만나는 일)을 잠시 유보한다. 그리고 그 마을에 가서 수해 복구를 돕고 이 장면은 또 한 번 미국인들을 감동시킨다.

종교가 만나고 대화하는 자리는 바로 이 자리다. 윤리와 실천의 자리다. 아픔의 자리고 사랑의 자리다. 종교학자 아말라도스는 윤리적 대화를 제안한다. 인간 고통과 생태계 위기에 관한 구체적 문제를 놓고 대화할 때 이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려고 각 종교의 임무를 찾을 때 ‘정의를 위해 연대하려는’ 각 종교인들은 신앙에 몰입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섣부른 다원주의 이론에 의해 만나지는 것도 아니고 만남이 당위론적 명령도 아니다. 그냥 우리는 타종교인들과 정의를 위해 연대하고 같은 아픔을 느낄 뿐이다.

 

   
 
  ▲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이 하염없이 뛰듯이 아내가 홧김에 한 말을 실천하기 위해 칸은 미국 여행을 시작한다. (ⓒ 2010 Drama Productions)  
 

자기 세계에 갇혀버린 우리들

칸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자폐증이란 글자 그대로 자기의 세계에 갇히는 병이다. 그런데 이 칸이 사랑과 아픔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자신의 신앙에 진실한 것을 일종의 자폐증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려고 한다. 혹시라도 세상과의 소통이 시작되면 자기의 믿음이 급속도로 와해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어디 종교의 영역뿐이겠는가.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사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모든 학생들이 좌경화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무슬림의 숫자가 늘어나면 그들이 나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자살 폭탄이라도 안고 다가올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스퍼거 장애를 가진 칸도 아는 사실, 미국은 9.11 이후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불법 구금, 고문, 이슬람 혐오증)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인도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평범한 애국주의 영화조차도 아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기독교들은 도대체 어떤 병명으로 설명을 해야 할까.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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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2011-05-31 01:15:36
마지막 문단에 대한 답은
순교자와 돈

영화팬 2011-05-27 23:59:16
"다름은 허하되, 네것은 지키라"는 말이 성경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