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성품이 길이다"
"정의, 성품이 길이다"
  • 김영봉
  • 승인 2011.06.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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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목사의 연속 설교(3)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빌립보서1:9-11, 로마서 12:1-2)

1.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모든 학설들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적인 결함이 있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지, 과연 인간에게 옳은 일을 분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행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들은 인간에게는 옳은 것을 판단할 능력이 있으며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그것을 행할 능력도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에 관한 학설들이 공유하는 또 다른 전제는 인간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존 스튜어트 밀(John Stewart Mill),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존 롤스(John Rawls) 등, 그동안 수많은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지만, 학설만 다양해졌을 뿐,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마치 장기판의 말과 같기 때문에, 인간적인 시각에서 무엇이 정말 옳은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의할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으니, 결국 대안은 “서로 알아서 하자”는 것뿐입니다.

   
 
  ▲ 포스트모던 시대의 금언 중 하나는 “Live and let live”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뜻입니다.(출처 : woodenurecover.com)  
 
이것이 포스트모던시대의 정신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금언 중 하나는 “Live and let live”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뜻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느 하나의 이론이 옳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여러 가지의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여러분이 알아서 선택하시오”라고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먹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을 전제하고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달라집니다. 물론, 어떤 신을 믿느냐의 문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그리스 로마나 이집트 혹은 인디아에서 만들어진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믿는다면, 믿지 않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신들은 인간보다 조금 더 나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성품에 있어서는 인간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신들은 인간만큼이나 이기적이고 복수심과 질투가 심하고 변덕이 많습니다.

무당이나 점술가가 섬기는 신도 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당이나 점술가에게 찾아갈 때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갑니까? 비싼 복채를 내면서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옳은 것을 알고 싶어서입니까? 정의가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다 자기 이익에 관해 묻고 싶어서 찾아갑니다. 무당이나 점술가들은 복채를 받고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아 줍니다. 그들이 모시는 신들은 정의와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아무리 부도덕하게 살고 있어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신을 믿는 것은 정의에 대한 질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을 믿지 않고 양심적으로 살려는 사람보다 도덕성에 있어서 훨씬 더 낮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전지(omniscient)하고 전능(omnipotent)할 뿐 아니라 공평무사하고 모든 인간과 생명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신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정의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런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 것이며 정의의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의’라는 말을 할 때면 무의식중에 ‘누구에게나, 언제나 옳은 것’이라는 전제에 동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볼 수 있고, 현재와 미래를 함께 볼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존재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그런 신입니다. 그분은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소부재하신(omnipresent) 분입니다. 온 우주를 품고 계실 정도로 크신 분이며, 또한 우리의 존재의 깊은 속까지 살피시는 분입니다. 얼마나 세밀하신가 하면, 지난밤에 제 머리카락이 몇 가닥 빠졌는지를 알고 계실 정도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놓고 계신다." (마 10:30)

물론, 예수님은 여기서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대로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뭐 할 일 없어서 매일 아침 당신의 빠진 머리카락 수를 세고 계시느냐’고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매일 일삼아서 세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지의 능력 때문에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애써서 알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2.
예수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그렇게 세밀하게 우리 각자의 삶을 살피시는 동시에 또한 인류 전체를 살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진실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인간에게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이로운 일이 ‘항상’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래전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 (시 33:5)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구약 예언자들의 신탁(oracle)에 보면 ‘정의’ 혹은 ‘공의’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 5:24)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 (사 56: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토록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람에게 무조건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바쳐진 제물을 보시기 전에 제물을 바치는 그 사람의 삶을 보십니다. 제사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 5:23-24)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그리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얼른 들으면, 마치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지적 고민을 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너무 단순하게 혹은 너무 편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느낌도 받을지 모릅니다. 상투적인 대답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의와 사랑과 진리가 본성인 신을 전제한다면, 정의는 신의 뜻에서 찾아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신의 뜻을 빙자하여 수많은 불의가 자행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단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을 믿는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 같은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지금도 신의 뜻이라는 명분 하에서 불의를 음모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있습니다. 신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잔인하게 무력을 사용하는 알 카에다나 기독교 극단주의자들 혹은 극단주의적인 시온주의자들이 그 예입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주변에서 아주 사소한 모습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면서 서로 등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3.
하나님의 뜻에 관해 기독교인들이 드러내는 문제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신앙과 교회와 관계해서만 찾으려 하는 문제입니다. 직장에서의 문제 혹은 사회와 국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신앙과 교회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갇힐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상입니다. 또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대개 정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관심밖에 없습니다.

둘째 유형은 자신의 생각이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매우 자주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우리는 자주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고, 그것을 이루어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런 경향을 알기에 저는 중요한 선택 앞에서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기회입니까? 위기입니까?” 제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 채 선택하면 위기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면 기회가 됩니다. 그 분별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도 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원하는 것이 생길 때, 아무런 고민 없이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셋째 유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고, 자신의 욕심에 속아 넘어간 경우입니다. 2011년 5월 21일에 휴거(rapture)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가 거짓 예언자로 판명 난 해롤드 캠핑(Harold Camping)은 사기꾼이 아닙니다. ‘사기꾼’이라는 말은 자신은 믿지 않으면서 어떤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속인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해롤드 캠핑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거짓을 진실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5월 21일 이후로 그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판단력을 잃은 노인처럼 되지도 않는 말로써 변명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속아 넘어가는 일이 믿는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 2011년 5월 21일에 휴거(rapture)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가 거짓 예언자로 판명 난 해롤드 캠핑(Harold Camping).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내세울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면 먼저 의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 해도 의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 많은 목사님이라 해도 먼저 의심해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가장 많이 혼동하는 사람들이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고 은사가 많은 목회자들입니다. 분별없이 기도하기 때문이요, 영적 교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다 싶은 느낌이 오면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말할 때도 조심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심하면서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처럼, 나와 내 가정 그리고 내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한다면, 또한 우리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시키지 않고 부단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사탄에게든 우리의 욕심에게든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은 곧 모든 이들에게 정의가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바울 사도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정의롭게 사는 삶의 비밀을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 12:2)

정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에 긴장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가 나를 그 틀로 찍어 버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석하여 알아내는 정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4.
이 말씀 속에서 ‘분별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키마조’(dokimazo)라는 단어를 영어로는 보통 ‘discern’으로 번역하고 우리말에서는 ‘분별하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도키마조’를 헬라어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어떤 것에 대해 조사와 시험을 해 보거나 실제로 사용해 봄으로써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려고 노력하다.(To try to learn the genuineness of something by examination and testing, often through actual use.)"

그냥 단순히 ‘알다’ 혹은 ‘발견하다’는 뜻의 다른 헬라어도 있는데, 특별히 이 단어를 쓴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실험과 시험과 실습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욕심과 혼동하게 되거나 속아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저는 앞에서 이미 그 같은 경향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먼저 의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들이대는 사람일수록 의심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의심하는 이유는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시험하고 실험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 쉽게, 너무도 안이하게, 그리고 너무도 기계적으로 알아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 혹은 성경 말씀을 통해, 혹은 예언 기도를 통해 단박에 그 뜻을 알아내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고 또한 영적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 즉각 즉각 대답을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하나님과 소통하고 싶어 합니다. 휴대폰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즉시 통화가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초조함과 불안함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도 미신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성경을 손에 쥐고 눈 질끈 감고는 기도합니다. “주여, 믿습니다! 응답을 주소서!” 그리고는 아무데나 펼칩니다. 펼쳐진 그곳에 마법처럼 응답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하신 분이라면, 장난으로든 혹은 심각하게든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대답을 찾았다 해도 문제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응답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이쯤 되면, 허울만 기독교지, 미신을 믿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제 말씀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마음에 섬광처럼 와서 찍히는 계시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매일 큐티 중에, 내가 아닌 다른 누가 정해 놓은 순서대로 성경을 읽을 때, 어느 날, 펼쳐진 말씀 속에서 바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예언의 은사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시험의 대상입니다. 기도 중에 음성을 들었다고 하여 모두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우리를 속이는 사탄의 음성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응답을 들었다면 ‘도키마조’해야 합니다. 성경은 원래 주문처럼 읽도록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 내 문제에 대한 응답처럼 보이는 내용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도키마조’해야 합니다. 또한 예언의 은사야말로 가장 위험한 은사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예언을 해 주었다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도키마조’해야 합니다. 테스트를 해 보아야 합니다. 실험해 보아야 합니다.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5.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도키마조’를 하다 보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속에 형성됩니다. 이 시대의 풍조를 경계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다 보면 성령으로 지어진 속 사람이 성장합니다. 속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빚어집니다. 우리는 그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성품이 곧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지 않아도 됩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2:13)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사귀는 것’은 ‘지속적인 만남’과 ‘상호 교류’가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렇게 자주 만나고 상호 교통이 일어나면 내가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되면 마치 일심동체가 되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부부가 서로 뜻을 묻지 않아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물론,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사람도 때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영적 씨름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우리의 속 사람을 키우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지식만을 위해 성경을 읽으면 별 소득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속 사람이 성장하려면, 성경을 ‘해답집’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뒤적거리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거립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수천 년 전에 쓰인 성경책에 모두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또한 이렇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통해 속 사람이 자라지 않습니다. 대답만 찾고 말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문제집’처럼 대해야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과 공부 못 하는 사람의 차이는 문제집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공부 못 하는 사람은 문제집을 풀면서 자신이 푼 문제와 똑같은 문제가 시험에서 나와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상문제만을 뽑아 달달 외웁니다. 아무리 좋은 문제집이라 해도 동일한 문제가 본시험에 나올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그러니 시험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공부 잘하는 사람은 문제집에 나와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풀면서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나올 때 그것을 응용하여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웁니다. 아, 진작 이 비밀을 알았어야 하는데, 이제야 깨달았으니 어쩝니까?

성경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성경 안에서 ‘예상문제’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문제집으로 삼아 문제 해결의 능력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신앙인들이 붙들고 씨름했던 문제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다양한 유형의 문제들을 푸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의 삶에서 부딪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생깁니다. 성경 시대의 저자들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문제들을 우리들은 끊임없이 만납니다만, 성경의 문제들을 풀다 보면 그 문제들을 풀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경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굳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예언을 좇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언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면 한 개인의 미래를 내다 볼 능력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을 굳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속 사람이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기를 힘쓰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품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성품을 키우는 데 있어서 ‘도키마조’가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시험하고 질문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성품이 형성되고, 성품이 형성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품은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크고 작은 결정들을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성품이 만들어집니다. 그 성품이 정의로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6.
성품은 마치 운동선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힌 실력과 같은 것입니다. 제 아들아이가 고등학교 때 학교 농구부에 들어갔습니다. 동양인으로서 팀에 선발된 것만도 자부심을 가질만하다고 좋아했습니다. 3년 동안 제 아들아이는 팀에서 가장 힘든 포지션을 맡았습니다. ‘벤치 워머’(bench warmer)라는 포지션입니다. 다른 선수들이 경기에 뛰고 있는 동안 벤치에 앉아서 차가운 벤치를 따뜻하게 덥혀 놓는 역할이었습니다. 이 포지션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주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합니다.

한 번은 아들아이가, 자신이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를 제게 말하는데, 일리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경기 중에 볼을 잡으면 순간적으로 어떻게 할까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농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때였으니, 생각해서 게임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아이들은 볼을 잡으면 거의 본능적으로 볼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게임 중에 자신이 볼을 잡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상대 선수가 볼을 채어 가는 겁니다. 반면, 수많은 연습을 통해 농구 기술이 몸에 배인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장 필요한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며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문제 해결의 능력을 기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기르게 되면, 이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고, 그것을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자꾸만 실패를 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 안에 거룩한 성품이 형성됩니다. 그 성품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굳이 따지고 고민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행하게 됩니다. 볼을 손에 쥐는 순간 몸이 움직여지는 마이클 조던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소망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 빙하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밴드 단장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월러스 하틀리(Wallas Hartley). (출처 : 위키피디아)  
 
영화 <타이타닉>을 보신 분들의 기억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 중 하나가 물이 차오르는 중에 밴드가 ‘내 주를 가까이’(Nearer, My God, to Thee)라는 찬송을 연주하는 장면입니다. 2012년 4월 15일이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 100년이 됩니다. 백 주년을 맞아 이 사건과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해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재조명 작업의 초점 중 하나가 바로 이 밴드입니다. 이 밴드의 단장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월러스 하틀리(Wallas Hartley)는 아주 신실한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자주 크루즈 여행단에서 연주했는데, 약혼녀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사고가 나던 날 저녁, 밴드는 약속된 연주를 마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등 실로 올라가 보너스 연주를 해 줍니다. 그곳에서 연주를 마치려 할 때쯤, 배가 빙산을 들이받아 파선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승무원과 승객들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밴드의 단원들도 주섬주섬 악기를 챙겨 떠나려 할 때, 하틀리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혼자서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의 연주에 자리를 떠나던 다른 단원들이 멈칫했고, 이윽고 그의 연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바닷물이 발을 적시고 무릎에 차고 허리를 덮을 때가지 연주를 지속합니다. 하틀리는 그렇게 연주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연주 덕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황망함으로 인해 잊었던 믿음을 회복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그렇게 초연하게 연주하는 하틀리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하틀리는 이 위급한 순간에 어떻게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가 따져 보지도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안에 형성된 성품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결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좋은 음악은 인간의 흥분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잘 훈련된 농구 선수가 볼을 잡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신앙으로 잘 훈련된 그의 성품이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를 알게 했습니다. 월러스 하틀리의 생애를 연구한 전기 작가 스티브 터너(Steve Turner)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하틀리의 성품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개인적 확신이 그의 밴드 멤버들을 움직였을 것이 틀림없다. 하틀리의 영향 하에 그 밴드는 그들의 인간적인 한계를 초월했다." (The Band That Played On)

7.
오늘 우리는 복음에 담겨 있는 세 번째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롭게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험하고 검증하고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어야만, 그 성품을 통해 정의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진실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너무 조급해하기 때문이며, 너무도 쉽게 해결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 안에 성품이 형성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 때 그 때 문제를 해결하며 자기 생긴 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불편합니다. 우리가 진리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견디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형성되도록 힘쓴다면, 그 성품은 매일 매일의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뿐만 아리라, 위기의 순간에 그 성품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언젠가, 황당한 일을 당하여 모두가 허둥댈 때, 그 성품은 우리를 든든히 잡아주고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의식이 약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질 때, 그 성품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때로, 욕심에 불을 붙이는 위험한 유혹 앞에 설 때, 그 성품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나게 해 줄 것이고 우리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때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 할 때, 그 성품은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가 누리게 될 한없는 자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될 가슴 뿌듯한 생명의 기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덕을 입게 될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리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 사도와 함께 우리 모두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1:9-11)

아멘!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 김영봉 목사의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이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를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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