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영성', 이렇게 회복하라
'공적 영성', 이렇게 회복하라
  • 이학준
  • 승인 2011.07.14 13:1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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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패러다임을 바꿔라(3) 공적 영성 회복 위한 7가지 요소

뉴브런스윅신학원의 이학준 교수(신학 및 윤리)는 ‘공적 영성’의 회복이 한국 교회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공적 영성의 결여가 이기적인 기복신앙을 낳고, 자기 주장만 강조하는 소통불능의 그리스도인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가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성도들 역시 책임 있는 시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공적 영성의 부재가 낳은 결과로 봤다. 이학준 교수는 공적 영성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 넘는 성서적 창조론과 구원론,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이성과 신앙, 칭의론과 성화론을 엮어내는 통전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주뉴스앤조이>는 앞으로 이학준 교수의 공적 영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6차례에 걸쳐 나눠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주)

한국 개신교의 위기가 신앙의 본질을 타협한 정체성의 위기와 동시에 성도들의 신앙을 변화하는 사회와 연결시켜주는 일의 실패에서 비롯된 적합성의 위기라면, 이 두 위기의 밑바탁에 도사리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공적 영성의 결여입니다. 

공적(public)이란, 사적(private)·이기적인(selfish)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편적·공동체적, 객관적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그 일원으로서) 나누는 참여와 책임의 측면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공적 영성이란?

기독교의 공적 영성이란 신앙의 신비적(mystical) 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친밀함(personal intimacy)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강조하는 좁은 의미의 '사회복음'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공적 영성을 갖는 것은 성도의 신앙의 비밀스러움과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경험의 독특성을 양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정한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경험들은 우리의 신앙을 공적이며 보편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공적 영성은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반드시 균형과 조화를 이룹니다. 친밀성이 공적 성격, 이웃과 창조물과의 관계를 잃어 버린다면 내세적, 신비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반면 공적 영성이 친밀성에 뿌리를 두지 못하면, 이는 소위 말하는 인본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조화는, 마치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나 서로 하나인 것과 같은 맥락에 서 있습니다. 칭의는 회개를 전제하며,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이기적·사적 삶으로부터 돌아서는 것, 즉 성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성화의 또 다른 표현이 공적 영성입니다. 

흔히 성화가 개인 경건으로만 오해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공적 영성은 우리 내적 신앙의 내적 지향성이 개인이 아닌 이웃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을 보여 줌으로, 오히려 개인성화가 갖기 쉬운 율법의식, '자기의'의 틀을 뛰어넘게 합니다. 한마디로 공적영성은 개인과 사회의 성화를 포괄하며,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일맥상통합니다. 

'소통', 친밀성과 공적 영성 조화를 위한 첫걸음

우리 신앙에서 친밀성과 공적 영성을 조화시켜주는 것이 소통(communication)입니다. 기도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소통이 우리를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로 이끌어 주다면, 사회와 소통한다는 말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바로 이해하고, 공동선과 객관적 진리, 즉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 참고).  

소통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계시’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뜻하며, ‘구원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소통관계의 완전한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의미도 바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공적 영성이란 이 소통의 폭이 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 중심이라는 훨씬 더 넓은 차원으로 옮겨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물인 세상과 역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바로 이 소통 속에 초대되는 것입니다. 소통은 끊어지지 않느 대화이며, 대화를 통해 자라가는 사랑을 말해줍니다. 소통이 없으면, 사랑도 궁극적으로는 식습니다.

삼위일체가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균형의 뿌리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균형과 조화의 뿌리는 삼위일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항상 소통과 합일속에 계십니다. 소통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소통속에 삼위는 일체를 이룹니다. 상호침투(perichoresis)라는 신학적인 용어가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신앙의 개인적 신비와 공공성이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보완, 일치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바탕이 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친밀함이 성령의 역사의 특징으로 개체성, 구체성과 통하는 개념이라면, 공공성은 로고스 사역의 특성으로 우주성, 보편과 통하는 개념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비성·친밀성(구체성)과 하나님의 공적·우주적 보편성을 동시에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만날수록(소통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공적인 차원을 이해하게 되고 그 공적 사역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는 예수님의 말씀의 원리와 같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명의 현장은 공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의 현장이자 사회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공적 응답의 현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소명 속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은 깊은 만남이 있었던 동시에 또한 개인의 영달과 안락을 뛰어넘는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상적인 공적 영성의 모델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조화의 가장 좋은 예가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깊에 뿌리 내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공적 영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이웃에게 열려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놀라운 비유들, 나무와 열매에 대한 가르침(마7:16-2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과의 식탁 교제 등은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이 추호의 모순도 없는 하나의 멋진 하모니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확증하신 후,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가 어느 개인과 교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온 땅에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공적 차원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소위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말하는 개인 신앙과 사회복음의 양자택일은 잘못된 선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일수록 공적인 영성을 소유하게 되고 또 사명의 사람으로 자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여러 부패와 갈등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근본성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적 영성 빠진 구도자 예배는 엔터테인먼트

오늘 한국 교회를 보면, 전도에서 공적 정신이 빠지게 되니 곧 내 사람 모으기가 되어 버리고, 개인 신앙에서 공적 정신이 자리지 못하면 항상 유아적이 성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 사랑에서 공적 정신이 빠지면 족벌주의(nepotism)이 되고, 축복에서 공적 정신이 결여되면 기복주의가 되고, 신앙에서 이성의 자리가 없어지면 광신주의나 신비주의가 되고, 카리스마적 리더쉽에서 공적 정신이 사라지면 도선과 아집의 권위주의에 의한 독재정치(autocracy)가 됩니다.

또한 구도자 예배에서 공적 측면이 빠지면 엔테테인먼트나 치료요법(therapy)이 되어 버립니다. 개교회주의는 교회론에서 공적 차원이 실종된 결과요, 이원론적인 사고는 신앙에서 역사라는 하나님의 공적 차원이 빠진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신앙에서 공적인 부분이 실종되면 이기주의와 물량주의, 그리고 독선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적 영성 상실로 게토화되는 한국 개신교

이런 공적 영성의 미발달은 크게는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 리더쉽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였으며, 작게는 성도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책임있는 시민의 역활을 감당하는 것을 가로 막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 사회 내에서 소수자 혹은 변두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적·문화적 세력들과의 정단한 토론을 거부하고 시민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을 주저하는 종교는 결국 사회적 리더쉽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 사회 안에서 게토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국 교회들은 앞에서 말한 개교회주의·기복주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서 기독교  영성과 사역의 공적 측면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처럼 많은 외침을 경험하고 열강들의 압력과 남북분단의 상황이 아직 계속되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적인 차원과 역사적인 차원을 외면하는 종교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기 힘듭니다.

사회 대중이 볼 때, 개인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만 치중하는 종교는 편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고,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는 외면한 채 문화적 현상에 피상적으로 대응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종교는 상업주의적인 모습으로 비치기 쉽습니다.

공적 영성의 회복, 한국 교회 생존을 위한 선택

공적 영성의 회복은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올 때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한국의 초기 개신교는 다른 어떤 종교나 기관보다도 더 충만하고 깊은 공적 영성을 가지고 민족을 계몽하고 역사를 변혁시켰으며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데 힘썼습니다. 그 결과 짧은 역사를 가진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영광과 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의 착각은 한국 개신교의 위가 개인적인 경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 경건은 하나님앞에 개인이 가져야 할 필수적인 것이지만, 교회가 역사와 사회속에서 사역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 경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회의 사역을 이끌어줄 시대적 세계관 신앙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경건한 목회자 혹은 교회라고 해서 공적 영성의 결핍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신학적인 성찰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패러다임을 기복적·성장지향적·개교회주의적 영성에서 공적 영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금의 한국 개신교의 영성 코드에 공적 영적을 담아내는 신학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지향점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1) 개교회주의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 사역의 궁극적 지평은 개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핵심 메세지는 개교회의 성공, 축복,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통치)는 개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과학의 사회의 제반 영역을 향해서도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지평으로 삼는 신앙과 사역은 바른 창조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샬롬)이라면, 창조론을 배제한 구원론이란 결국 반쪽짜리 진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창조론이 허약(虛弱)한 기독교는 포괄적이며 일관성 있는 윤리관을 제공하지 못하고 개인 경건주의에 머물고 말아, 교회와 성도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고 맙니다.

2) 기복주의에서 공동선의 축복으로

성경은 의·식·주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권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 삶의 기본 권리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공익적 목적 없이 계속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기복주의의 문제점은 이 필요와 욕심을 구분하지 않으며 욕심이 항상 필요로 둔갑되므로, 인간의 구복(求福)적 행위가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을 뛰어넘어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이기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며, 이때 종교가 때론 그 욕심을 용납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정당화시켜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기복주의를 넘어 이웃을 섬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성경적 복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3) 성장주의 교회에서 소통하는 교회로

위에서 본바대로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소통의 항존성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소통을 인간과 나누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는 이러한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고 구원은 모든 만물 간의 소통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또한 화목은 온전히 소통을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리스도안에서 이 소통을 개인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한국 개신교는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성장주의를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공간에 곰팡이가 피고 썩는 것처럼, 또 몸에 어느 한 부분에 피가 통하지 못할 때 그 부분은 병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도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패는 하나님과 세상과 살아있는 소통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욕망에 갇힌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고 또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서는 심도깊은 성서이해는 물론 여러 입증된 사회과학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5) 단순논리에서 분별력 있는 신앙으로

시대가 변할 때마다 정사와 권세, 공중의 권세 잡은 영들도 모습을 달리하여 새로운 이론과 문화적인 유혹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사회와 바르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물론, 사회가 변함에 따라 찾아오는 신앙의 혼란을 잘 정리해 주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은 어느 사회보다도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극단성, 급격한 사회변화, 종교적 다양성, 문화적 격변 속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더욱 예리한 신학적 사고와 성찰을 찾추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6) 이성경시에서 이성의 창조적 사용으로

이성의 바른 사용이 없이는 인간 사이의 소통과 성찰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이 영성과 이성이 잘 조화된 사역을 통해서 여러 타종교, 철학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세계적인 종교로 기독교를 뿌리 내리게 한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도 성화된 이성적 분별력을 사용하여 공동체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구체적인 현실의 변화를 추구해 나가야합니다.

7) 카리스마적 목회 리더쉽의 공적 승화

모세의 리더쉽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세의 카리스마의 본질이 개인의 자질과 능력에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 사랑과 백성 사랑(즉 공적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카리스마가 개인의 언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충성되고(히3:2) 백성들을 사랑한 데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지만, 개인의 사욕과 명예보다는 미래의 비전을 보면서 공동체 전체의 유익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그의 리더쉽에는 책임과 권한을 나누는 민주적인 리더의 모습들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언변을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움으로써 해결합니다. 또 아론으로 하여금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리더쉽을 공유하고, 여호수아와 같은 군사 지도자를 세워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세워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등의 조직의 리더들을 세운 후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백성들을 보살피고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10계명과 613가지 조목의 율법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 생활이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규범과 공공성에 따라야 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이 한국 교회의 여러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따라가야 할 바람직한 리더쉽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위의 제안들은 모두 바른 신학적 성찰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을 회복하고 강화하자는 것입니다. 신학적 성찰이 있을 때 우리의 영성은 바른 가치의 기준과 틀을 가질 수있게 되고, 동시에 우리의 삶과 사역에 장기적인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을 우리 삶에 회복시키고, 신학적 성찰을 통해 계속 정교화시켜갈 때에 자연스럽게 극복될 것입니다.  

이학준 교수 / 뉴브런스윅신학교

* 이학준 교수가 출간한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에 나온 내용 중 일부를 필자가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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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theology 2011-07-19 08:43:57
김학준 교수님이 계신 미국 동부 뉴저지의 PCUSA 신학의 본산(어딘지 아시죠? PTS)에서 십여년전부터 공적 신학(piblic theology)의 담론을 생산한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공적 영성은 공적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공적 신학이든 공적 영성이든 한국에는 이미 그와 비슷한 그러나 타락한 사이비 공적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 몇가지 행태는 1) 지역의 대형교회들(주로 장로교회가 많지요)이 연합체를 구성해서 그 지역의 지자체장(시장, 군수등)과 비공식적인 회합을 정기적으로 갖습니다. 제가 아는 서울 근교의 한 신도시는 시장이 무속인(점장이)에게 상담하는 사람입니다. 장로교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달에 한번 정도 조찬모임 내지는 식사 회동을 갖는답니다. 목사들이 무얼 주는지는 잘 몰라도 거기서 이런걸 받아낸대지요. 지역개발 정보를 미리 알아서 신도시나 재개발지역에 종교부지를 선점하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지요. 2) 성시화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여겨지는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서울시 봉헌 세레머니 3) 80년대 대학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유포된 고지론 (먼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높은 포지션에 올라가라, 그 후엔 네가 가진 지위, 권력, 돈, 인맥을 이용하여 기독교적 영향력을 전파하라 --> 이거 원조가 누군지 아시죠? 세상이 요즘 기독교의 큰집으로 알고 있는 로마 천주교, 그 중에서도 예수회가 전문가고, 오푸스 데이가 활동가들이지요 * 한 때 국립대 안에 신학과를 설치하자는 운동을 벌이던 이들도 있었지요. 그 논리 중 하나는 서양, 특히 유럽, 독일 등지에 가보면 일반국립대 안에 신학과가 있다는 궁색한 사대주의적 서구 추수적논리에 식민지저 마인드 이지요. 요즘 안티-기독교 정서 때문인지 수구러 든 것 같지만 ..... 암츤 횡설수설 이만 각설 하겠습니다.

public theology? 2011-07-19 08:31:51
수년전부터 이학준 교수님이 계신 그곳 PCUSA 신학의 본산(어딘지 아시죠 PTS)을 중심으로 기독교 윤리 분야에서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의 담론이 생산된다고 들었습니다. 공적 영성은 공적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공적 영성이든 공적 신학이든 한국에서 아주 퇴행적이고 타락한 형태로 진행되는 공적 기독교도 있지요. 지역 대교회 (주로 장로교회가 많지요) 목회자들이 지역 지자체장(그가 교인이든 아니든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과 대부분 비공식적인 형태의 조찬모임 내지 회동을 갖습니다. 서로 줄 걸 주고 받을 걸 받지요. 선거에 대한 음양의 지원을 댓가로 평소에 돈독한 유대를 댓가로 지역개발 정보를 먼저 선점하여 종교부지 확보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합니다,. 둘째 70년대부터 시작된 성시화 운동, (장충체육관에서 시장님 모시고 서울시를 봉헌하는 세레머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여지네요) 한 때 국립대 안에 신학과를 설치하자는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었지요. 작금의 반기독교정서 때문인지 요즘은 쑥 들어간 것 같네요. 넷째 모선교회를 중심으로 80년대부터 부상한 젊은이들을 위한 고지론(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포지션에 올라가서 그 지위와 권력과 돈과 인맥으로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전파하라 --> 원조가 누군기 아세요. 세상이 기독교의 큰집으로 알고들 있는 로마 천주교죠, 그 전문가는 예수님과 별로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그 이름 쓰는 예수회고요) 이만 횡설 수설이었음다. 그나 저나 미주 뉴조는 록인 안해도 댓글 달 수 있으니 편하기도 하네요^^

atom 2011-07-19 07:07:27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명의 현장은 공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의 현장이자 사회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공적 응답의 현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소명 속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은 깊은 만남이 있었던 동시에 또한 개인의 영달과 안락을 뛰어넘는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의 글을 읽으니 자꾸 문익환 목사님이 자꾸 떠오릅니다. 공적영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몸으로 살아가신 분으로 여기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어디에 있나요? 사랑은 바로 '현장'에 있지요. 사랑의 처소는 우리의 속좁은 마음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삶의 현장에 있습니다'

짜장라면 2011-07-16 05:24:55
음...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주의적 영성과 여의도 신학(?)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글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분명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보편적, 공적영성을 갖추는 일일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신학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즉, 보수다운 보수가 드믈다는 것 입니다. 꼴통만 많고 보수가 드문 요즈음입니다.

아톰 2011-07-15 11:14:38
이교수님의 '공적영성'에 대한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뭐 분석의 편의상 개인영성과 공적영성을 나눌 수 있을지라도... 진정한 영성이란 바로 이교수님이 말씀하신 '공적영성'이 아닌가 합니다. 좀 급진적으로 말하면, 공적영성이 빠진 보수복음주의신앙이란 깊게 깊게 숨겨져 있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맞닿아 있고, 이를 정당화해주는 '소아신앙'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 공적영성이 빠져버린 보수복음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구원이나 있기나 한 것인지... 너무 나갔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