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와 청교도의 ‘공적 영성’
언더우드와 청교도의 ‘공적 영성’
  • 이학준
  • 승인 2011.08.13 20:0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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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패러다임을 바꿔라(4) 언더우드에게 배우라

뉴브런스윅신학원의 이학준 교수(신학 및 윤리)는 ‘공적 영성’의 회복이 한국 교회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공적 영성의 결여가 이기적인 기복신앙을 낳고, 자기 주장만 강조하는 소통불능의 그리스도인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가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성도들 역시 책임 있는 시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공적 영성의 부재가 낳은 결과로 봤다. 이학준 교수는 공적 영성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 넘는 성서적 창조론과 구원론,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이성과 신앙, 칭의론과 성화론을 엮어내는 통전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주뉴스앤조이>는 앞으로 이학준 교수의 공적 영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6차례에 걸쳐 나눠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주)

한국 개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이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조화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우리는 이를 한국에 온 최조의 선교사들이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은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을 소유한 균형 잡힌 신앙인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 30년간 사역했던 언더우드의 경우, 그는 일찍이 그의 모교인 뉴브런스윅신학교와 모교회인 그러브개혁교회(Grove Reformed Church)에서 배운 개혁신앙을 통해, 복음을 전인적, 통전적으로 이해하여 개인영혼의 구원과 사회의 성화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애 동안 40여 개가 넘는 교회를 한국에 개척했고, 수차례에 걸쳐 한반도 북부 지역의 전도 여행을 감행했으며 성경 번역과 의료 선교 등 복음전도의 일 외에도, 영한 한영사전 편찬하여 한국인들이 학문과 기술을 더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발간(1901)하여 농업정보와 기술 등을 제공했습니다. 동시에 1896년에 고종탄생일을 공식적 기독교 행사로서 축하한 일, YMCA를 창립하고 <코리안리뷰>의 편집장을 맡은 일 등은 언더우드가 진정 하나님나라를 사랑한 친밀성과 더불어 공적 영성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체의 변화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의 공적 영성은 그의 에큐메니칼 정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학생선교대회에서 감리교 선교사 후보생 아펜젤러를 만나 선교의 꿈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날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도착한 것은 물론 아펜젤러의 집에서 함께 재한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1885), 후에는 한반도 북부 지역을 함께 여행(1888)하기도 했습니다. 언더우드의 에큐메니컬 정신은 캐나다 장로교가 한반도 북부 지역 선교를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한 일과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선교사 모집을 위해서 일했던 것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전은 개인 구원만을 강조하는 구령주의가 아닌 한국의 기독교화(Christianize)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교회 설립과 개인 전도에 힘쓰는 동시에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의 정치, 경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물론, 교육, 문화, 출판 등의 여러 활동들을 왕성하게 참여함으로써 개신교를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매력 있는 종교로 소개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과 더불어 한국 사람들의 손으로 학교와 병원과 여러 기독교 사회단체들이 세워져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동시에 교육과 사회활동을 통해 한국을 정신적, 사회적, 제도적으로 기독교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한 수단으로만 학원, 의료 사업에 힘쓴 것이 아니라 진정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일들에 힘썼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한국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친척들마저 돌보기 어렵다고 버린 소년 김규식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고, 목숨을 걸고 콜레라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며, 또한 일본에 의한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고종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언더우드의 신앙은 한국 교회만이 아닌 한국 민족과 자신을 함께 가슴에 품는 공적 신앙이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비전 속에는 교회만이 아닌 크리스천 코리아(Christian Korea)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천 코리아는 그 지층이 되는 에너지를 교회에서 제공받되, 기독교인들이 각계각층에서 활동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내 눈앞에서 새로운 한국을 명약자명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새 한국은 악정과 무지와 미신의 굴레로부터 정치적, 정신적, 영적으로 완전히 해방된 그런 나라, 곧 크리스천 코리아입니다.” (언더우드)

이런 공적 영성의 신앙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고, 빠른 시일 내에 개신교가 한국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각인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복음화, 개인과 사회 성화 포함해야

언더우드의 사역에 비춰 볼 때, 우리는 한국의 복음화를 구령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화는 그 안에 개인만이 아닌 사회의 성화를 필수적으로 포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령화는 영지주의나 비규범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다분히 안고 있습니다. 구형화가 개인 전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회적 성화는 기독교의 가치를 사회제도와 기관에 나누고 심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국에 기독교 가정들과 기독교 마음들과 기독교 위정자들, 그리고 기독교 정부가 세워지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을 선한 영향력 안에 이끌고 갈 역량을 갖추고, 잘 훈련되어, 철저히 성별된 한국인들이 스스로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조직화된 교회를 그려봅니다. 이 교회는 하나 된 비분파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안에서는 감리교인, 장로교인, 성공회인, 유대인이나 헬라인,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노예나 자유인, 할례자나 무할례자의 구분을 뛰어넘은,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신 그런 교회입니다.” 

우리는 언더우드의 비전 속에서 교회가 사회의 여러 기관이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선한 영향력 속에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가정, 마을, 정치인, 정부 등)가 바로 성서적 가치위에 세워져 가는 것을 봅니다. 그를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립하며, 영적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교회, 훌륭한 사회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교회들이 분파적, 교단적 이해관계에 의해 자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단합된 모습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복음의 능력을 실증하는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기독교가 가진 초월성(또는 신비성)과 역사성의 조화라고 하는 최고의 장점들을 한국 사회에 잘 정리해서 성실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언더우드의 한국에 대한 비전은 그리스도를 머리고 모시고 하나 된 한국의 교회가 힘찬 강물이 되어 사회의 모든 부분을 복음의 영향력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의 여러 가지 사역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고, 계몽하며, 사람들의 삶에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초기 교회와 믿음의 선진들은 언더우드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고통과 아픔의 역사적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깨닫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의료 등의 모든 분야에서 공적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초창기 한국 개신교가 숫자적으로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역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오늘 한국 개신교가 그 초기 정신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그의 영혼 구원의 열정, 선교의 열정을 물려받았지만, 그의 공적 영성과 에큐메니컬 정신을 점차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작은 교파적 차이를 뛰어넘고, 또한 한국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한국인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모습을 실천했던, 그리고 사회변혁과 전도의 열정을 조화시켜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복음의 살아있는 위력을 보여 주었던 그의 신앙 패러다임을 우리는 오늘의 위기 속에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과 공적 영성

그렇다면 언더우드의 신앙의 패러다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언더우드의 신앙은 칼빈의 개혁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그가 태어난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적 신앙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요한 웨스리의 감리교신앙과, 또 영국의 침례교도 청교도들의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청교도 신앙은 철저한 하나님 주권 중심의 신앙과 신앙의 공적 차원을 강조하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당면하고 있는 정체성과 적합성의 문제를 해결할 많은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교도 신앙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 한국 개신교가 자기의 신학적 전통의 본류로 되돌아가는 일이 되는 동시에, 한국 사회 속에서 다시 영적, 도덕적 영향력과 리더십을 찾는데 여러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청교도 세계관의 중심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사상(The Sovereignty of God)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온 우주는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로 여겨졌고, 이 우주의 단 1센티미터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거나 그 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 세계 전체, 곧 세계와 역사와 사회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믿는 자들 안에서는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고, 믿지 않는 자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양심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주권주의는 정치권력이 하나님의 법(자연법)안에서 국가를 질서와 공의 속에서 움직여가도록 운영할 책임이 있으며, 신앙인들은 복음 전도만이 아니라 율법과 양심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률의 바탕에 기초하여 선과 공의의 기준을 사회 각 분야에 세우고 사회를 성화시켜갈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예정론에 대한 여러 비판적 논의를 다루기보다는 예정론이 갖는 정신적, 도덕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청교도들은 예정론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선택받는 자녀들은 세상의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는 신념과 동시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최종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철저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즉 예정론은 청교도들에게 어떤 인간제도나 권력도 해할 수 없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견고한 믿음의 정체성을 제공해주었고, 또 청교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믿는 바를 사회 속에서 실천해 갈 수 있는 영적 에너지를 부여했습니다. 예정론 안에서 청교도들은 역사와 삶에 대한 비관주의와 도피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능력에 대한 신뢰 속에서 사회 변혁을 향한 싸움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다른 기독교 종파들에 비해 창조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창조론의 강조는 성도와 불신자가 공유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도덕성의 강조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는 일반 계시, 자연법, 양심, 언약 등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는 청교도들의 성화론과 공적 신학의 기반이 되어 사회 내에서 비기독교인들과의 교류와 대화, 그리고 공공선을 위한 협조와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죄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억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제도적으로 강구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삼권분립제도도 청교도들의 죄론에 담겨있는 통찰과 지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인간의 죄성은 권력을 부패하게 만들므로 제도적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분리를 보장하여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청교도들의 인간의 죄성에 대한 깃은 자각은 내세주의 또는 비관주의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인간이 죄에 깊이 물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 악의 세력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절대신앙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구원과 예정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만, 성화와 개혁에 있어서는 인간의 능동성(자유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자발적 능동성이 바로 예정의 증거라고 이해했습니다. 즉 성화로 표현되지 않는 구원의 경험은 그 진실성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은혜 체험은 우리를 말씀과 계명에 대한 복종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화의 강조는 죄에 대한 경계와 극복뿐만 아니라 은혜에 대한 진정한 보답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의 모든 창조의 일체성은 청교들로 하여금 개인의 성화와 사회의 성화를 함께 강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천직사상 :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혁하는 제자도

천직이란 하나님께서 신앙인 각자에게 세상의 특정 직업의  영역에서 수행도록 맡겨주신 사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우리를 내세의 구원으로만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사명, 곧 천직으로 불러주신 것이며, 청교도들은 특히 천직의 효과적인 수행을 통해 자신들의 예정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청교도들에게 일이란 하나님의 창조계획의 한 부분으로써 아담으로 인한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성화와 공선을 성취해 나가는 하나님의 창조섭리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으며, 교회 밖에서 행하는 예배와 찬양의 행위이었고,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청교도들의 천직사상에서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변증법적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스스로를 선택된 존재로 믿을 만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누렸기에, 또한 하나님을 위해 힘껏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친밀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하나님 주권사상은 청교도들 다른 사적, 이기적, 봉건적, 가족 혈연적 관계로부터 해방시켜 더 큰 세계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청교도들은 소위 절제된 정열(weaned affections), 즉 직업적 소명을 통해 세상사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세상의 것과는 거리를 두는 삶을 통해 천직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주신 축복들을 바르게 사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인제사장론: 청교도 평신도 교육

청교도들은 신앙교육과 일반 상식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청교도 목사들은 근대적 의미의 첫 지성인들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목회자는 옥스포드나 캠브리지에서 공부했고, 미국의 하버드 대학도 원래 청교도 목사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예일대, 프린스턴대, 그리고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교육을 통한 사회 개량을 목적으로 여러 기독교 종교 집단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평신도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개인 성경공부, 대중교육, 대중 계몽운동을 주도하여 일반 민중이 모두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공공 정신, 공동선의 강조를 통해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 책임을 갖도록 했으며 나아가 전체 시민들의 복리와 도덕적 행위에 책임을 갖도록 했습니다. 또한 교육이 개인과 공동체 발전의 근간인 것을 깨달았고, 높은 도덕적 수준과 양심적 삶을 영위하도록 배웠고, 근검, 절약, 근면을 강조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만인제사장주의라는 개신교의 보도도 평신도 교육과 성경이해의 수준의 상승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알고, 깊은 영적 체험, 그리고 오랜 기독교 문화의 뿌리에 바탕을 둔 곳에서 만인제사장주의는 말만이 아닌 실제적인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언약사상 : 교회와 사회의 결사체

청교도들은 언약을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가장 두드러지는 방법으로 이해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청도들이 언약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일방적인 수혜관계로만 이해하지 않고, 상호적 관계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지지만, 구원 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점차 상호적인 관계로 전환되며 인간은 점차 하나님의 동역자 또는 동반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언약사상의 빛 아래서, 청교도들은 사람들이 일반계시와 이성과 양심을 사용하여 필요한 동의(언약)을 창출하고 또 이에 부합하는 사회 결사체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의 조직과 결사체는 언약적 공동체로서 혈연과 전통에 의해 구성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도덕적 존재들 간의 상호성을 존중하는 청교도의 언약사상은 교회와 국가, 가정과 기업과 같은 근대의 여러 사회 조직과 결사체들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회중교회, 정당, 컨퍼런스, 리그, 이사회 등의 여러 근대적 인간 동아리의 모습들은 바로 청교도들의 언약사상의 역사적 부산물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약도 바로 청교도들의 언약사상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청교도들을 통해 문화 속에 확산되어 사회적 습성이 된 것입니다.

위에서 본 청교도 신앙의 내용과 성공의 경험들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많은 도전과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물론 청교도의 성화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게 되면 신앙의 신비성보다는 교리나 행동규범,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성도 있습니다. 또 예전, 예술과 문화에 대해 좀 더 폭 넓은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특히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있어 반드시 보완과 확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겪고 있는 공적 영성의 결핍 (정체성, 교회 조직의 민주화, 시민사회와의 소통등)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청교도 신앙은 개신교에 매우 좋은 신학적 자료를 제시해 준다고 봅니다. 즉, 청교도들의 철저한 하나님 주권주의는 한국 개신교의 물신주의, 언약사상은 한국 개신교의 가족주의와, 사회 성와 천직(vocation)의 강조는 이분법적 사고와, 그리고 이성과 교육의 강조는 단순논리와의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런 면에서 청교도신앙은 한국 개신교가 겪고 있는 공적 영성의 빈곤에 대해 직접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실천하고자 했던 하나님나라의 내용과 사역은 오늘날 많은 의 식있는 한국 개신교인들이 열망하는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교회가 세상의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능력으로 훈련되고 무장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는 이상은 한국 개신교가 품어야 할 마땅한 이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한국의 기성사회에서 청교도적 소명과 천직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여러 봉건적인 전통들과 인습들 앞에서 좌절하거나 타협하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으로 한번 도전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청교도 신앙의 가치들을 가슴에 되새기며 우리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의 희망은 이런 청교도적인 정신과 결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학준 교수 / 뉴브런스윅신학교

* 이학준 교수가 출간한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에 나온 내용 중 일부를 필자가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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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othy 2011-11-12 11:59:52
You're the one with the brains here. I'm wtacihng for your posts.

Watch Dog 2011-09-02 02:42:52
아래의 광고는, 아무리 관대하게 생각하려 해도, 무지함이거나 무례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읍니다.
관리자의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관리자들이 있는 이유

기도 2011-08-17 07:50:50
청교도란 매우 광범위하고 불특정 다수의 집단에 대해 청교도의 신앙은 이렇다 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기 바랍니다. 미국 청교도의 전통은 한세대가 가기전에 세대간의 갈등으로 변질되었고 본인들도 실천하지 못한 온갖 배타적 사상과 정치적 파워 게임에서 극우적 여론 몰이로 건국 이전 부터 미국의 근원적 사회 문제와 가장 크게 부합된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300년이 지난 언더우드와 400년이 지난 한국교회의 개혁 사상으로 연결짓는 것은 역사적 착오라고 생각 됩니다. 청교도의 긍정적인 면을 그저 청교도 전통이 이렇다 하지 말고 주요 사상가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개인들의 사상을 연구 적용해야 될줄로 압니다.

atom 2011-08-16 10:10:16
그런데요, '공적 영성'을 강조한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기독교의 문제는 교회가 정부통제, 입법, 전쟁 등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공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점차 변질되었다는 것이 아닐지... 예수님이 그랬듯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밑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데서 벗어났다는 것... 결국은 온갖 세상의 일이란 일은 다 간섭하여 지배권력화된 청교도 주의... 미스터 부시가 이라크 전을 '성전'으로 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단 말이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