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다구니치는 곳에 예수가 있다
악다구니치는 곳에 예수가 있다
  • 김성회
  • 승인 2011.08.23 16:15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정 마을에도,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도 계시는 그 분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크레인. (출처 :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카페)
송강호 전도사가 강정마을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건설 업체와 대치하는 중에 쇠사슬로 자기 목을 메고 저항하고 있다. (출처 : 강정마을 카페)
문정현 신부가 마을 주민,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출처 : 문정현 신부 페이스북)

 
 
풍경 1

세상이 시끄럽다. 부산에서는 크레인 꼭대기에 한 노동자가 매달려 200일이 넘게 고공 농성 중이다. 8월의 부산, 그 부산의 바닷가, 작렬하는 태양 아래 쇳덩이 크레인이 사람 살 환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소위 "희망버스"라는 것을 타고 부산 크레인 꼭대기의 그 노동자를 만나러 갔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목소리에 모두 눈물을 흘린다.

풍경 2

바닷바람이 시원한 제주도 강정 마을 어귀. 문정현 신부가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하루하루 소식을 스마트폰을 통해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세상에 알린다." 8. 15, 일장기 대신 성조기! 해방? 강정마을의 참사 임박! 자주를 위한 몸부림, 작은 한 몸 촛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초긴장의 새날을 맞습니다.", "미친 공권력-해군 경찰! 수해복구는 못할망정 병력을 끌고 들어와? 젖 먹던 힘을 다 쓰신 강동균 마을 회장님이 걱정. 그래도 미사를 봉헌했어요."

문정현 신부의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송강호 전도사가 해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업체의 철거에 저항하며 비닐하우스 철골 구조에 목을 메고 있다. 그 아래 성공회 김경일 신부가 떨어지면 안 된다며 다리를 붙잡고 있다.  (관련 기사)

풍경 3

존 디어 신부가 네바다 주 크리치 공군 기지에서 반전 시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 존 디어 신부는 반핵, 반전 시위로 75차례 연행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존 디어 신부는 왜 네바다 주로 뛰어가 연행됐던 것일까?

   
 
  ▲ 존 디어 신부. ⓒ미주뉴스앤조이  
 
"이제 앞으로의 전쟁은 무인폭격기가 맡게 될 것이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이미 실전 투입된 이 비행기는 조종사가 없다. 기지에서 모니터를 보고 폭격을 하는 것이다. 벌써 수백의 무고한 시민들이 살해됐다. 이런 비행기가 드디어 미국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하기 위해 네바다로 간 것이다. 이런 무인 폭격기는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아이들에게 폭격하지 말라고 외쳤다." (존 디어 신부, 잔 에이미와 인터뷰 중)

존 디어 신부는 앞으로 법정에서 이 문제를 알리며 다투겠다고 했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감옥행도 불사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소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세상을 돈다.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읽고 흠칫 놀란 아무개 집사의 눈에는 세상이 너무나 살벌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옵고, 다만 좌익분자들이 난동치 못하게 하시옵고, 결정적으로는 우리 가족만은 지켜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자리를 떠도 아무개 집사의 기분은 상쾌해 지질 않는다.

나에게만 계셨으면 하는 주님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왜 저런 살벌한 풍경 한 가운데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들어있는 것일까? 노사가 상생하면 될 터인데 왜 저 노동자는 양 귀를 틀어막은 채 크레인 꼭대기에서 "진압하려고 하면 몸을 던지겠다"며 악다구니를 치고 있는 걸까. 자주 국방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치로 구상한 제주도의 해군 기지를 왜 마을 사람들은 찬반 두 패로 갈려있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평화를 이야기할까. 신부면 기도나 할 노릇이지 왜 국방을 담당하는 공군 기지에까지 몰려가 시위를 하는 것일까.

한인 교회에서 사회 참여는 언제나 찬반양론을 불러오는 주제다. 안타깝게도 이 논쟁의 도식에는 "사회 참여하는 기독교인은 복음적이지 않고, 복음적인 기독교인은 남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1970~80년 대만 해도 독재에 저항하며 선명한 목소리를 내는 교회들이 있었다. 그 때도 다른 한 편에서는 조용기 목사류의 부흥사들이 엄청난 기세로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둘 다 기독교였고 둘 다 복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공존해 갔다.

리영희 교수의 책 제목처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균형감을 상실한 채 사회정의만 주장할 뿐 복음을 모른 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다양성을 상실하는 순간이다.

   
 
  ▲ 생명, 인권, 평화를 위한 여의도 사제단 미사. (출처 : 문정현 신부 페이스북)  
 
애꿎은 천주교를 논쟁으로 불러와 보자. 천주교에는 소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소수이지만 결기 있는 모양새로 사회정의 구현에 앞장선다. 밀려오는 경찰 버스 아래 드러눕고, 대한민국의 왕중왕이라는 삼성에 저항하며, 빨갱이 소리에 아랑곳 안하고 북한에 들어갔다 판문점에서 잡혀가기도 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문화

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입장이 과연 천주교 전체의 입장일까? 절대라고까지는 못해도 거의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 내부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이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다. 보수적인 신앙의 기조는 가져가되 다른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조직을 운영해온 경륜이 만들어내는 지혜라고나 할까.

이로 인해 천주교는 젊은 사람들에게 "개방적이고 개혁적이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모두가 한 방향은 아니지만 다양성을 존중한 결과다.

실정법을 어겨 75차례나 연행된 존 디어 신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공회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지난 2010년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1984년에 이미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다.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수직적 구조가 없다. 의견 개진은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일부 목회자들의 의견이 개신교 전체의 의견인 양 전해진다. 김홍도 목사는 "등록금 자살 16명, 많은 거 아니다"고 일갈하고 조용기 목사는 '장로들이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해서 친북적인 것을 무조건 환영해선 안 된다'고 해버린다. 용산구 서빙고동의 온누리교회 이름으로 '투표를 하지 않으면 학교에 동성애자가 급증한다'는 등의 문자 메시지가 교인들에게 뿌려진다. 김홍도, 김선도, 조용기 목사 셋만 합쳐도 교인이 100만 명이니 개신교 상당부분의 여론이 저렇다고 불신자들이 조롱해도 할 말이 없다.

모든 목회자가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건설반대 운동에 찬성할 수는 없겠지만 동의하는 사람 몇이 있다고 기독교가 뒤집힐 사건은 아니지 않은가.

맹모도 삼천지교인데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인간 세상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을 당시를 묵상해본다.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 외아들을 피조물들의 공간, 노동과 땀과 피눈물이 얽혀있고 배신과 협잡이 난무하며 나만 알고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보내기로 정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것도 귀한 왕가의 왕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하루하루 땀 흘려 노동하지 않으면 다음 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집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밑바닥으로 독생자를 보내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여기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교회가 가 있어야 하는 곳은 어디가 될까? 이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들과 악다구니치고 돕고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일부라도 하도록 그냥 두긴 해야 하지 않나. 언제까지 용공, 빨갱이 논쟁에 묶여 예수가 당연히 가 있을법한 무산자(無産者)들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교회에서 예수님 붙들고 "나와 내 가족에게 복을 주시옵소서"만 하고 있을 것인가.

이재철 목사는 신학생멘토링컨퍼런스에서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것을 성취시켜 주기 위해 내 옆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어딘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 유리한 것에 가있지 않고 모두에게, 다른 사람에게 유리한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공동의 이익을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되라고 호소했다.

기독교인들은 베푸는 일에 익숙하다. 가난한 사람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학교를 지어'준다'. 정녕 우리에게 베풀 자격이 있는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만이 조건 없이 베푸는 일이 가능하시다. 모든 것을 항상 가지고 싶어 하는, 항상 부족한 인간에게 베풂은 불가능하다.

적선이 아니라 나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나눔이다. 내가 가진 것을 쪼개어 나누면 상대방도 자신이 가진 것을 쪼개어 나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통해 배우고 가난한 사람과 함께 인생을 '나누며' 그와 함께 신앙도 자란다. 애당초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적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고 되돌려 주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자들의 나눔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함석헌 선생은 "물 아래서 올라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얻어먹게 되면 얻어도 먹지. 본래 내 것 네 것이 없는 것인데 제도라는 협잡을 해 가지고 슬쩍 모르게 도둑질을 해서 모은 것이 부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구석에서 얻어먹는 놈은 생기도록 된 것이다. … 해야 할 것은 구제가 아니고 내 가진 것을 팔아다 내놓음이다. 그러므로 얻어먹을 때는 얼굴을 버쩍 들어서 주는 자가 죄를 진 생각이 날 만큼 해야 한다. 미운 생각에 그리하란 말이 아니다. 거지 얼굴을 들기가 얼마나 거북하리오만 내가 십자가를 진 줄 알고 들어서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죄를 회개하도록 맘을 일으켜주란 말이다."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 모자를 눌러 쓰고 쇠사슬에 목을 메고 있던 사내, 송강호 박사 혹은 목사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전도사의 순박한 미소. (사진 제공 이주빈 기자)  
 
목에 쇠사슬을 걸고 땅 끝에 몰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송강호 전도사에게 과연 기독교 공동체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까. 송강호 전도사는 "물이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끝까지 흘러내리듯 가장 열악하고 심각한 현장에 찾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자연스런 결정이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중동의 가장 열악한 동네에 보내 키우셨던 결정을 직시하자. 준비가 됐다면 삶의 바닥에서 악다구니치는 사람들과 함께 악다구니치자. 악다구니치기 힘들면 나누자. 나누기가 힘들면 그들을 격려하자. 격려도 힘들다면 그저 다양한 기독교인이 있겠거니 그 존재라도 인정하는 기독교인이 되자.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백할 자리에 내 생각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을 밀어 넣지는 말자.

나치 치하에서 온 가족을 수용소에서 잃은 엘리 위젤은 그의 자전적 소설 <흑야>를 통해 하나님 계신 곳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제물 세 사람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의 목은 똑같은 순간에 올가미에 끼워졌다. '자유 만세!' 어른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그는 어디에 있는가?' 내 뒤에서 어느 누가 물음을 던졌다.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있자, 세 의자가 쓰러졌다.  … 그러나 세 번째 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아이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반 시간 이상이나 거기에 그대로 두어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버둥거렸고, 우리의 눈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서서히 당하면서 죽어갔다.  …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또 물음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그에게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 (엘리 위젤, <흑야>. 출처 : 대한성서공회)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 강정 마을에만, 한진중공업 크레인에만 안 계실 리 없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Man 2011-08-29 13:47:23
옳고 그름을 떠나 국가라는 테두리를 인정하고 국가가 만든 제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유지해 가는 법을 인정한다면 최소한 법과 절차 그리고 질서에 대한 고려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강정마을에 대한 문제는 정부와 국민 사이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의 가장 큰 문제는 안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식의 미성숙이라고 본다.

한국의 기독교도 그런 면에서 아직은...

smokybear 2011-08-26 06:47:47
공감이 많이 가는 글입니다.

아톰 2011-08-25 13:25:47
문익환 목사님은 정치꾼이라는 오명, 빨갱이라는 누명, 노망한 망상가라는 힐난을 뒤집어 쓰면서도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인간 대접을 외치던 방직공장 여공들 앞에, 전쟁터를 방불케하던 시위 현장에, 자신을 불태워 버린 주검앞에 우뚝 서 계셨더랬지요... 이게 바로 본회퍼가 말하던 '세속적 거룩(Worldly Holiness)'이었던 것을...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세속적 거룩의 맛을 모르는거 같아요.

기독교인이 신앙영역이 종교적 영역이 아닌, '삶의 와중에서의 초월'에 관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본회퍼가 그립고, 한국땅에서 이를 즐겁게 실천하다 가신 문익환 목사님이 더욱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정말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정말 진정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세속적 삶에로의 적극적인 자기툿하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