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박사가 말하는 원수 이기는 우아한 패배
한완상 박사가 말하는 원수 이기는 우아한 패배
  • 한완상
  • 승인 2014.03.19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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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교회 27주년 창립 기념 예배(마 5:43~45, 요 18:36)

   
 
  ▲ "세계에서 가장 억울하게 분단 고통, 열전 고통, 그리고 냉전 고통을 모두 겪은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가장 비정상적 고통을 70년간 겪었기에, 이것을 아름답게 정상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가 우리 민족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미주뉴스앤조이 자료사진)  
 
"내 삶은 바로 내 메시지다"라는 글귀는 남아공에 세워진 간디 동상에 새겨져 있는 장엄한 가치 선언입니다. 치열하게 살았던 간디의 삶 자체가 인류에게 던져 주는 감동적 메시지였습니다. 내 삶이 바로 '진리의 등불'이 된다고 선언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훌륭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킹 목사도 그렇게 살았지요. 그가 죽기 얼마 전, TV에 출연하여 길고 가늘게 사는 것보다 짧고 굵게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감탄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당당한 모습이 지금도 저의 기억에 살아서 별빛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예수만큼 일생을 의미 있게, 짧고 굵게 사신 분이 과연 있을까요? 아니, 그처럼 감동적인 죽음을 죽은 분이 있을까요? 그의 짧은 공생애 기간, 그의 입에서, 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많은 말씀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놀랍고 전복적이었지만, 그의 치열한 '삶'이야말로 그의 말씀과 가르침의 감동을 훨씬 더 뛰어넘는 실천의 감동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갈릴리 예수 곧 역사의 예수를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역사 탐구에 머물 수 없습니다. 역사 예수 탐구는 그의 치열했던 삶의 굽이굽이에서 드러나는 감동의 메시지를 탐구하고, 만나고, 체험하는 뜻 깊은 순례라 하겠습니다.

최근 저는 어느 기독교 TV와의 인터뷰에서 "평생 나를 붙들고 있는 메시지, 곧 성서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먼저 저는 저희 집 가훈을 소개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자란 저에게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15:16~19)"라는 가훈이 저의 삶을 이끌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고향 땅에 묻혀있는 부모님 묘소 비석에는 이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메시지는 저에게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으로 압박해 온 슬픈 현실이었고, 주변 상황은 감사하기 어려운 괴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란 또한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저는 감옥에서 유서처럼 진지하게 썼던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이 저에게는 큰 깨달음과 용기를 줍니다. 저를 사로잡고 있지요.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결코 추상적인, 철학적인 명상이나 사색에서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언제 참수 당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참으로 느긋하고 여유 있고 실체적인 메시지를 빌립보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여기 유익하다는 말은, 장사꾼이 사업에서 얻은 경제적 이득을 뜻하는 실제적인 결과를 뜻합니다.

그러니, 죽는 것이 실제로 이득이 된다는 고백이지요. 그러기에, 몸에 구체적으로 와 닿는 절실한 메시지입니다. 정말 죽음을 그가 예감했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에게는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모두 값진 일이었습니다. 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라면, 한참 고민해야 할 판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어떤 환경에서나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아하, 잘 죽을 수 있고, 뜻 깊게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멋지고 신 나게 살 수 있구나"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지요. 그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한국형 사자 굴에 갇혀 고생했을 때, 저는 바울의 이 메시지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저를 끈질기게 사로잡고 있는 화두는 단연코 '원수 사랑'입니다. 이 메시지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정상적으로 비정하게 분단된 우리 민족의 슬픈 현실에서 가슴 저리게 저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아프게 옥죄어 온 분단, 열전, 냉전의 70년(내년에는 70년이 되지요)을 겪으면서 저는 갈릴리 예수께서 간곡하게 당부하셨던 원수 사랑의 명령이 더욱더 강렬하게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로 36년간 부당하고 아프게 살았던 저의 민족이 이른 바 해방(1945년 8월 15일)을 맞았지만, 진정한 민족 해방과 광복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다고 판단하기에 그러합니다.

해방되기 전 이미 국토는 분단되었고, 분단된 지 5년 만에 우리 민족은 잔인하게 동족상잔에 휩쓸렸습니다. 3년간 수백만이 죽었지요. 그리고 혹독한 냉전 상태에 돌입한 지 벌써 61년이 되었습니다. 이 긴 기간에 우리는 동족을 주적으로, 사탄으로 증오해 왔습니다. 정말 한심하게도, 이 일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왔지요. 전범국 일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을 너무나 부당하게 우리 민족이 받게 되었지요. 그 결과, 우리 민족은 분단과 냉전을 지금도 치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을 36년간 강점하여 억압, 수탈, 차별했던 일본과는 놀랍게도 20년 만에 화해했습니다. 6·25를 배후에서 부추겼다는 소련과도 38년 만에 화해, 수교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서로 총 겨누며 싸웠던 중국과도 39년 만에 국교 정상화했습니다. 모두 잘한 일이지요. 지금은 중국과의 경제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두터워졌지요. 과거 적이었던 일본, 러시아, 중국과 모두 수교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유독 같은 민족인 북한과는 아직도 철천지원수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북한을 악마 같은 주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을 고통스럽게 했던 외세들보다 같은 동족을 더욱더 주적으로 증오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이며 바람직한 짓인지를 이제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저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국민 다수가 이 같은 부당한 분단 현실에서 아파하지 않는다는 현실입니다. 정말 저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예수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한국 기독교인들, 그 지도자들이 같은 동족을 주적으로, 사탄으로 몰아 부치는 일에 더욱 열을 내며 앞장선다는 비극적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의 이러한 냉전 근본주의 신앙이 참된 민족 광복과 해방이라는 종말론적 희망을 휴지 조각처럼 내던져 버리는 이유가 됨을 깨달으며 끝없이 저는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 사랑 실천이야말로 기독교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본질이 바로 원수 사랑 실천에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원수 사랑이란, 단순히 가장 높은 도덕적 수준의 행위를 뜻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배를 이 땅에서 일궈 내는 비결임을, 열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비정하게 오랫동안 분단된 우리 민족 현실에서 원수 사랑 실천이야말로 바로 이 비극의 땅에 하나님의 사랑 지배, 공의 지배, 그리고 평화 지배를 일궈 내는 동력임을 예수 따르미들은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7년 전, 이곳에 새길 공동체가 시작된 것은 바로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한 지부를 분단 현실에서 세우려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남북 간의 원수 관계가 악화될수록 각 체제 안에서 자유와 정의, 인권과 민권은 심각하게 훼손되는 현실을 아파하며, 그 비극의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원수 사랑의 가치, 그 메시지를 냉소적으로 인식하고 원수 사랑 실천을 거부하면서 기독교 신자로 자처하는 것은 가장 가증스러운 위선이라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 예수님이 친히 말씀한 진정한 메시지임을 새삼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그 말씀을 역사의 예수께서 철저하게 몸소 실천하셨음을 호소하듯 강조하고 싶습니다.

역사 예수 탐구에서 성서에 나오는 특정 예수 어록이 진정 예수의 말씀인지를 가려 주는 기준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간 학자들의 논의가 분분했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합니다. 특히, 가톨릭 신학자 마이어(John P. Meier)는 '차이 기준(criteria of dissimilarity)'으로 원수사랑 어록은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설득력 있게 주석했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특이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유대교 전통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원수 사랑이 제자들과 청중들이 당시 숙지하고 있던 유대교 가르침과는 대조적인 메시지임을 단번에 알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고 말하는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3~44)."

원수 사랑 메시지는 이웃 사랑 메시지와 달리 구약이나 고대 다른 문명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마이어는 주석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이웃끼리 원수 갚은 일을 하지 말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레 19:18). 한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족적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이지요.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어법은 단호했습니다. 그 단호함은 메시지가 갖는 대안성에서 잘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은 근본적, 본질적, 대안성과 차이를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바로 그의 아빠(Abba)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결코 부족적 신, 배타적 신일 수 없는 사랑의 아빠 같은 신 곧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신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은 독특한 존재였지요. 마태복음 5:45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위의 말씀에는 두 가지 소중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 사랑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딸과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요, 진리입니다. 율법, 교리, 신조 따위를 믿는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원수 사랑 실천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하나님을 아빠로 모실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마 5:9)"는 메시지와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Peace-maker)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지요. 이 축복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결국 '원수 사랑'과 '평화 만들기'는 같은 것입니다. 원수 사랑 하지 않고 참된 평화를 만들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겨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적 현실에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딸과 아들이 되려면, 무엇보다 원수 사랑에 앞장서서 평화 세우기에 헌신해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같은 사랑의 아빠 하나님이야말로 결코 부족적, 배타적 신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선적 신, 복수의 신, 폭력 심판의 신이 아님을 우리는 새삼 다짐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예수의 하나님은 당시 로마 황제의 노골적인 벌거벗은 권력의 신(Roman’s naked might)이 아니라, 무한히 보듬어 주고 껴안아 주는 예수의 아빠 신(Jesus naked love)이지요. 여기서 '아빠'는 생물학적 성별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 특성으로 보면, 오히려 엄마 자궁과 같은 따뜻한 신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과격한' 메시지가 당시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특히 안으로는 헤롯 왕 지배에 항거하려 했고, 위선적 예루살렘 성전 세력에 맞서려 했으며, 밖으로는 로마제국의 승리주의 폭력에 저항하려 했던 열혈 민족 세력에게는 예수님의 이 메시지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예수 제자 중, 젤롯 당원이었던 시몬이나, 비록 당원은 아니었더라도 그 저항 노선에 동조했던 제자들은 스승의 원수 사랑 메시지를 과연 적극 수용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그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봅니다. 그것은 한국의 1970년대의 그 비정했던 유신 통치라는 역사 현실에서 우러나온 저의 추론이었습니다.

1976년 서울대학교에서 해직된 후, 저는 들판으로 내쫓겼습니다. 재야에서 민주화 인권, 평화 운동을 하면서 마침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CCPD라는 개발참여 위원회였습니다. 1년에 서너 번 위원회의 회의가 열리는데 거의 6~7년간 두 번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정치의 통제가 심했습니다. 1977년이든가,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열린 위원회 회의에 가까스로 참여할 수 있었지요. 그 회의 폐회 예배 때 저 보고 메시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때, 저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나오는 말씀 중에, "…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눅 10:35)"를 중심으로 증언했습니다. 짐작컨대, 장사꾼이었다고 짐작되는 이 사마리아인이 처참하게 폭력으로 짓밟힌 유대인의 참상을 보고 끓어오르는 의분을 참지 못해 그는 장사를 일단 접어 두고 악행자를 징벌하는 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군사독재 시대 그 엄혹한 상황에서 저는 사마리아인의 심경을 그렇게 해석했지요. 젤롯당식 적극 저항 운동에 몸을 던졌을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그 싸움을 일단 끝낸 후 돌아와서 사마리아인은 돌봄의 헌신을 완결시키겠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했지요. 그때, 듣는 이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 저는 온갖 기본권, 유신 체제 아래서 아프게 유린당하고 있는 처절한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였기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돌봄만으로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신 체제를 착한 돌봄의 행동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고 속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원수 같은 군사 통치는 착한 사랑 행위로는 극복될 수 없다고 비관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그 깊은 진리의 힘, 곧 원수 사랑 실천만이 원수의 악을 제거할 수 있는 참힘임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수난의 깊은 뜻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저의 역사 체험에서 예수 제자들 중에도 스승의 원수 사랑 메시지에 불편해했던 제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했지요. 특히 가롯 유다가 그러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제자들의 낌새를 모르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산 위에서(또는 들 위에서) 원수 사랑만이 원수를 사라지게 한다고 역설했는데도, 제자들의 몰이해(沒理解)에 안타까움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수 사랑 메시지의 깊은 뜻을 보다 뚜렷하게 밝혀 주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창안해 내신 것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함의 속에는 여러 층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저는 예수님 가르침의 '과격성' 또는 '과격한 대안성'에 새삼 주목하고 싶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더러운 인종이요, 원수 같은 집단인 사마리아인을 착한 존재로 설정한 예수의 발상이 놀랍습니다. 절대로 착할 수 없는 종자를 착한 집단으로 부각시킨 예수님의 마음이 놀랍습니다.

게다가 진짜 착한 분들이라고 유대인들이 믿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를 결단코 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선적인 지도자임을 밝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신랄한 권력 비판이지요. 게다가 이 비유에서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희생자 유대인을 먼저 사랑한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지요. 원수가 먼저 사랑을 실천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지요. 무엇보다 이와 같은 원수 사랑을 통해서 낡은 원수 관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 곧 평화와 공의의 관계가 나타난다는 것을 이 비유는 깨우쳐 줍니다.

문제는, 사랑의 실천만이 모든 적대 관계를 근원적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진리를 이 비유가 증언해 줍니다. 종교 지도자의 지도력 곧 거룩한 이념으로 포장된 지도력으로는 결코 평화와 공의의 새 질서가 세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소중합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오늘 한국교회에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많은데, 착한 '쌍놈', 선한 '잡놈'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참평화가 없고, 교회 밖에서도 비정한 냉전 대결을 극복하려는 평화 일꾼, 원수 사랑 일꾼들도 별로 없는 듯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 증거의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원수 사랑 메시지를 어떻게 실천하셨는지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이 곧 실천이었고, 그 실천의 강도는 항상 말과 표현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 자체가 감동적 메시지가 되었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을 저는 성육신 신학의 관점도 존중하지만, 예수님의 말과 실천의 성실함과 치열함에도 주목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곧 아프게 육화(肉化)된 예수님의 실천 모습에 대한 증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먼저 겟세마네 기도의 의미를 성찰하고 싶습니다. 이 기도는 결코 조용한 여유 있는 초월적 명상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이거나 관념적 추상적 성찰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땀이 피처럼 흐르고, 피가 땀처럼 피어오르는 처절한 몸부림의 호소였습니다. 이원론적 플라톤의 철학적 성찰에서 나온 영혼적 명상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를 다소 어지럽게 했던 가현설(Docetism)적 존재의 '여유'있는 기도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적 명상일 수도 없었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 기도는 임박한 로마 권력의 폭력적 통제를 온 존재로 긴박하게 느끼며 아빠(Abba)에게 매달렸던 결사적인 기도였습니다. 얼마 전, 예루살렘으로 나귀타고 입성하시어 예루살렘 권력자들을 불안케 했던 예수께서 성전에서 권력과 짜고 환전 놀음을 하던 이들을 숙정했던 일로 인해 이제 예수는 긴급 체포의 대상이 된 것이지요. 이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격적인 호소를 토해 낸 것입니다. 아빠 하나님께 말입니다.

여기서는 비신화론적 성서 해석으로 역사 예수 탐구를 상당 기간 종식시키는 데 공헌했던 불트만(Rudolf Bultmann)을 비판하면서 그의 제자 케제만(E. Käsemann)이 역사 탐구의 길을 다시 열게 된 동기를 저는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히틀러가 등장하여 인류를 위협하고, 독일 중산층 지식인들을 거짓 정치 이념으로 몰아가는 가슴 아픈 역사 현실 한 가운데서 그의 스승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대응, 특히 예수를 탈역사화하는 비신화 방법론을 그는 가현설적 접근으로 비판했던 것을 저는 우리 상황에서 더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로마의 폭력적 통제 곧 십자가 처형은 인간 예수에게 너무나 무섭고 가혹한 아픔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이 잔을 피해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기도의 참뜻은 예수가 아빠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는 결단을 내린 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의 벌거벗은 폭력적 권력에 또 다른 폭력으로 맞서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그 폭력에 의해 부당하게 죽어 줌으로써 그 폭력의 악을 이겨 내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주선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왔던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히틀러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조국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예수님의 이러한 선택에서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권력의 악과 예루살렘 성전 권력의 악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원수 같은 그 벌거벗은 권력을 사랑으로 극복해 내는 길을 짐짓 선택하신 것, 이와 같은 결단은 결코 조용한 종교적 명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 탐욕적, 독선적 권력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당했던 많은 민중들의 아픔과 동고하고 종말론적 열망을 그들과 나누면서 그 아픔을 근원적으로 덜어 주려는 역사적 결단과 실천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그렇게 처형했던 사람들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철저한 자기 비움 곧 자기 지움의 실천, 바로 그것이 원수 사랑을 통한 악의 극복 해위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따르미들이 선택해야 할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 같은 원수 사랑 실천의 모습이 갖는 변혁의 힘은 엄청납니다.

그러기에, 사형 집행관 로마 장교 백부장의 가슴을 녹여 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참다운 신성을 로마 황제에서 찾지 않고, 처형당하는 갈릴리 예수에서 찾게 되었음을 용기 있게 고백하게 했습니다. 로마의 공식적 권력이 사형수 예수 앞에서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원수 사랑의 놀라운 힘이요, 감동적인 변혁의 힘입니다.

저는 예수 수난 이야기에서 원수 사랑으로 펼쳐질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로마제국의 폭력적 승리주의 왕국과 어떻게 다른지를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피고인 예수에게 재판장인 로마 총독은 이렇게 심문했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의 왕이요?(요 18:36)"

피고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하기야 이 예수의 이 증인이 하나님나라를 지난 1500년간 왜곡시키는 데 오용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마치 하나님나라는 초월적인 정신세계에 속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고도 했지요. 이것은 부패한 정치권력과 경제, 사회 권력이 정당한 예언자적 비판을 무효화시키거나 오히려 비난하기 위하여 짐짓 강조한 탈정치적, 탈역사적 천국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재판 증언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수 사랑으로 세워지는 하나님나라, 무력(제도적 폭력)으로 싸워 일궈 내는 질서가 아님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철저한 비폭력, 아니 철저한 자기 비움과 자기 지움 곧 우아한 패배를 통해 세워지는 새 질서,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칼을 빼어든 베드로를 나무라시고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신 것도 무력 사용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원수의 악한 힘과 악한 방법으로는 결코 원수를 이겨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수 속의 악을 더욱 발악시켜 준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나아가, 원수 속의 악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악까지 발동 걸게 하여 발악하게 만든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철저하게 비폭력 사랑으로 원수에 대응하신 것은, 예수 혼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객관적 사실로도 증명된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제자 중 단 한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폭력적 내란 음모나 내란 행위 곧 집단적 무력 투쟁을 조직화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 한 사람도 폭력적 저항자가 되지 않게 조처하신 셈이지요. 당신 혼자 그 끔찍한 극형을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 아니오"라는 예수의 선언은 철저한 자기 비움의 실천 곧 원수 사랑으로 새 질서를 세우겠다는 선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힘으로 선한 백성들을 위협하는 역사 현실에서 천당 같은 초월적 왕국을 앞세워 신도들을 오도하게 되면, 원수 속의 악의 힘은 더욱 안심하고 커질 수 있음에 항상 유의해야 합니다. 피안적 신앙, 초월적 천국에만 매달리게 하는 신앙은 역사적 악을 방치, 방관하는 잘못된 종교 이데올로기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신앙이 한반도를 이토록 오래 아프게 하는 우리 민족 현실에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없게 한다고 염려해 왔습니다. 기우일까요?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원래 소금이나 빛은 자기의 본질적 특성을 비워 내지 않으면 그 구실을 담당하지 못합니다. 소금의 맛은 원래 남의 것을 맛나게 해 주고 썩지 않게 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소금이 자기 맛을 비워 내지 않고서는 소금의 공익적 기능은 나타나지 않지요. 빛도 마찬가지지요. 어둠을 내쫓기 위해 자기 빛을 밖으로 쏟아 내야 합니다. 자기 빛을 모두 쏟아 내어 어둠을 몰아내야 그것이 진짜 빛나는 빛이지요. 해가 모든 사람을 비춰 주는 원리도 이타적 자기 비움의 원리이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지기의 실천에서 너무 강렬하게 드러나는 진리가 아닙니까! 바로 이 같은 비워 냄의 공공적 감동,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분단을 빙자해 안으로 정치 기득권을 공고하게 다져 온 정치권력이 민족 분단을 구실 삼아 온갖 무력 충돌을 남북 간에 부추기고 있는 오늘의 비극 상황에서 예수 따르미들은 자기 비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원수 사랑 실천으로 샬롬의 새 질서를 아름답고 굳건하게 세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런 치열한 실천을 통해서만 아름답게 세워진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이원화된 하나님나라 신앙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개인화 시키고, 사사화(私事化) 시키며 탈역사화 시키면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건설이 주는 실천적 감동, 그 공공적 가치, 그 변혁적 효험을 모두 증발시켰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몇 년 전 세계적 성서 신학자 두 분의 부활 논쟁에서 깨달았던 배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정말 복음의 공공성,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을 살려 분단 비극 70년을 종식시키는 일에 복음적 동력으로 삼고 싶습니다. 두 분 모두 역사 예수 탐구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들입니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슈바이처가 지적한 철저한 회의론(Thoroughgoing skepticism)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고, 라이트(N. T. Wright)는 철저한 종말론(Thoroughgoing eschatology)의 대표 학자라고 하겠습니다. 두 분의 역사 예수 이해는 서로 다르지만, 복음서의 부활 사건 해석이 유대 종말론에서 변이(mutation)된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물론 변이 과정과 그 내용 그리고 변이의 특정 현실에 대한 이해는 각기 다르지만, 변이된 것에는 일단 동의합니다. 그런데 크로산이 강조하는 특이한 변이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 실천을 독려하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예수 부활에서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보는 반면, 크로산은 부활 이전 이미 갈릴리에서부터 하나님나라는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크로산도 예수 부활 사건으로 하나님나라가 새롭게 변이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본 라이트의 입장을 인정합니다. 다만 예수 부활 시점에서 그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 사이에 예수 따르미들 또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크로산의 해석과 제안이 흥미롭습니다.

라이트 교수도 그의 흥미로운 제안에 흥미를 표했습니다. 크로산에 따르면, 그 나라가 완성되는 때까지 교회가 수동적인 기도와 개인적 경건한 수양이나 수행의 삶으로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활 예수의 영성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굳게 손잡고 그와 함께 그 나라 건설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인 협동적 종말 실천(collaborative eschaton)입니다. 유대 종말론 신앙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종말적 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자세를 요청하지만, 이제 21세기에는 우리들(교회와 예수 따르미들)이 부활 예수(그리스도)와 손잡고 적극 그 나라 펼침에 나서기를 하나님께서 오히려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비정하게, 비정상적으로 오랫동안 동족끼리 피 튀기는 싸움을 해 온 민족 구성원으로 교회는 이제 진정한 평화를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내년에는 분단, 냉전의 70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기간 동안 진정한 민족 해방과 광복은 없었습니다. 바로 이 일에 예수 따르미들, 특히 한국교회는 복음의 실천적 선도자로 나서서 민족 해방과 광복의 기쁨을 온 민족이 나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복음의 부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기에 부활의 그리스도 힘을 힘입어 주님과 손에 손 잡고 원수 사랑 실천에 앞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인 합동의 힘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분단 비극의 조국에 우뚝 세워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한국교회에게 주어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억울하게 분단 고통, 열전 고통, 그리고 냉전 고통을 모두 겪은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가장 비정상적 고통을 70년간 겪었기에, 이것을 아름답게 정상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가 우리 민족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한국 교회에게 원수 사랑 실천으로 불러 주셨고, 지금 이 순간도 부르고 계시다는 신앙입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 부르심에 호응하여 북한 동포가 주리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고, 그들이 목마르게 되면 마실 것을 시원하게 주며, 그들이 헐벗을 때 따뜻하게 입을 것을 주저 없이 주는 일에 앞장선다면, 한반도의 냉전 빙벽은 녹아내릴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의 햇빛이 부분적이나마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남북 간에 강물처럼 흐르는 평화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때 한국교회와 예수 따르미들은 예수 복음의 그 공공적 가치와 그 감동적 변혁 효과를 모든 민족 구성원들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 복음화일 것입니다. 신자 개인과 교회는 다같이 세상과 역사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될 것입니다. 남북 간의 원수 관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예수 따르미의 삶은 바로 감동적 복음의 메시지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간디 동상에 새겨진 글귀인 "My life is my message"라는 선언이 마침내 우리들의 선언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선언으로 우리들은 우리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언을 사랑의 주님께서 박수로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형식적 해방과 껍데기 광복만 70년간 기념해 온 우리 민족이 이제는 참된 해방과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한국교회와 한국 예수 따르미들은 원수 사랑을 결연하게 실천해 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인 동시에 또한 특권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을 열쇠 삼아 분단을 극복한 평화 체제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냉전 체제가 사라지는 날, 비로소 세계적 냉전 체제는 완벽하게 종식될 것입니다. 그리고 70년 만에 우리 민족도 광복과 해방의 잔치 기쁨을 다 같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손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수 사랑 실천의 열쇠로 새 하늘 새 땅의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한완상 / 전 교육부총리, 대한적십자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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