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숨겨진 추한 기억들
아름다움에 숨겨진 추한 기억들
  • 김기대
  • 승인 2014.10.17 11: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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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박스], 한경직 목사는 왜 그리 빨리 월남했나?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복음주의 클럽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한경직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같은 해 10월 월남했다. 그해 12월 김재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천리교 건물에서 베다니 교회를 연다.  영락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서북청년회가 이듬해 11월에 출범했다.

서북청년회는 제주도 4.3 항쟁에서 양민을 학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는 한국사에 악명을 남긴다. 그리고 2014년 10월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 나타나서 가위로 노란 리본을 자르는 이벤트를 벌이려다가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이날 참석했던 재건위원회 중 한 명은 며칠 뒤 같은 장소를 찾아 서북청년회가 뭔지도 모르고 지인의 요청으로 참석했다며 국화꽃을 들고 와 큰 절로 사죄했다.

그렇다. 아무 것도 아닌 소동일 뿐이다. 진보 진영에서도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젊은 세대는 잘 모르던 서북 청년단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해방 직후 기독교의 추한 기억을 되살려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었으니 잘 된 일이다. 덕분에 한경직 목사도 함께 거론된다.

함석헌이 1945년 11월에 신의주 반공 학생운동을 조종한 혐의로 북한에서 투옥생활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한 것과 달리 한경직은 너무 일찍 월남했다. 김일성이 아직 조만식의 눈치를 보며 북쪽의 기독교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던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기독교인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도 있기 전이다. 그런데도 해방 2개월만에 월남한 한경직은 반공의 투사가 되었고, 공산 치하에서 옥고까지 치르었던 함석헌은 반공보다는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북한 지역 신천에서 일어난 신천 학살을 그린 피카소의 작품

무엇이 한경직을 그렇게 서둘러 월남하게 했을까? 그에게 공산당의 ‘진면목’을 일찌 감치 알아차리는  ‘혜안’이라도 있었을까?  여기에는 한경직의 미국 유학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본 유학 출신의 함석헌에 비해, 국내파인 계훈제에 비해 한경직은 국제 정세에 더 밝았을 수 있다. 미국의 힘과 함께 미국 시각에서 ‘나쁜 공산당 소련’ 의 실체를 더 잘 파악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교인들을 두고 서둘러 월남한 일은 두고 두고 자랑할 성질의 추억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기억을 조작하거나 과장한다.  꼭 한경직 목사가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뒤따라 내려온 월남자들에게 자신의 불가피한 선택을 정당화하지 않고는 월남자 중심의 교회를 그 정도로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서북청년회와 영락교회의 관계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쉽게 연결된다.

 미국에 사는 헝가리 출신의 반공투사

<뮤직박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1989)는 잘 나가는 변호사 앤 탤버트(제시카 랭 분)의  가족(친정아버지와 남동생, 외동 아들)의 이야기다. 헝가리 이민자로 온갖 고생을 다해가며 자신과 남동생을 키운 아버지는 장한 아버지 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을만한 존재다. 남동생은 변호사로 성공한 똑똑한 누이만큼은  잘나가지 못해도 아버지와 누나를 잘 따르고 조카에게 좋은 외삼촌이다. 이렇게 행복한 시절이 계속되던 중 2차 대전 당시의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아버지 마이크 라즐로(아민 뮬러스탈 분)는 전범으로 고발된다.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헝가리 특수경찰 '애로우 크로스'의 요원으로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혐의였다.

검찰 측은 라즐로가 미국에 오면서 본명인 미쉬카로 살던 과거를 숨기고 이민 서류를 허위로 기재했으므로 시민권 박탈과 함께 헝가리로 추방해야 한다며 그를 기소한다.  라즐로는 전범이 자신과 같은 이름일 뿐이며 모든 것이 빨갱이들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라즐로는 헝가리에서 문화 사절단이 미국에 공연을 왔을 때 그들 앞에서 반공구호를 외치며 헝가리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에도 참석했던 일을 내세워 반공의식이 투철한 미국 시민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1989년 영화이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이다. 당시의 동구권이 독재와 가난에 시달렸던 일은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민자 라즐로가 헝가리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반공 시위에 나갔다고 해서 그를 편협한 반공주의라고 탓할 수 없다. 그러나 라즐로에게 반공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국에서 반공이 정당한 정치 이념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딸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변호를 자청한다. 그토록 자상한 아버지가 나치의 앞잡이였을리가 없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딸이 변호사로 나서는 게 편하다. 자기의 과거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 딸은 핏줄을 앞세워 어떻해서든지 무죄를 만들어내리라 확신한다.

   
앤이 재판정에서 아버지의 무죄를 변론하고 있다. 하지만 변론은 검사측의 증인들 때문에 불리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재판은 라즐로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아직도 살아있는 목격자들이 그의 죄상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자국 땅도 아니고 미국에 이민 온 제한된 숫자의 헝가리 이민자들 사이에서 라즐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라즐로 자신도 놀란다. 게다가 미쉬카가 눈 주위에 흉터가 있는 남자와 함께 여자를 죽이고 아이를 살해하고, 열여섯 소녀를 윤간했다는 증언이 이어지자 앤도 당황한다.

실력있는 변호사 앤도 물러 서지 않는다.  망명한 전직 KGB 요원으로부터 전범 서류를 위조해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다는 증언을 받아낸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앤과 검사, 판사는 부다페스트에 있다는 전직 애로우 크로스 요원의 증언을 듣기 위해 헝가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앤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통해 그가 상습 밀고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판사는 사건을 무혐의 처리한다. 마침내 아버지와 딸이 ‘누명’을 벗은 것이다.

앤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아버지 친구의 누이동생 집을 방문한다. 앤은 아버지의 친구를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정기적으로 수표를 보내주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앤은 어려운 동포를 돕는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친구는 얼마 전 시카고에서 뺑소니사고로 죽었고 사고 후부터 지원금이 끊겼다는 아버지 친구의 딸의 하소연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었다.

그런 아버지 친구의 누이를 만난 것이다. 그 집에서  앤은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혼란에 빠진다. 사진 속의 인물은 증인들이 라즐로와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람,  눈 주위에 길게 칼자국 흉터가 난 바로 그 남자였다. 누이는 앤에게 오빠가 이런 것을 보내 주었다며 전당표 한 장을 내민다. 여유가 되면 오빠의 선물이나 찾아서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은 앤은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으로 돌아 온 앤은 어려운 재판에서 승소한 유명인으로 언론에 거론되지만 헝가리에서 본 얼굴에 상처난 사람의 사진 때문에 마음이 개운치 않다. 앤은 부탁받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전당포로 향한다. 전당된 물건은  낡은 뮤직 박스였다. 그것을 열자 태엽이 풀리면서 음악과 함께 밑에 숨겨두었던 사진 몇장이 드러난다. 사진 안에는 잔혹하게 살해된 시체더미를 배경으로 자랑스럽게 찍은 애로우 크로스 '악마'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와 죽은 아버지의 친구, 얼굴에 상처난 그 사람이었다. 친구는 꼭꼭 숨겨둔 사진을 이용해 라즐로를 협박해 왔고, 그로부터 돈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원인 모를 사고로 죽는다. 라즐로가 개입되었다고 충분히 의심을 가질수 있는 정황이다.

뮤직박스의 아름다움

뮤직박스는 아름다운 옛 추억이고 흘러나오는 선율은 감미롭다.  전당포에서 찾게 될 물건이 무엇인지 몰랐던 앤은 차 안에서 뮤직박스를 열어보며 재판에서 이긴 뒤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추스린다. 아버지와 친구는 좋은 사람들이다. 하찮은 뮤직 박스를 간직할 정도로 순박한 사람들인데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추한 기억의 흔적들이 기어 나왔다.

누구에게나 추억은 아름답다. 누구에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공산당과 싸운 추억이 자랑스럽고 어떤 이에게는 자유를 찾아 삼팔선을 넘으며 주먹밥을 나누어 먹던 기억이 아름답다. 밥상머리에서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전하는 할아버지의 무공과 할머니의 희생은 빛이 난다. 지금 이렇게 아름답게 살고 있는 일도 그들의 희생 덕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기억을 헤집고 들어가보면 정말 일어났던 일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실체가 추할 수록 기억은 아름답게 포장되고, 포장된 것을 상품화하기 위하여 주변 상황을 조작한다.

이북 지역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6.25를 전후해 거세어 졌다. 김일성은 한국 전쟁 초기에는 미국을 주적으로 삼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만 확인되면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인정할 것이라고 그는 오판했다. 군대 폭력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원산폭격(1950년 7월) 이후 김일성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달리 말하면 친미 집단인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개전 초기에는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미군과 기독교인이 같은 편 공산군이 반대 편이 되어 상호 살육극을 벌였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교회가 그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1946년 월남을 권유하던 사람들에게 이북 동포를 놓아두고 갈 수 없다던 조만식 장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10월 경에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함석헌도 신의주에서 반공시위를 조종한 혐의로 형을 살았지만 1947년 출옥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유신을 반대하던 기독교인들은 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런데도 월남한 사람들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떤다. 아름다운 건물과 음악을 갖춘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선한 표정 뒤에 숨겨진 기억은 전투적 원한으로 변질된다.

라즐로가 그랬다. 손자에게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조작된 기억을 후대에게 전승한다. 그에 대한 누명은 공산당들의 상투적인 전술이며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헝가리의 공산화를 막다가 힘에 부쳐 미국으로 이민 온 일밖에 없다고 세상을 기만한다.

바울에게 추억이란

바울에게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행전 9:1-9)

바울은 당시로서는 정당한 일이었다고 변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추한 과거였다고 고백할 때 비로소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다.  바울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기 위해서이다. 그의 추억의 현장이었던 주변의 모든 정황들과 결별해야 한다.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보지 않으면 언제 더러운 추억이 아름답게 포장되어 드러날 지 모른다.

아버지를 지키고 싶었던 앤은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거물인 사진을 검찰에 보낸다.

앤은 왜 그랬을까? 그토록 소중한 아버지고, 어려운 재판을 이긴 일도 앞으로 앤의 가정과 일터를 더욱 굳건히 할 터인데 앤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  아들에게만은 추한 기억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그런 사회를 물려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딸은 사건의 전모를 알고 난 뒤 자신의 아들을 그의 할아버지와 계속 떼어 놓으려고 한다. 추억, 그것도 조작된 추억을 먹고 사는 아버지의 세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다음 세대에도 통하도록 버려둘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통해(사도행전 9:18),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자면  기존의 상황과 지식과의 단절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앤은 새로운 주체가 되었다. 딸과 누이와 엄마라는 가족 속에서 규정되던 주체를 극복한다. 자신의 성공도 가족이라는 개념 안에서 해석하던 앤은 불안을 진리와 교환하지 않는다. 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진리가 주는 해체와 교환하지 않는다. 앤은 비늘을 벗고, 아버지를 고발함으로써 윤리와 책임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의 불감증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담아내던 영상은 후반부에 갈수록 그들로부터 아들을 떼어 놓는 영상으로 바뀐다.

조작된 추억을 먹고 사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한 때 민주화의 추억을 먹고 살던 시대를 지나 반공과 친일의 왜곡된 추억을 먹고 사는 사회로 한국은 퇴보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의 빠른 선택 뒤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실체적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조작된 추억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바울의 회심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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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1 2014-10-20 12:07:03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