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분쟁, 대안은 있다!
한국교회의 분쟁, 대안은 있다!
  • 허현
  • 승인 2014.10.2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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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기윤실, 건강교회포럼 허현 목사 발제문

“성숙한 교회는 갈등을 맞을 준비를 한다”

   
▲ 허현 목사 © <뉴스 M>

인간은 살아가면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남을 갖고 관계하다 보면 때때로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많은 경우 갈등이 파괴적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갈등을 회피하거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갈등에 잘 반응하면, 더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의 모습이 어떠한가 모범이 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한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상황을 보면 교우들(목회자 포함)간에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이해부족과 그 차이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갈등시 다른 이들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빨리 정죄하고 관계를 깨는 것이 훨씬 쉽다.

이민 교회내 갈등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 교회 지도자로 잘 준비되지 못한 목회자, 장로, 집사 등으로 인한 재정 및 재산권과 성적인 문제, 은퇴목사의 간섭을 포함한 권력쟁탈전, 교회안에서 신분상승과 관련된 명예와 자존심의 문제 등이 있다. 이민교회가 한인커뮤니티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신앙이 아닌 보다 나은 이민생활이 교회 출석의 동기가 되는 통에 성서적 가치에 입각한 교회공동체 형성이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교회가 재산싸움이나 권력게임을 하게 되는 이유도,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가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도 공동체의 성숙과 관계가 깊다. 성숙이 갈등의 도래를 막을 수는 없으나, 성숙한 교회는 갈등을 맞을 준비를 한다.

“샬롬의 반대는 갈등으로 인해 깨어진 관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갈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부정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을 파괴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회피해야 할 심각한 문제로 간주한다. 어떤 이들은 공동묘지에서나 존재하는‘갈등이 전혀 없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이라고 오해하면서, 갈등을 샬롬의 반대말로 생각한다. 하지만, 샬롬의 반대말은 갈등 자체가 아닌 갈등을 잘못 다룸으로써 생겨난 깨어진 관계다.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갈등은 그룹을 연합하거나, 경계를 명확히 해주고,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면서 힘의 균형을 가져오는 등의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성경도 갈등을 보는 눈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갈등의 책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안될만큼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갈등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역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평화와 화해의 사역에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되는 미션을 받았다. 그러므로 갈등은 화해사역의 전제가 되며,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 곧 미션이 행해지는 상황이 된다. 그런 면에서 갈등 자체는 중립적이다.

“우리는 갈등의 부분만을 알고 있다”

갈등을 긍정적으로 상상하며, 갈등의 긍정적 변화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리를 알 필요가 있다.

우선 갈등은 성장하기 위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갈등은 파괴적일 뿐 아이라, 건설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초대교회는‘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의견의 충돌로 분열의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경청, 토론, 기도를 통해 건설적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부분적인 진실’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진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제한된 시야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단순화 시켜보면, “사람들”, “과정”, “문제들”로 범주화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때로는 그 자체만으로, 때로는 복합적으로 교회 내 갈등 상황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이란, 관계와 심리적인 부분을 말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갈등전환은 심리적 안정감과 상호 화해에 이르는 결과를 지향한다.

“과정”은 의사결정 방식과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을 의미한다. 우리는 때때로 의사결정 과정이 갈등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사람들이 분개하거나 불공정하게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든지, 혹은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람들은 자신이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것 같고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제대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 내려진 결정에 협력하거나 지원하는 일이 거의 없다. 공공연하게 결정사항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동은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바람직한 갈등관리 과정에는 ‘개방성’, ‘권한부여’, 그리고 ‘참여’가 포함된다. 참여자는 정보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어야 하며 의사결정의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효과적이고 자신있게 기능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 결정에 영향을 받을 모든 이들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문제들”이란 사람들 간에 놓여있는 구체적인 이슈들과 차이점들을 의미한다. 의사결정 방식, 양립할 수 없는 필요, 이해 관계에 있어서 서로 다른 가치들과 반대되는 관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부족한 자산(땅, 돈, 시간)을 사용하거나, 분배하려고 할 때, 분명한 차이점들이 생겨난다. 사실 이러한 차이점들이 갈등의 “실제적인” 뿌리로 지목되곤 한다.

 “갈등은 역동적이다”

존 폴 레더락은 갈등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역동성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처음에 시작된 의견의 차이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하게 된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상대방에 대한 공격, 그 사람의 성품, 의도, 동기 등을 추론하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둘 사이의 문제에 집중하는 대신에 상대방 자체를 문제로 보기 시작한다.

둘째, 갈등의 정도가 강해지는 가운데, 대부분의 갈등 속에서 어떤 특정한 변화의 패턴이 보여진다. 처음에는 하나의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더 새로운 문제들이 부각되어 나타난다. 하나의 이슈가 증대되고 확산되면서 혼란스럽고 관리가 불가능해진다.

세째, 직접적이고 정확한 의사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갈등 당사자들은 상대방과의 접촉과 대화를 줄이고, 자신들과 동조하는 사람들과의 접촉 및 대화를 늘린다. 경청하고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로 갈등의 강도와 감정적 개입은 증가한다.

네째,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역동성이 나타난다.갈등 당사자들은 처음의 이슈나 문제에 반응하지 않고, 상대방에게서 가장 최근에 받은 반응에 대응한다. 적대감과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증가하고 불신과 소통의 부재가 강해진다.

다섯째, 회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갈등이 심각해지고, 극단화되면서 사람들은 교회를 옮겨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중립적인 자리를 찾기 어려워지고, 중립을 지키는 자들의 영향력은 줄고, 극단에 선 사람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핵심인물이 된다.

이러한 역동성들은 핵심 이슈를 해결하기 못하고 관계의 파괴를 조합해 낸다. 갈등의 가장 파괴적인 요소들이 관리되지 못한 채 남겨져 상호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몰아내고 극단적 입장이 중립적 입장을 대치하고, 적대감이 의견차이의 자리를 대신하며, 가정과 추축이 대화와 경청을 대체한다. 처음의 문제는 가장 최후에 받은 모욕에 의해 자리를 잃고 사람이 문제가 된다.

“성서에 기초한 비폭력적 생활방식”

그렇다면, 갈등전환을 한인교회에서 어떻게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교회의 갈등을 주사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당장 해결책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갈등전환의 과정은 한번의 세미나나 프로그램을 돌린다고 해서 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해결 위주의 사고는 진정 필요한 변화를 덮어버릴 수 있다. ‘갈등 해결’에 집중하게 될 경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갈등을 무마할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갈등을 통해 정당하게 제기되어야 할 중요한 이슈를 덮어버릴 수 있다

교회내 갈등전환은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 성서는 평화가 정의에 그 근간을 두며 그 정의는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라고 가르친다. 레더락은 “단순히 갈등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권리와 생명을 철저히 존중하는 정의의 회복을 통해 건강한 관계와 올바른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그 열매로 얻게 되는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사건 이면에 있는 관계 패턴과 맥락을 다시 돌아보아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응급처방에 만족하지 않고, 내용, 상황, 구조를 다층적으로 다루기 위한 틀을 만드는데 집중하게 한다. 단기적 해결이 아닌 다음세대를 중심으로 한 문화형성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우선 리더들의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성격 및 성향을 확인하고, 분노조절(anger treatment), 회의하는 방식, 목회상담에 있어서 조정자(mediator)로서의 역할 등을 훈련받아야 한다. 우리가 목회현장에서 계속해서 갈등을 경험하고, 갈등 때문에 목회를 그만두기도 하고, 또 교회가 갈등 때문에 깨어지기도 하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한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미국 신학교의 목회학석사과정에서 이러한 과목을 개설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 풀러신학교에서도 졸업하기 직전에야 갈등해결 과목 하나를 선택과목으로 수강할 수 있다는 것이 갈등전환 인식에 대한 신학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회중이 준비되기 위해서는 개척 초기부터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평화와 갈등전환에 대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회중에게 갈등전환의 문화를 습득시키기 위해 개척 초기 만큼 적절한 때는 없다. 갈등전환 훈련과 문화형성은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효과가 크다. 회중이 준비가 안 되었을 때 갈등이 일어나면 개인의 영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도 안해서 그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서 그런거야””무조건 섬기면 돼”라고 충고하거나 가르친다. 그럴수도 있지만, 상당수의 교회내 갈등에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요인들이 있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해결점을 강조하다보면, 개인이 혼자 도저히 질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짐을 던져주게 된다. 마치 더러운 물이 담긴 어항에 물고기를 집어 넣고 깨끗하게 살라고 하는 것처럼, 건강하지 못한 갈등해결 문화를 가지고 있는 그룹이나 회중으로부터 개인은 깊은 상처와 죄책감을 안고 떨어져 나가게 된다.

정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이 정관들을 가지고 있지만, 갈등이 일어날 경우에는 정관이 정관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정관이 마치 싸움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근거, 혹은 공격하기 위한 무기처럼 보인다. 정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회안에서 화해를 실천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평화와 화해의 언약이다. 교회 전체에 갈등전환 혹은 평화와 화해의 문화를 형성해 가기 위한 장기간의 계획과 그것을 실행에 옮길 헌신된 태스크포스를 선출해 훈련시킬 필요도 있다. 여기에는 <갈등전환>, <회복적정의>, <트라우마의 이해와 회복> 등의 세미나를 통한 훈련과 <조정자(Mediator)> 훈련 등이 필요하며, 조정자의 필요성을 회중에게 인식시키고 또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팀도 바로 이 팀이다. 태스크포스를 통해 구조와 문화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민교회 안에서 갈등전환 사역의 핵심이다.

끝으로, 이론의 순수함은 현실의 지저분함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하는 실제 갈등상황은 구체적으로 알아갈수록 각기 다른 양상을 띠고, 갈등의 수 만큼 다양한 원인들에 기인한다. 의사들이 수 많은 이론들을 배우고 실습을 했다 할지라도 실제 다양한 상태의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수술을 집도할 때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시술을 그 이론들 중 선택해야 할 수 밖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많은 갈등전환 이론과 실습을 했다할지라도 결국 평화사역자는 그 이론 중 그 회중에 적합한 것을 선택해야 하고, 그 갈등의 자리에서 우리는 상당한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약속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니엘 베리건(Daniel Berrigan, SJ) 신부의 "긴 수고의 길 걷는 이들을 위한 십계명(Ten Commandments for the Long Haul)" 중 네 번째를 갈등전환의 관점으로 바꿔 글을 맺으려 한다.

"실제로 세상에서(교회안에 일어난 갈등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잠언이다.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그 일, 바로 그 일을 하라. 선한 양심으로."

허 현 목사 / ReconciliAsia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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