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에 깨어날 때
새벽 세 시에 깨어날 때
  • 강성도
  • 승인 2014.12.0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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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이를 느끼는 시간

새벽 세시에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자리를 고쳐 잡고 앉아보십시오. 조용히 말을 걸어보십시오. 할 수 있으면 침묵해보십시오. 내가 생각지 않던/못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는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게 말하고 싶어하시고, 나누어주고 싶어하시는 다가오심이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주님을 온 몸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고난과 통증, 버려짐과 반대의 고통을 통해, 바로 옆에 계신 분을 느끼는 감각이 되살아 나야 합니다. 하루 종일 옆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내 방식/ 내 느낌/ 내 감각으로는 인지되지 않습니다. 아직 튜닝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하루종일 방송을 하지만, 나의 채널을 맞추어야만,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외로움을 주시고, 버려짐을 느끼게 하시고, 그분으로 목말라하게 하십니다. 어둠 속에, 외로움 속에, 홀로 남게 만드십니다. 이 고독이, 혼자됨이 주님을 만지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공간이 됩니다. 주위가 조용해야 가는 소리가 뚜렷이 들이듯.....,

주위가 온통 캄캄해야 흐린 불빛조차 밝게 보이듯......, 이때 믿음의 선배가 옆에 있으면 조금 도움이 됩니다. 옆에서, 입술에 물을 젹셔주면, 그 갈증의 힘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할 때, 손을 붙들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꼭 필요한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죽겠는데, 앞서서 놀고 있으면서, 손길 하나 내밀어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해주어야 마땅한데, 어느 선에서 멈추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아쉽고 얄미로운 존재로 보입니다. 시원하게 갈증을 해결해 줄 때도 간혹 있지만, 무책임한 방관자로 보입니다. 사실 이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고불고불 열심히 잘 따라가다가, 잘 아는 길이 나오면 다시 홀로 서면 됩니다. 거기까지가 가이드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심장이 찢어지며)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여기에 이르면, 많은 진전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우치게 하시기 위해, 우리 가진 모든 것을 거두어가시기까지 하십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오는, 불편과 고통의 아픔까지 더해진 곳에서 새롭게 하나씩 만들어 가십니다. 주어진 것들을 아무 판단 없이, 무엇이 주어지던지 간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것이기에 놀라게 됩니다. 무엇이든 감사하는 넉넉하고 온유한 마음도 얻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 내던져져 순하게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살아냅니다. 어떤 비난과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해 갑니다. 이론으로 말장난으로 언어유희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고,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옆에서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 그가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 어디로 이끌어 가도 따라갈 수 있는 사람 무엇을 주어도 웃음으로 받아들이고, 모두 되돌릴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잠시 안 계신 것 같아도 오실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있는 사람 예수 때문에 한없이 욕먹어도/굶어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 십자가 위에 홀로 버려두어도 “언젠가는 오겠지, 안 오시면 할 수 없구!” 하는 사람 급하고 화끈한 사람들이 제일 견디기 힘든 것만 골라놓은 리스트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변하면, 질투도, 분노도, 초조함도 두려움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릇이 비워지면, 그릇의 주인이 죽으면, 새 주인이 나타나면, 모두가 허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새로운 길에는, 옛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버림으로 얻고, 내어놓음으로 찾는 길은, “더 달라!” 하는 옛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를 다시 다 내어드리는 사랑은,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 인생을 책임지라!' 고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의탁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투신이라고 부릅니다. 모르는 길, 갈 수 없는 길, 그래도 갈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이 길 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때때로 나를 떠나버리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온 몸으로 그가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야합니다.

이를 위해, 죽음의 끝에, 음부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잔인함이 있습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 제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꽃의 연단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불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담금질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단되고, 정금처럼 변화하게 됩니다.

물론 이때, 나는 절망 속에서, 무력 속에서,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무력함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때, 옆에 함께 매달리신 그 분으로 인해 신비로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갑자기 안 아프고, 평화롭게, 새 힘이 솟아납니다. 나 홀로가 아니기에,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안정이 찾아옵니다. 여기에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었기에 눈이 열리는 기쁨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어떤 말로 따질 이유도, 마음을 닫고 의심하며 아파해야 할 이유가 엷어집니다. 맑아지나, 따져야 할 필요도, 의심이 생길 공간도 없어집니다. 순전하게 받아들여지는 '변화'가 옵니다. 기적과 같은 변화로 인해,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뒤따릅니다.

마치 머리가 꼬실꼬실해지고 가슴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느낍니다. 하나님 앞에 뿔이 잔뜩 돋아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열정과 타는 목마름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소잡아먹은 귀신처럼, 앉아서 돌을 맞으면서 앉아있는 진득함도 필요합니다. 물을 끼얹듯이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견디어 내는 "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근력과 내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좋은 성적과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여름이 가고, 찬 이슬 내리는 가을이 와야 달콤한 열매가 맺힙니다.

강성도 목사 / 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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