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이 진보다
정통이 진보다
  • 김기대
  • 승인 2014.12.17 17: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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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뱅크의 급진적 정통주의에 주목하라

 이곳의 한국계 신학교에서 ‘현대 신학의 동향’이라는 과목의 강의를 부탁해와 몇몇 신학대학의 커리큘럼을 찾아 본 적이 있다. 참고하기 위해서였는데 별다른게 없었다. ‘최근의 신학’이라든가 ‘현대신학’이라든가 하는 이름이 붙은 과목의 대부분은 오래전 내가 학부에서 배우던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틸리히, 몰트반, 판넨베르그 등이 한물간 학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신학은 시대를 초월해 의미있지만 한국 신학계가 새로운 신학의 소개에 인색하거나 아니면 늦다는 생각이 깊게 들었었다.

벌써 지난 세기가 되었다. 90년대 후반에 어떤 기독교 학술지에 미로슬라브 볼프의 ‘포용의 신학’과 그의 신학의 모판이었던  옛 유고연방 지역의 인종 갈등에 대한 논문을 기고한 적이 있다. 볼프의 책이 한국에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1993년에 <노동의 미래 미래의 노동> 이 번역된 적은 있으나 곧 절판되고 말았다. 이 때가 저작권 협약이 없던 마지막 시기여서 저작권 협약 때문에 절판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 글을 실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화가 난 나는 모종의 ‘로비’를 벌인 끝에 겨우 학술지 한 구석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실수인지 의도(로비에 대한 응징?)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 학술지 데이터 베이스에서는 내 글이 검색되지 않는다. 나는 당시 편집진이 볼프를 몰랐었다고 확신한다. 신학계에서는 이미 ‘뜬’인물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었다.

볼프는 애석하게도 나같은 무명의 방외 학자(이 말은 민중신학 1세대인 고 서남동 교수가 대학에서 해직당해 연구실이 없다는 의미로 자신의 신학을 방외신학이라고 한 데서 빌어 왔다) 에 의해 한국에 처음 소개됨으로써 수모(?)를 당했지만 지금은 한국 신학계에서 명예를 회복한  상태다.

이미 떴는데 한국 신학계가 외면하고 있는 또 한 명의 신학자는 존 밀뱅크(John Milbank, 1952- )다. 그의 신학은  급진적 정통주의 (Radical Orthodoxy) 또는 급진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적 정통주의로 불리고 있다. 한국에서 그의 이론이 제대로 소개되어 나온 책은  <예수는 괴물이다>(마티,2013년)가 처음이다. 이전에는 제임스 K.A 스미스의 <누가 포스트 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살림, 2009년)에서 잠깐 언급되고, 역시 스미스의 <급진 정통주의 신학>(기독교문서선교회, 2011년)의 서문을 밀뱅크가 쓴 정도 였다. <예수는 괴물이다>도 밀뱅크 때문에 번역되었다기 보다는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쓴 책이기 때문에 출판시장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1990년 존 밀뱅크는  『신학과 사회 이론: 세속 이성을 넘어서』(Theology and Secular eason: Beyond Secular Reason)를 출판하는데 이 책은 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전의 신학자들도 사회 현상을 신학적으로 풀어내기는 했지만 총론적 입장에 머물렀다면 밀뱅크는 해박한 사회이론과 서양철학을 넘나드는 내공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뒷방으로 밀려난 신학을 끌어 올렸다.

 

슬라보예 지젝과 말을 섞을 수 있는 유일한 신학자

지금 가장 ‘핫'(hot)한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의 한국 강연에는 항상 수천명의 청중이 모여든다.  그는 유물론자이고 무신론자이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신학계가 스타를 배출하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 기독교의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해준 인물이다.

지젝은 발터 벤야민의 그 유명한 비유, 장기두는 인형을 뒤집는다. 근대 이전의 유럽 장터에는 장기를 두는 인형이 있었는 인형은 순박한 농부들의 돈을 털었다. 컴퓨터 게임도 아닌 마당에 어떻게 인형이 돈을 따는가? 인형 안에는 장기로 훈련된 난장이가 숨어 있는데 순박한 사람들은 진짜로 인형과 장기를 두는 줄 알고 덤벼 들었다가  낭패를 당한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인형은 맑시즘이고 난장이는 기독교라고 비유한다. 지젝은 이 비유를 뒤집어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인형의 역할을 해야 하고 맑시즘은 난장이처럼 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맑시즘은 한 물간 상품이지만 그 가치는 버릴 수 없기에 기독교 뒤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의 가치를 인정해 준 것만으로도 지젝은 기독교인들이 미워할 수 없는 존재다. 바울이 빌립보서 1:18에서 말했듯이 지젝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지젝은 성육신 이론을 라깡의 이론과 연결시키면서 기독교의 세계관을 독특하게 풀어낸다. 밀뱅크는 지젝의 이런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지젝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젝의 전방위적 철학작업은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데 밀뱅크는 오히려 차근 차근 지젝과 이야기를 나눈다.

2013년 9월 「기독교사상」은 밀뱅크와의 대담을 싣고 있다.  그는 이 대담에서  “급진적 정통주의는 여러 면에서 가톨릭의 새로운 신학 (la nouvelle theologie, 20세기 초중반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가톨릭의 신학적 흐름. 당시 지배적이던 신스콜라주의 신학을 비판하였고, 현대사회의 문제를 기독교 전통으로 재조명하려 하였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그는 ‘정통주의’를  정통 기독교의 신조를 공유한다는 의미로 단순화시킨다. 이는 아우그스티누스전통으로의 복귀를 말한다.  반면  급진적이라는 단어는 4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1)  ‘급진적’이란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급진적을 근본적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2) 정통의 급진성은 언제나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표현되어야 한다.

3) 정통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더 급진적이다. 기독교는 세계를 뒤흔들고 모든 위와 아래를 뒤엎기에, 아주 급진적인 사회적 정치적 의미가 있다

4) 정통주의는 세속사회에 대해 그 끝없는 도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정통주의는 세속 세계와 쉽게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속사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통주의란 우리가 세속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전제마저 비판적으로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급진적 정통주의는 근대성을 뛰어 넘고자 하는 포스트모던 신학의 한 분야이지만 밀뱅크를 비롯한 여기 속한 신학자들은 근대 이전의 신학 전통을 포스트모던 이론과 대화 속에서 새롭게 읽어내며 근대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한다.

 

무신론적 기독교?

<예수는 괴물이다>에서 지젝과 밀뱅크는 ‘신은 숨어 있다’라는데 동의하지만 지젝이 숨은 신 자체가 개념일 뿐 그것 이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밀뱅크는 ‘숨어 있는 저 너머에 신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해 지젝은 무신론적 기독교인 반면에 밀뱅크는 기독교의 무신론적면을 내세운다. .

기독교의 무신론적 측면은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의 자유로운 사고로 쉽게 풀어 쓸 수 있다. 밀뱅크는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 새뮤얼 해리스를 베스트셀러 저자로 만든 무신론 논쟁은 개신교가 세상을 무신론 천지로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저작 역시 개신교 종교개혁의 수혜자라는 의미이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처럼 개신교는 세속주의(자본주의·개인주의)를 준비해 놓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기독교의 존개 가치마저 위협당한  ‘사라지는 매개자’였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숨겨진' 토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있으면서 없는듯, 없으면서 있는듯의 특징을 개신교 신학은 품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와 인간은 초월과는 동떨어진 세속에 예속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겪는 모순과 투쟁은 결국은 평화와 화해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가 겪는 모순 구조를 직시하고 그 이면의 기획을 잡아내야 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세속과 무조건 타협하거나 보수라는 이름으로 세속과 결별해서는 안된다,

세속에 사는 제한적 개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참여한다. 중세와 근대가 보편(각각 신과 이성)에 묶여 있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든 개별적인 것을 진리로 삼았다. 이제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계를 본 이들이 고민하는 ‘보편적 개별성’의 문제를 밀뱅크는 신학적으로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풀어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품은 인간 예수그리스도는 보편적 개별성의 모형이다.

기독교를 다시 보게끔 지젝이 선도했고, <바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2년)을 통해 바울을 다시 읽게끔 유대교 학자 야곱 타우베스가 선도한 데 대해 기독교 신학은 빚을 지고 있는데 밀뱅크는 빚을 갚아 나가는데 제일 선두에 서있다.  

밀뱅크는 헤매고 있는 한국 진보 신학계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진보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문제를 갖고 씨름하거나,  ‘제사’  따위의 전통 문화와의 만남을 관용하는 것 정도에 머물러 버렸다. 더러는 유니온신학교나 하버드 신학교가 쏟아내는 종교신학에 경도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지 못했고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 ‘역사’에 묶여 역사를 뛰어넘는 방법을 몰랐고,  전통에 매여 전통 뒤에 숨겨진 폭력을 간과했다. ‘실재’에 매여 포스트 모더니즘철학에서 ‘실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데는 관용이 흘러넘치면서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는 유독 너그럽지 못한 것도 그들이 가진 모순의 하나다.

 밀뱅크는 아주 ‘근본적’으로 정통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때 기독교가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처할 수 있는 급진적 세계관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밀뱅크의 책이 번역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이론이 어렵기도 하지만 어쩌면 밀뱅크의 이런 주장들이 한국의 기독교 진보 논객들에게 부담스럽기 때문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의 ‘정통’을 파고드는 일은 진보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존 밀뱅크의 신학은 온갖 모순을 잉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선지자적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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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2014-12-19 05:42:03
밀뱅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마 아직은 한국교회가 포스터마더니즘에 대한 담론을 진지하게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인 듯 합니다. 진보 그룹의 정치 사회학적 분석 혹은 정통을 자처하는 보수 그룹의 사회에 대한 눈과 귀막기 전략이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다시 정통을 이야기 하는 밀뱅 같은 신학자가 한국 상황에서는 끼어들기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의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Radical Orthodoxy의 문화담론이나 교회론, 그리고, 다시 되살려낸 어거스틴의 미학의 포스터 마던적 적용등은 한국교회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