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버 부인과 복음
고다이버 부인과 복음
  • 최태선
  • 승인 2014.12.20 10:1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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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증의 대상이 되어버린 복음

존 콜리어라는 화가가 그린 "레이디 고다이버"라는 작품입니다. 한 여인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젊은 여인의 모습이 매우 고혹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그림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레이디 고다이버는 바이킹족의 일파인 데인족이 영국을 침략해 지배하던 시절인 11세기에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머시어의 2대 백작 레오프릭의 아내였습니다. 고다이버라는 이름은 고대 영어로는 고디푸(Godgifu)인데 이는 신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신의 선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신앙심이 깊던 고다이버는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보며 가슴아파했습니다. 1016년 데인족 국왕 커누트가 즉위한 이후 덴마크 정복에 나서면서 원정비용을 위한 세금을 영국에서 징수했습니다. 영국의 귀족들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과도한 세금에 힘겹게 살고 있는 농민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기도하던 고다이버는 용기를 내어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에게 세금을 낮추어달라는 청을 하였습니다. 세금은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랑스런 부인의 청을 묵살하기도 어려웠던 백작은 고다이버에게 화를 내며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코벤트리 동네의 시장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절묘한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고다이버는 위의 그림처럼 알몸으로 말을 타고 남편의 말대로 시장거리를 돌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가리고 그녀의 알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고다이버가 알몸으로 시장거리를 돈 후 집으로 돌아오자 감동한 백작은 세금을 낮추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이후 자신의 영지를 자비롭게 다스렸다고 합니다. 영국 런던에서 서북쪽으로 150 km에 위치한 코벤트리 지역에서는 1678년 이래 그녀의 알몸 시위를 재현한 퍼레이드를 벌였으며 1949에는 그녀의 기마상을 세워 그녀를 기리고 있습니다.

 

공감과 자기 희생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복음을 보게 됩니다. 고다이버 부인 개인의 신앙과 함께 복음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진리가 가진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먼저 고다이버 부인 개인의 숭고한 신앙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신앙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감과 자기 희생입니다. 공감은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루어져온 변화의 결정체입니다. 그것은 공감이란 단어의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진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내는 '애통함'을 일컫는다는 말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농민들의 애환에 하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호의호식하며 화려한 인생을 구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농민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더구나 그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애통함을 쏟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담보로 모험을 무릅썼습니다. 남편이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자신의 토대를 허물 수 있을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실제로 그랬습니다. 백작 역시 아내의 청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농민들의 세금을 낮춰주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에게 이미 과도한 세금 목표액수가 책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코벤트리 동네의 시장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을 때 백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긍휼한 마음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고다이버는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알몸을 온 성 사람들에게 드러낸 더러운 여인이 되어 남편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농민들의 세금을 줄여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공감이 자기희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공감이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긍휼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늘 공감을 떠올릴 때마다 권정생 선생이 생각납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아무런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보고 권정생 선생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얼마나 그것이 아팠으면 그날 밤 그는 40도가 넘는 고열로 앓아 누웠습니다. 그의 마음과 몸은 하나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아프니 그의 몸 역시 따라 아팠습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예수의 마음을 품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실제로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다이버 부인에게서 똑같은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녀는 농민들의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픔이 그녀의 아픔이 되었기에 그녀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만일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이 참이라면 과연 나에게는 고다이버 부인과 같은 긍휼한 마음이 있는가? 그렇게 다른 이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공감이 과연 내게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13장 참조) 우리에게 사랑이 있고 없음을 판별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바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지만 그런 공감을 가진 이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더 사나워지고, 더 판단하고, 더 정죄하고, 더 사람들을 가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참된 공감은 반드시 자기 희생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농민들을 향한 연민은 그녀를 자기 희생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알몸이 되어 말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말을 달려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장거리를 돌았습니다. 만일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장터가 사람들로 넘쳤다면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곧 그녀의 평판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녀는 백작 부인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나 평생을 더러운 여인으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 희생의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가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제자로서 주님을 좇으려면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러므로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하나를 고다이버 부인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언젠가 성가대 반주를 하던 딸아이가 집에 돌아와 성가대 찬양의 가사를 문제 삼았던 한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문제가 된 가사는 루터의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중의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녀는 마침내 손을 들고 지휘자를 향해 "아니 이 가사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배앗긴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느냐?"면서 이의를 제기했고, 그 말을 들은 성가대원들 역시 그녀의 말에 동조하여 생각해보니 그렇다며 다른 찬양을 부르자고 제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는(그것이 한국의 기독교이길 바라지만) 그런 가사를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변질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사라는 사람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세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기독교 안에서 십자가가 사라졌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손톱만큼의 양보도 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하는 이방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그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북'이니 '빨갱이' 혹은 '이단'이니 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차버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시시하게 사라져버리는 한 순간의 객기가 아닙니다. 다만 복음은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누구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것을 따르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수의 사람들, 그것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진리의 좁은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수가 너무 적어 '남은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소수의 사람들만으로도 능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은 바로 그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는 여간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힘은 권력을 능가하거나 흔들기가 어렵습니다. 대개의 경우 희생양을 낳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그 변화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누룩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가루 서말의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힘을 복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고다이버 부인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다이버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장거리를 도는 시각, 소식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들어가 창문을 닫고 두꺼운 커튼을 드리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사고는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아니 아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시장 거리에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만큼,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복음이 가진 힘이며, 그 힘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 년 전 오늘날 영국의 코벤트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고다이버와 농민들에게 뿐 아니라 백작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반드시 개인적인 변화로 끝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복음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공감과 자기 희생의 길을 걸을 때 우리들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을 뼈에 아로새겨야 할 것입니다. 

 

관광을 위한 전설과 관음증을 넘어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국 코벤트리에는 고다이버 부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녀의 숭고한 공감과 자기 희생의 전설이 면면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고, 그 이야기는 단순히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더해 아무도 내다 보지 않기로 한 그 시각, 톰이라는 재단사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창문 사이로 내다보았는데 그 이야기에 따라 새로운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피핑 톰(Peeping Tom)'-관음증입니다. 몰래 다른 이들의 벌거벗은 모습이나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여다 본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이처럼 관광 자원으로 전락하거나 관음증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유혹거리 정도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와 같은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없이 복음을 살아 오늘의 고다이버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다이버 부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복음이 연출하는 공감과 자기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 의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도시들이 천 년 전 코벤트리 시장 거리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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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연 2014-12-26 11:41:40
오병이어 블로그를 운영하는 황성연입니다.http://blog.daum.net/hosi1712 이 글이 제가 올해 여름에 쓴 약자들의 노래의 글과 유사한 것 같아 문의드리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혹 최태선 목사님과 연락을 닿을 수 없을까해서 댓글을 남깁니다. 한국 010-9509-6481 hosi3@naver.com

감사합니다 2014-12-20 15:32:57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십자가를 '자기희생'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 자기희생의 '자기'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자기'에 '나'를 넣어 해석하지만, 성경은 십자가의 희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말한다고 봅니다. "아니요,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나요?" 라고 질문하시겠죠.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가 과연 같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 그 자체였습니다. 영원부터 맺어온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저주..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저주의 형벌이 아닌 고난입니다. '피할 길'을 주시는 고난, 저주의 형벌이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면 안됩니다. 하지만, 그 피할 길을 주셨다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저주의 형벌이 아니라는 것이겠죠. 예수가 나 대신 지고 간 저주와 형벌의 십자가를 맛만 보는 정도입니다. 나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 예수의 은혜가 얼마나 광대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죠.. 우리의 본질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를..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기희생'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 부인'이라고 표현합니다. 희생은 sacrifice 이고, 부인은 denial 이죠. 희생은 예수께서 하셨고, 부인은 우리가 그 예수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그 자기부인을 당함으로써 자신이 '고다이버 부인'이 아니라, 바로 관음을 즐기는 Peeping Tom임을 아는 것, 자기의 실존을 보는 것, 그것이 자기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가 Peeping Tom임을 알아야지만, 그런 나를 위해 '고다이 부인'같이 발가벗겨진 채로 십자가 위에서 창녀의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의 은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안 자들 속에서 그제야 '자기희생'이라는 열매가 나오겠죠. 고다이부인이 되려하기전에 자신이 관음하는 탐임을 먼저알아야 하지 않을까요.그것이 십자가의기능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