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적 기도와 주술 신앙
무속적 기도와 주술 신앙
  • 신성남
  • 승인 2014.12.21 22:4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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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까
   
▲ 신성남 ⓒ <뉴스 M>

오래 전 서울 서대문구의 어느 보수교단 소속 D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께서 예배 중에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저 앞에 있는 남산이 옮겨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그런데 그냥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리 제안하신 것입니다. 

교인들은 매우 당황했지만, 목사님께서 워낙 진지하게 말씀하시니 할 수 없이 모두 통성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 기도 결과는 여러분의 예상대로입니다. 남산을 뭐 때문에 굳이 옮기려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재까지도 남산은 본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잘 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실제로 그에 대한 반응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냐?", "그 목사님 믿음 좋다!", "그게 목사가 할 말이냐?", "광신이 따로 없군!"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 기도는 말이 되고 있나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조용한 마을에 나이트클럽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 악영향을 우려한 마을 교회는 그 클럽이 문닫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건물에 벼락이 떨어져서 불이 나고 결국 클럽은 망했습니다. 

그 뒤 화가 난 클럽 주인은 교회를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교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 클럽이 망했다는 이유였습니다. 헌데 여기서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끝까지 "기도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다"라며 배상을 거부했고, 도리어 유흥업소 사장님은 "기도 때문에 망했다"고 강변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개중에는 위에 언급한 사례들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한다"고 비웃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과연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셨는지요. 여러분의 기도는 항상 말이 되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말씀이 단순히 성도 세 사람만 모여서 구하면 불가능이 없고 무엇이든, 아무거나, 무조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래서 기독교인은 셋만 모이면 천하무적이 되는 것인가요. 또는 신자는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노벨상을 타거나 갑부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공사를 위해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농사를 위해 비를 간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중요한 비행기 시간에 늦어 출발 시간이 연기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정시 출발을 못하면 큰 지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엔 또 누구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우산 장사는 비 오기를 기도하고, 아이스크림 장사는 해 뜨기를 기도합니다. 타석에 선 타자는 홈런을 기도하고, 같은 시간 투수는 삼진 아웃을 기도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더 좋은 편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나요. 

사실 우리의 기도를 냉정히 평가해 보면 다소 말이 안 되는 것이 제법 많습니다. 특히 기복적, 이기적, 물욕적, 맹목적, 그리고 무속적인 기도가 많습니다.

대학 입시는 실력순 또는 자격순으로 합격해야 순리이건만, 공부가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꼭 붙게 해달라고 애타게 기도합니다. 만일 그 기도가 그대로 응답된다면, 대신에 다른 적격자 하나가 더 떨어져야 합니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도해서 모두 부자나 귀족이 된다면, 누가 더러운 청소를 하고 누가 고된 농사를 하고 누가 피곤한 경비를 서고 누가 위험한 치안을 담당하고 그 누가 어렵고 힘든 일을 할까요. 아마 대부분은 쉬운 일을 찾거나 편안히 놀고 먹으려 하지 않을까요. 그럴 경우 과연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될까요. 가만히 따져 보면 간혹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무책임한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목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바르게 가르쳐도 틈만 나면 기복으로 빠지는 것이 부패한 인생들인데, 많은 목사님들은 도리어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기복으로 가고 있으니 개신교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특히 상당수의 대형 교회들은 아주 노골적인 '기복 교회'로 변질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의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거리가 먼 엉뚱한 것을 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하는 기도

이미 많은 분들이 기도에 대해 좋은 책을 쓰고, 설교를 하고, 또한 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런 정석적인 내용들을 굳이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정작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기도는 주술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따라 너무 요구하지 말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무병장수, 만수무강, 그리고 만사형통이 있던가요. 거기엔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피조물의 겸비한 자세와 죄의 용서가 있을 뿐입니다. 우린 지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그 이상을 너무 요구하며 일신의 안일을 자꾸 탐하는 것은 아닌지요.   

떡을 구하는 자녀에게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일이 구하지 않아도 소중한 공기를 주시고 물도 주십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난, 질병, 갈등, 불화, 고통, 그리고 실패 등이 있다면 그건 각별한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내와 연단과 순종과 고난을 감수하라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A대학에 갈까요, B대학에 갈까요?" 이런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한다면 어느 대학으로 가도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만 한다면 진급해도 좋고, 못 해도 좋습니다. 요셉처럼 감옥에 있어도 되고, 총리가 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게 믿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따라서 짜장면을 먹든 짬뽕을 먹든 그냥 먹고 싶은 것을 드시면 됩니다. 전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아무거나 타시라는 것이지요.  

왼 쪽으로 가시든 오른 쪽으로 가시든 가고 싶은 길로 가십시요. 그런 것도 일일이 기도 응답을 받고 가야 하는지요. 그렇다면 그건 미신적 무속 신앙입니다. 이 직장을 가든 저 직장을 가든 신앙양심에 문제만 없다면 원하는 대로 가셔도 됩니다. 그걸 기도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저 직장으로 가라!"고 직접 알려주시던가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어떤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지, 무슨 점쟁이처럼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 갈까?"에 대한 점괘를 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직장, 어느 사업, 어느 학교, 어느 교회, 그리고 어느 길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거기에 가서 '어떻게 사느냐'가 진정한 관건인 것입니다. 어느 길로 가든 단지 주님의 인도 유무가 중요한 것이고, 결국은 심은 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 자라서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에게 매일 모유만 달라거나, 아니면 돈만 달라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하니님께서는 장성한 성도들과 성숙한 대화를 원하시는 것이지, 만날 어리광과 투정과 응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무슨 직업, 무슨 일, 또는 무슨 신분이 되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여건에서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며 사는가 하는 점입니다. 개인 기도, 통성 기도, 새벽 기도, 그리고 철야 기도가 모두 좋은 것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말로만 기도하지 말고, 삶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주님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실제 삶이 주님 앞에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기독교 정신

수십 년 동안 교회당을 오락가락하며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해도 왜 응답이 잘 안될까요. 그 원인은 '자기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입시철만 되면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 입시생 부모들이 넘쳐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젠 무당이나 주술사처럼 그저 "잘 먹고 잘살자"는 기도는 좀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복적 요구와 주문을 토하며 통을 돌리거나, 탑을 돌거나, 종이를 태우거나, 땅밟기를 하거나, 붉은 천을 장식하거나, 정한수를 바치는 행위는 이방 종교나 하는 주술적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술'이란 행위자의 삶과 관계없이 일정한 형식의 행위를 반복하면 누구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아주 원시적이며 미신적인 신앙 행태입니다. 자기 변화는 없이 열심히 주문만 반복하는 것이지요. 

사실 사당을 강단으로 바꾸었을 뿐이지, 요즘 어떤 교회의 기도는 그것과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요. 양식은 먹을 만큼 있으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허구한 날 하는 기도가 돈을 더 달라, 복을 더 달라, 건강을 더 달라, 명예를 더 달라, 이거 달라, 그리고 저거 달라 그저 온통 '달라'는 말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주술사처럼 '돈과 복'에 빠지지 말고 '의와 인'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도들 모두가 누구든지 항상 성공하고, 이기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그리고 장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이방의 잡신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무속적인 목표들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실제 그렇게 부와 안락을 누리며 살다가 간 믿음의 선진들이 몇이나 있던가요. 오히려 대다수 믿음의 사람들은 거의 다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줄 몰라서 부귀와 영화를 구하지 않고 평생 시골 촌구석 민초들 속에서 가난하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이야말로 단 몇 마디만 기도하셨어도 귀족처럼 부자로 살 수 있으셨을 겁니다. 물로 포도주 공장을 만드시고, 물고기 몇 마리로 생선 가공 공장을 차리셔도 될 테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위해' 그런 것들을 전혀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과욕을 부리지 말고 적당히 자족하라는 말씀이지요. 

만일 내가 너무 많이 취한다면, 남들은 무얼 먹고 살라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비행기 시간을 연기시킨다면, 나는 좋겠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큰 피해와 손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특혜와 특전을 요구하는 기도는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그게 바로 기독교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돈으로 치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귀족 목사'들은 양의 탈을 쓴 도적의 무리라고 단정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생활고로 큰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돈을 복으로 미화하며 자기 부를 자화자찬하는 목회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거룩한 고난은 말하지 않고 편리와 안락과 성공을 주로 노래합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설교가 예수 믿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 복 받고, 형통하고, 잘산다는 거짓말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던가요? 그건 결코 아니지요.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정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생길이고, 때론 지지리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양보하고 손해를 보며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독교는 일부러 가난과 고난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가난이나 고난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귀와 영화를 추구해도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왜 이런 진실을 명확하게 안 가르치고, 사이비 무당같은 소리만 반복하며 늘어놓는 것일까요. 그건 어찌하던 신도들을 기복화하고 무속화하여 가능하면 '종교라는 틀'에 묶어 놓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며 종교적 야심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계명대로 사는 것이 기도 응답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 우리가 다소 잘못 구하거나 떼를 써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별해서 응답을 하십니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너무 경직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무거나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지 무슨 주문이나 주술이 아닙니다. 기도 자체가 요술지팡이나 마술단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도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산기도나 새벽기도나 철야기도가 특별히 더 효험이 있다는 생각은 매우 무속적이며 미신적인 사고입니다. 기도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꾸시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의 능력'이니 '기도의 힘'이니 하는 표현은 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입술로만 하는 기도는 사람이 들을 뿐이지만, 삶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만날 하나님께 주문만 하고 기도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기만이 되고 단지 공허한 주술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성적을 받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후에 실제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건 매우 잘못된 기도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구한 후에 힘써 일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저 무탈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기도 응답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내 뜻대로 아무거나 구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도 응답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진실하게 기도를 했다면, 더 이상 무속적인 복타령만 늘어놓지 말고, 정말 계명에 따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같이 소망이 없던 초라한 한 죄인이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아 그런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진정한 완성이며 놀라운 응답이라고 확신합니다.

샬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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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15-01-12 21:30:59
신성남씨, 야베스의 기도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기도에는 그저 나, 나, 나만 있을 뿐 우리도 없고 무슨 고귀한 사상도 없습니다. 자기의 복을 비는게 다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야베스의 수많았을 기도중 하필 이게 성경에 기록되었고 더 중요한 건 그 다음 구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을 가르칠려는 것도 아니고 신성남씨의 글에 비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글의 내용은 대부분 저도 저희 목사님께 교육받았던 글이고 신성남씨도 교회에서 어느 정도는 바른 교육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이 댓글을 쓰는 이유는 주님께 복을 비는 기도를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수도승이 아니라면 대부분 월급이 오르고 좋은 직장이나 학교에 가고 하는 바램들이 있을 것입니다. 전혀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 고결한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이 잘못되었다 해도 기도 중, 혹은 삶에서 깨우쳐주시고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대체적으로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만 주님께 복을 비는 것을 너무 터부시하지 않을까 우려되서 한 말씀 드립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이니 제 삼자가 뭐라 말할 일이 못됩니다. 이 글로 남의 기도를 비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gibyul 2015-01-01 10:56:50
기독교인과 진심으로 교제하기가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 중의 한 가지가 기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한 후 10분이 되지 않아서 그 기도의 정반대 행동을 하는 모습이 정말 싫어서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GIBYUL 2015-01-01 10:47:38
나는 얼마전부터 목사르놔 신부나 승려들을 직업종교인부류에 넣기로 했습니다.많은 직업 종교인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이 될 수 있으면 호응을 바라고 있지요. 그들은 대부분 생각하는 것과 행동과 말이 도무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무엇보다 글로서 하나님 말씀을 읽응ㄹ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좋은 글을 쓰시는 신 집사님께 찬사를 보냅니다.

신성남 2014-12-23 13:00:02
'ㅁㄴㅇㄹ'님, 비약이 다소 심하신 듯 합니다.~

만일 그런 식의 논리라면, 식사 기도 후에 "김치를 먼저 집을까, 아니면 '나물'을 먼저 집을까!"도 일일이 기도 응답을 받고 드시는지요? 그런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이나 '삶의 영역'을 운운해야 하나요?

본문의 논조는 '작고 사소한 일에는 기도하지 말라!'가 아니라, '매사에 무속적이며 미신적인 기도를 남발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대학 선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점괘를 구하듯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어떤 특수한 경우는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그런 사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귀한 의견 고맙습니다.~

나는나 2014-12-23 12:42:09
정말 좋은 글. 인간의 어리석은 기도가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한 재판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세상입니다. 기도, 중요하겠지만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주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 종교인이 되어 기도 바글바글 하고 세상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이런 글은 꽉막힌 선무당들로부터 공격 당하기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