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비천한 혈통!
예수, 비천한 혈통!
  • 강만원
  • 승인 2014.12.2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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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존재의 역설과 가치의 반전
   
▲ 강만원 © <뉴스 M>

예수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섬김을 받는 자가 주인이라면 섬기는 자는 당연히 종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섬기는 종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마태복음 1장 1절에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구절을 보면 섬기는 종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의 말씀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예수의 대표적인 조상으로 계보에 등장한 다윗이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이스라엘을 통틀어 ‘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위대한 인물이다. 다윗의 혈통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족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뛰어난 가문이다. 그런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인 예수가 세상의 작은 자들을 섬기는 하찮은 종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 솔직히 믿겨지는가? 괜한 소리로, 극적인 효과를 노린 ‘언어유희’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아브라함은 또 누구인가? 하나님이 직접 이름 지어주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로 세상의 으뜸이라는 뜻이며,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은 이른바 어르신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어르신이다. 뿐만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창17:2)라시며 굳은 언약을 맺으셨고,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라고 말씀하시면서 크게 축복하셨다. 예수는 그런 아브라함의 자손, 아니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씨’로서 천하만민을 위한 복의 근원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아브라함의‘씨, 그리고 다윗의 자손인 예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명문 혈통을 자랑한다. 고귀한 다윗 왕족의 혈통에 덧붙여 아브라함의 씨로서 복의 근원이라면, 예수의 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저없이 ‘이스라엘의 왕’, 또는 ‘만왕의 왕’으로 부르면서 소리높여 찬양한다. 그렇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세상의 초라한(?) 지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이미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께 세상의 하찮은 영화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부귀영화는 고사하고 세상과 사람을 섬기는 비천한 종이 되기 위해서다. 세상을 섬기되, 자기 생명을 바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의 수욕을 당하시며 죽으시러 예수가 세상에 오셨다.

세상에서 소외받고, 힘없고, 가난하며, 병든 자들을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이가 정작 세상에서 존귀를 누린다면,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며, 허구이다. 그런데, 성경이 분명히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면 예수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는 형식적인 의미에서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의 혈통을 기록했지만, 계보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는 놀랍게도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욕된(?) 혈통을 고스란이 잇고 있다.

마태복음 1장 1절만이 아니라 17절까지 한 문단 전체가 예수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낳고.. 낳고.. 낳고.. 의 지루한 반복에 질린 독자들은 예수의 계보를 끝까지 읽으려 들지 않는다. 뚜렷히 눈에 들어오는 1절의 말씀,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만 서둘러 읽고는 내용을 지레 짐작한 채 서둘러 2장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사실은 1절을 넘어서 예수 계보의 후반부인 2절부터 17절 사이에서 예수의 혈통에 대한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기까지 42대를 거치면서 모든 조상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기록됐지만 이상하게도 여자의 이름은 고작 5명만 기록되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부계의 혈통을 잇는 고대 이스라엘의 계보에 남자 조상들의 이름이 낱낱이 기록된 것은 당연하지만, 여자들 가운데 특별히 5명만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예수의 계보에 오른 다섯 명의 여자들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한결같이 비천하고, 추하고, 더럽고, 욕된 여자들이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익히 알고있는 것처럼,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이다. 시아버지와 통정해서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바로 예수의 조상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남편을 모두 잃고 시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상적인 출생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라합은 여리고의 창기이다. 라합을 두고 ‘창녀다’, 또는 ‘창녀는 아니고 주막의 기생이다’라고 기록이 분분하지만 사실은 오십보 백보이다. 여리고라는 군사도시에서 술집여자는 기생이고, 기생은 몸을 파는 창녀와 사실상 다르지 않다. 어쨌든 여리고의 창기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 살몬과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 보아스로, 그가 또한 예수의 직계 조상이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는 순종의 여인으로 나타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선민) 이스라엘이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는 미개한 민족인 모압 출신이다. 게다가 가난한 과부로서, 이방인이며 과부인 그녀의 신분은 말그대로 ‘개나 돼지’처럼 비천하기 이를 데 없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어떤 여자가 다윗의 아들을 낳았지만 성경은 그녀를 다윗의 아내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했다. 무슨 뜻인가? 다윗이 불륜을, 그것도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야를 속이고 마침내 그를 사지에 몰아넣으면서 ‘이웃의 아내’와 간통을 저질러 낳은 자식이 솔로몬이고, 솔로몬은 예수의 직계 조상이라는 엄청난 사실에 성경조차 밧세바라는 본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거리를 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마리아'인데,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라는 민감한 부분에 대한 언급은 일단 생략한다. 다만, ‘마리아의 찬가’에서 보듯이, 그녀 또한 매우 비천한 여자였다 :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눅 1:47-48). 더욱이,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약혼자의 씨가 아닌 예수를 잉태했다.

우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 ‘성령의 잉태’라는 말은 보도듣도 못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말해, 정혼한 마리아가 혼외임신했다면 그녀는 부정한 여자로 율법에 따라서 투석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이견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요8:41)라는 바리새인의 말은 사생아로 의심받던 예수의 출생을 조롱한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지 않다.

42명의 여자들 가운데 5명의 이름만 기록했고, 그들의 공통점이 세상에서 지극히 비천한 자이며 부정不貞한 자라는 사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문체론에서 말하는 '이탈(ecart)'로서, 저자의 의도가 담긴 특별한 표현법이다.

즉, 성경 저자는 의도적으로 다섯 명의 비천한 여자들을 계보에 등장시키면서 예수의 혈통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의도적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귀하신 예수는 사실상 지극히 비천한 자로 세상에 오셨다. 다시말해,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가난한 자’, 버림받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가 그보다 더욱 낮은 신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께서 굳이 낮은 자로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의심이 일겠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요컨대, 자신이 지극히 낮은 자가 되지 않고는 자신의 의지나 감정만으로는 세상의 작은 자를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자신이 겸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세상의 비천한 자들을 사랑하지 못하며, 종이 되지 않고는 결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은 자선이나 동정이 아니라 작은 자의 고통을 알고 섬기는 온전한 희생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는 존귀한 자이다. 그러나 그의 존귀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통해서 누리는 육신의 존귀가 아니라, 기꺼이 낮아져서 마침내 자기 생명까지 아낌없이 바치는 거룩한 영적 존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가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목숨마저 아낌없이 버리시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 그로인해 우리는 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예수는 우리에게 ‘섬김의 본’이 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시고, 복종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은 허튼 교만과 허세를 떨치고 예수가 말씀하신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낮아져야 주 안에서 높아지고, 세상에서 겸손해야 주 안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영성’의 역설적 진리는 다음 구절과 짝지어 읽을 때 비로소 본문에 대한 문맥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계신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처럼 ‘역설의 진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예수가 그러셨듯이, 낮아져야 높아지는 존재의 역설이며 가치의 반전이다. 세상의 작은 자를 섬기면서 스스로 비천한 자가 돼야 진실로 존귀한 자가 된다. 세상에서 지극히 낮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가득히 소망을 품자.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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