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사람에게
  • 강성도
  • 승인 2015.01.03 0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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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가 드린 말씀을 듣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혹시, 많은 것을 실지로 버렸는데,
길잡이가 '나도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고, 그냥 가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고작 이런 대답을 들으려고 따라온 곳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저도 희미합니다.
산에 다닐 때, 서로 약속을 합니다.
나무 가지 끝에 천 조각을 매달거나, 나무 가지를 걲어 놓기로.....,
그러면 바람과 햇빛에 그을려서, 희미해지지만,
그래도 산에 다니던 가락으로 그것들을 찾아내곤 합니다.

때로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가기도 하구요.
한번은 자주 다니던 설악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황당한 일이지요.
오던 길을 계속 되돌고 있는데, 갑자기 햇빛보다 밝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모퉁이 하나를 스치고 지난 것이 계속 맴돌게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고 있는 길 끝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문가 행세를 하기가 두렵습니다.
전문가들이 안내서를 남겨야 하는데,
너나 나나 다 정확하지 않은 글을 남겨 공해물이 되기도 합니다.
안내 책자를 내는 것이 두려운 연유입니다.

더 솔직한 속내는, 아직도 손끝에 확실히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따라 갈 때가 많고,
기도한다고 앉아서는 많이 졸고, 게을러집니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잠들어서 새벽의 찬 기운을 느끼며 잠자리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조금 더 기다려 보려고 합니다.

더 다듬고, 조금 더 확실해 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짙어지면 그때.....
지금은 그냥 묻고, 답하고,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늙어지면 욕망이 줄어들고, 힘이 빠지고, 저절로 평정심을 가지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욕정과 먹는 음식의 양은 확실히 줄어 들 것입니다.
그래도 식욕이나 자기 몸 아끼는 욕망, 돈에 대한 집착,
오래 살고 싶은 욕망 따위는 쉽게 줄어들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노욕입니다.
때로, 자신이 없어지고, 조그만 일에도 섭섭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늙은이를 바라보는 것도,
기저귀 갈아주는 사람에게 짜증내고,
속에 있는 이야기 담아두지 못하고 마구 뱉는 모습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도....,
그래서 이렇게 끌고 가시는 은혜를 감사하며, 힘들어도 따라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제 삶이고,
제 안에 계신 예수 그 분 자신이,
내 안에서 당신의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제적인 당위성 앞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을 택하곤 합니다.
멈추고 남이 내대신 가주기를 바라고, 구경꾼으로 남기도 합니다.
사실 들어서 아는 것은,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뿐입니다.
힘들더라도 자기 몸에, 자기 뼈에 새겨보아야 정말 아는 것이 되고,

나중에 더 어렵고 더 힘든 일이 닥쳐올 때, 응용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서 생활로, 생활 속에서 실천되고, 그리고 나의 인품이 된다면,
전 존재가 변화된다고 말합니다.

첫 걸음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속삭여 주고, 힘을 주고, 방향을 일러주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조금씩 다가가는데,
저만치 물려가는 장애물들을 바라보며 조금 씩 앞으로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신이 붙고, 손에 익고, 뼈에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겠지. 안되면 말구" 하는 배짱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도 조금 씩 느려질 것입니다.
충청도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직 기도 속에서 처절히 곱씹지 않았기에 함부로 말을 뱉을 수 없습니다.
내 뼈에, 내 살에 아직 새겨지지 않았는데 내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설령 가로 막는 장애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았으면 아직 아닙니다.
다 이른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하시지 않으면, 더 가야 합니다.
속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리 앞서 결정을 내리면
우리의 예측과 판단, 그리고 결정과 결단이 모두 헛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서둘러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서둘러 힘들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되면 말구!” 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햇빛보다 밝은 달이 떠올라, 길이 아니던 곳이 길이라고 가르쳐주기도 하십니다.

 

이 모든 주어짐을 아무 판단과 호/불호 없이 수용할 수 있다면,
갈 길 자체란, "잘 모르고 그냥 가는 길"일 뿐입니다.
너무 확실한 것들은 대개 이단이거나 "사람 생각을 교조화"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저 역시 유혹받습니다.
그리되면 사람들이 그 확신에 취해서 추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을 멈추고 쉬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느냐? 고 끊임없이 물어옵니다.
쉽고 편함에의 유혹은 정말 질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편함이 점점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편함을 위해 미리 갖추어야 할 것들이 너무 번잡하기 때문입니다.
걸치지 않고 지니지 않음으로 오는 평강도 있기 때문입니다.

 

의욕의 끝은 과욕과 자만으로,
맡김의 끝은 무력과 우울함으로,
지나친 열심의 끝은 자기 우상으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맡긴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성 싶습니다.

외줄 타듯 따라가지 않으면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몇 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작은 생각, 작은 불평, 작은 회한이 긴 시간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가는 길이 참 어렵지요?
그래서 중용, 중도리,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같은데, 사람 힘만으로는 잘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가 임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은혜는 정해진 궤도도 공식도 일정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손 들고 더듬으면서 따라가는 갈 뿐입니다.
시원치 않은 길잡이의 속내입니다.

(우리에게 던져지는 도전과 질문에 힘겹게 답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돈보다 귀하고, 편함보다 즐겁습니다.거친 길을 찾아 남보다 앞서 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기쁨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성도 목사  / 하나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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