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김기대
  • 승인 2015.04.22 06:51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호 목사와 그와 같은 이들에게 권하는 소설

1세대 프랑크프루트 학파 소속 비판이론가인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스실에서 특정 인종이란 이유만으로 수백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무력함과 죄책감이 1945년 종전과 함께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가스실의 만행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서정성을 앗아갔으므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서정시를 쓸만한 감성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한 때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었었다. 언제부턴가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상황처럼 소설이 읽혀지지 않았다. 소설 대신 지젝, 바디유, 아감벤, 벤야민의 책들이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발붙여 살고 있는 땅의 권력자들이 일으키는 전쟁, 인종차별, 소수자에 대한 증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IS의 만행. 고국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마침내 1년 전 세월호라는 비극이 터지고야만 현실. 이런 것들이 순수문학을 즐기던 나의 취향까지 바꾸어 버렸다.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아 지친 나머지 현실 도피심이 작동해서였을까? 비겁한 선택이지만 어쨌든 조금씩 소설이 읽히기 시작했다. 영화평론가이면서 '빨간 책방'이라는 책소개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이동진씨는 작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단편 하나를 읽어 주었다.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라는 40여 쪽의 단편인데 읽어 주기에 적은 분량은 아니다. 세상이 모두 고요해져 버린 1년 전 그날 분위기처럼 이동진은 낮고 차분하게 청취자들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운전을 하면서 듣는 책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았을 터, 제목을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1년 만에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진행자가 세월호로 슬픔에 잠긴 우리들에게 권했던 소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집 <대성당> (문학동네, 2007)에 수록된 12편의 단편 중 하나인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부부가 아이의 생일에 그 아이를 잃었다. 학교 가는 길에 가벼운 교통사고(아이가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고, 운전자는 아이가 다시 일어선 모습을 보고 줄행랑을 쳤으므로)를 당했다. 집에 제 발로 걸어 돌아온 아이는 갑자기 의식 불명상태에 빠진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사들은 곧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전하면서도 대책은 못 내어 놓고 고개만 갸우뚱 거린다. 담당 의료진의 퇴근으로 의료진이 바뀔 때마다 같은 검사, 보호자를 향한 같은 질문이 계속된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부모를 '타자화'한다.

곧 깨어날 것이라는 병원측의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여러 검사를 해봐도 아이의 상태가 혼수상태에  빠질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죽는다. 병명은 'Hidden Occlusion'(보이지 않는 혈관 폐색증)이었다. 뒤늦게 발견했지만 때는 늦었다. 병명 자체에 'hidden'(숨겨진) 이 있는 데 쉽게 발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의료진은 최선을 다하지 않아 '숨겨진' 것을 찾지 못했고 보통의 의식불명 환자의 경우로만 아이를 살피면서 부모와 교감하지 못했고 '기호'만을 교환했다.

의사들의 '기호' 속에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부모는 눈앞에서 아이를 잃었다. 세월호 유족들이 느꼈을 감정과 흡사하다.

아이(스코티)의 엄마와 아빠가 병원에서 아이 곁에 머물다가 휴식을 위해 잠시 집에 들를 때마다 이상한 전화가 걸려 왔다. 부모는 처음에 아이를 치고 도망간 뺑소니 범인인 줄 알았다. 결국 아이가 죽은 뒤 집에 돌아온 날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엄마는 괴전화의 발신인이 동네 빵집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린다. 며칠 전 스코티의 생일을 위해 엄마는 케이크를 주문했었는데 교통 사고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생일 케이크 만들어서 먹고 사는 빵집 주인 입장에서야 주문자의 아이가 죽은 사실을 모르니 손해를 보상받아야 했다. 이 주인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아도 금액은 지불해야 한다는 그 말을 못해 괴전화처럼 밤낮으로 전화를 해 대면서 소심한 복수를 했던 것이다. 

화가 난 엄마는 빵집을 찾아가 우리 아이가 죽었다고 항의를 한다. 미안해진 빵집 주인은 엄마를 진정시키고, 이럴 때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며 갓 구운 따뜻한 롤빵을 권한다. 여자는 롤빵을 세 개나 집어 먹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문다.

소설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이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거요.” 그가 말했다

“이 냄새를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 말했다. “퍽퍽한 빵이지만, 맛깔난다오.” 그들은 빵냄새를 맡았고, 그는 맛보라고 권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128쪽)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잃은 엄마도, 골목 상권의 작은 빵집 주인도 대화보다는 빵 몇 조각으로 경솔함을 뉘우치고 서로 용서하고 위로를 받는다.

<몽고반점>으로 200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도 얼마 전 읽었다. 작가의 지명도 때문에 선택한 책이 아니라 순전히 책 제목 때문이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희랍어'라는 단어는 얼마나 친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인가?  우리 끼리 이야기지만 히브리어나 희랍어 단어가 가진 다의성은 설교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 언어가 가진 신비성이라기 보다는 사회가 미분화되어 있었던 시절의 어휘가 가진 한계였는데 그것이 오늘 설교가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된다. 

<희랍어 시간>은 점점 약화되는 시력을 가진 어학원의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 버린 여성 수강생 사이의 교감을 다룬 소설이다. 독일 유학생 출신의 강사는 시력을 잃어가고, 여성은 말을 잃어가지만 '희랍어'라는 고어, 다시 말해 필요한 영역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언어가 매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에서 애틋한 교감이 발생한다.

오늘날 세분화된 사회는 말과 단어의 성찬(盛饌)의 시대다. 고어들처럼 단어 하나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 사람들은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을 더 이해하려고, 즉 그 단어가 어떤 뜻으로 쓰였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지금은 단어 하나가 하나의 의미를 가진 것처럼 사람들은 한 단어에 웃고 운다. 언어는 교감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기호'가 되어 버렸다.

두 소설 모두 언어의 '기호성'을 꼬집는다. 의사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을 때 빵 몇 조각은 스코티 엄마에게 큰 위로가 된다. 아프고 상처 입은 두 사람은 '희랍어'같은 포괄적 언어 조차 쓸모 없어진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김동호 목사의 세월호 노란 리본 발언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다. '노란 리본', 사실 별 것 아니다. 그는 위로를 위해 백마디 기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설교가들의 화려한 말로 위로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함께 리본 달아주고, 함께 들어주고, 그들에 대해 가졌던 오해를 회개하는 작은 행동들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빵집 주인처럼 아이를 잃은 부모의 아픔을 모르고(물론 그는 당연히 아이의 죽음을 몰랐었지만) 자기 빵 값 손해 난 것만 생각나서 전화를 했던 일을 빵 몇 조각으로라도 뉘우치려고 하는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굶고 있는 사람들 앞에 가서 폭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나, 실제로는 공권력의 과잉 반응으로 일어난 교통 체증을 유가족에 대한 비난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나,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은 이유를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사람들이나 내 눈에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의 원제는 'A small, Good thing' 이다. 소설가 김연수씨가 옮겼는데 제목만으로도 원제보다 훨씬 깊은 여운을 남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hadow 2015-04-26 10:31:49
진정 이해가 안된다.
김동호 목사해야하는지ㄹ 다 노란 리본을 안 단 사건이
뉴스M 에서 김기대 목사에 의해 재탕 삼탕의
글 공격을 당해야하는지
이단이나 혹은 신학적 문제라면 이해가 가나
개인적 소신으로 세 번이나 글 공격이라니
길가는 초등학생을 붙들고 물어보고 싶다.

5107 2015-04-23 14:08:01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이글을 보니, 모르는 사람 사이에도 전해지는 공감의 현실이 있군요. 계속 좋은 글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