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예수’와 함께하는 샬롬의 교회
‘변두리 예수’와 함께하는 샬롬의 교회
  • 박상진
  • 승인 2015.05.10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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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교회의 새로운 정의평화 사역(Peace and Justice Ministry) 을 위하여
이 글은 지난 1일 풀러신학교 주최 포럼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정의 은혜 율법'에서 행해진 개별 강의 중 하나로, LA 기윤실 박상진 사무국장의 강의를 옮긴 글입니다. -편집자 주

 

   
▲ 지난 1일 열린 풀러신학교 주최 포럼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정의 은혜 율법' (황진기 원장(좌), 김기대 목사, 박상진 목사, 허현 목사(우)) © <뉴스 M>

들어가는 말

눈을 들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보니 곳곳마다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불의한 현실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정의와 평화를 갈망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쉽지 않은 책이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킨 현실이 그 단면을 보여준다.

갈망과 신음의 소리에 공명되어 “믿는 자여 어이할꼬”라는 마음속 탄식이 흘러나온다. 오늘의 한인교회는 신음하는 세상을 향해 무슨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을까. 어떤 정의와 평화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한인교회의 정의평화 사역의 현실

한인교회가 정의평화 사역을 바로 감당하려면 먼저 솔직한 진단이 앞서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인교회는 정의와 평화의 무풍지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과문한 탓인지, 이십 수년이 넘게 한인교회를 다니며 정의와 평화에 관한 메시지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특수한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 정의 평화 운동에 나서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한인교회는 정의와 평화에 관한 한 무지, 무관심, 무시라는 3무의 벽으로 둘러싸인 견고한 성과 같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교회가 오늘의 한인교회다.

많은 문제와 갈등이 존재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현실을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한인교회는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사회의 중요 이슈인 인종문제를 들 수 있다. 작년의 퍼거슨에서 현재의 볼티모어까지 미국 곳곳에서는 시위와 소요가 이어지고 있다. 흑인을 상대로 한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인해 벌어진 이 사태는 본질적으로 인종편견과 빈곤, 그리고 정의와 화해의 문제이다. 한인교회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미국사회에서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한인교회는 시대의 비극인 세월호 사건에 침묵했다. 일 년 전에도 그랬고,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관심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밝혀진 것도, 해결된 것도 없는 세월호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진실이 가리어지고 정의가 무너진 사건이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유가족들과 그 눈물에 동참하는 많은 이들에게 한인교회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위와 같은 문제에 왜 교회가 대답해야 하는지, 정의와 평화에 교회가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정의와 평화에 관해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성서(Text)는 무엇을 말하는지, 한인교회가 처한 상황(Context)에서 그것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성서(Text)가 증언하는 정의와 평화

정의와 평화는 신구약 성서의 중심사상이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정의와 평화의 비전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라는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렘 22:3)

   
▲ 박상진 사무국장 © <뉴스 M>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샬롬’(shalom)이다. 샬롬은 단순히 개인의 안녕이나 전쟁이 없는 평안함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더 나아가 자연질서와의 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관계적인 용어’다.1 참된 인간의 회복과 세상의 모든 부분이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온전함(wholeness)’을 의미한다. 세상과 인간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불의와 억압, 폭력과 착취가 없어져야 한다. 모든 불의가 무너지고 정의가 바로 설 때, 즉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여 정의가 이루어질 때, 그 결과가 샬롬’으로 나타난다.2 예언자 이사야는 이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라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6,17) 결론적으로 샬롬은 정의와 평화를 포괄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샬롬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을 샬롬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이집트로 이민 간 히브리인들은 세월이 흘러 그 사회의 밑바닥 인생인 ‘하비루’(노예)로 살아갔고, 그들의 신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구원과 해방을 통한 샬롬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 당시 불의와 폭력으로 다스렸던 다른 나라의 왕과는 달리, 하나님은 직접 왕이 되셔서 이 나라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기 원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스스로 왕을 원하였고 억압과 착취를 경험한 후 샬롬의 비전을 이루는 데 실패한다.

그들은 결국 불의한 제국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 그 땅에서 강압적 이민정책의 희생자인 이민자요 소수민족으로, 또한 포로로 살아갔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샬롬의 비전을 이어가게 하셨다. 히브리인들에게 샬롬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역사 현실을 너머 바라본 희망으로서 역사의 목적이기도 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성취되는 종말론적 희망을 담아내던 단어’였다.3

샬롬의 비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다. 신약성서는 샬롬을 헬라어인 에이레네(eirene)로 표현한다. 신약성서는 에이레네의 평화를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 그리고 선포한 복음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사 9:6), 예수의 탄생이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눅 2:14).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었으며 (행 10:36),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평화의 복음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엡 6:15). 예수는 또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 (마 5:9 사역).

예수 당시 1세기는 로마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제국의 황제는 힘과 폭력을 사용 한 전쟁으로 안정적인 상태, 즉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가져왔다. 황제는 곧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칭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를 사용하여 전복적인 말씀을 하신다. 황제의 힘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거짓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 즉 하나님의 샬롬을 품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선언한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복된 자들이라고 위로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초청한다. 그 위로와 초청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황(Context)이 촉구하는 정의와 평화

오늘의 한인교회 상황에서 정의와 평화가 왜 중요할까? 물론 성서에 나타나는 샬롬의 비전이 근본적인 이유지만 한인 그리스도인 (Korean-American Christian)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한인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오늘 이곳에 있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속한 상황과 그 정체성은 무엇인가?

한인들은 이민자(Immigrants)다. 자신의 고향에서 자발적, 혹은 타율적으로 떠나온 존재이고 뿌리 뽑힌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이민 초기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보여주듯,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했고 오랜 세월을 거쳐 적응하며 살아간다. 대개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거나, 그곳을 향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현실에서는 언어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한인들은 또한 소수민족 (Minority)이다. 전체 미국사회의 1% 미만의 적은 수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 속에서 주류에 속하기 쉽지 않고, 주류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소수자들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주류의 담론과 논리에 의문을 품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라 산다. 경제적 성공과 안락한 삶을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한 예다.

마지막으로 변두리인(Marginality)이다. 백인, 남성, 중상층으로 이루어진 미국사회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주류사회의 중심까지 도달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개는 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간다. 미국 사회의 중하층 노동자로, 저소득층을 상대하는 자영업자로, 혹은 한인 커뮤니티라는 좁은 사회 안에 갇혀 있다. 미래에도 주류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낮기에, 자식 세대가 그 바람을 이루어 주길 기대한다.

이민자, 소수민족, 변두리 인생으로 살아가는 한인들은 정체성의 혼란과 소속감의 약화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미 떠나온 한국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새로운 현실인 미국사회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일종의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떠나온 곳이나, 살아가는 곳에 대한 주인의식을 잃은 채 살아간다. 시대와 역사를 고민하는 역사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희미하게나마 성취가 가능한 물질적인 성공을 이루어 안정적인 평안을 유지하는 것을 삶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 결과 사회 참여를 주저하고,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일에도 큰 관심이 없다. 미국의 인종사건과 한국의 세월호 문제에 무관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라 하겠다.

한인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정체성은 이집트의 노예요 바베론의 포로로 존재했던 히브리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이민자, 소수민족, 변두리 인생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그들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와 평화를 향한 갈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셔서 샬롬의 회복을 이루시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 오랜 꿈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제국의 중심부인 수도 로마가 아니라 식민지의 땅, 이름 없는 변두리에 임하셨다. 버려진 땅 갈릴리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 즉 샬롬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그 사회의 변두리 인생들과 그 꿈을 일구셨다.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성문 밖으로 끌려가 십자가 위에서 죽임당하셨다. 그리고 죽음의 역전을 통해 구원과 해방,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셨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이유는 ‘변두리 예수’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변두리성과 관련 없이 가르치거나 심지에 주류 사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입 맛에 맞도록 길들이는 것은 가장 비성경적이고 비역사적인 예수 읽기”라 할 수 있다.4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시작된다. 예수운동이 바로 그 사실을 증거 해 준다.

그렇기에 샬롬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 변두리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축복이요 자부심이 될 수 있다. 한인교회에서 횡횡하는 “주류사회에 진출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메시지를 그쳐야 한다. 예수는 그리 살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러한 가르침은 성서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우리의 할 일은 내가 있는 그 변두리에서 샬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네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당당하게 맘몬과 풍요의 신에 무릎 꿇지 않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함을 증언하는 일이다. 그럴 때 성공과 안정을 희구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너머,정의와 평화를 위해 땀 흘리며 미국 사회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

   
▲ 지난 1일 열린 풀러신학교 주최 포럼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정의 은혜 율법' © <뉴스 M>

한인교회의 정의평화 사역을 위한 제언

정의와 평화는 지배자의 언어이기보다 억압받는 이들의 이야기다. 주류의 소리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들려오는 외침이다. 우리가 바로 거기에 서 있다. 이민자로서 이민문제에 정의롭게 접근하고, 소수민족으로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변두리인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정의와 평화가 임하도록 외쳐야 한다.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질 때, 한인교회는 다양한 정의평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 일을 위해 한인교회는 먼저 정의와 평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선포해야 한다. 사건은 깨달음에서 발화한다.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바로 가르쳐야 한다. 정의평화의 무풍지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의 샬롬이 성서의 중심 메시지임을 말해야 한다. 누구보다 목회자가 먼저 이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미 미국교회는 복음주의 권내에도 정의평화가 중요 주제이다. 복음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정의평화 운동을 이끄는 짐 월리스, 토니 캠폴로, 로날드 사이더, 브라이언 맥클라렌, 랍 벨, 쉐인 클레어본 등의 영향으로, 여러 메가처치조차 정의평화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문제는 관심이다. 마음만 있다면 정의평화 사역에 관한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다. 오늘의 미국과 세계의 주요 이슈인 이민정책과 인종문제,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동성애와 낙태, 범죄와 총기규제, 인권과 환경, 전쟁과 테러, 중동과 세계화 문제 등을 샬롬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할지 함께 공부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둘째, 정의와 평화에 기반한 교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여러 한인교회가 불평등한 교회 구조로 인한 분쟁과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목회자 중심의 제왕적 구조를 지양하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평등한 의사결정구조와, 갈등을 조정해 나가는 화해사역과 갈등전환과정에 눈을 떠야 한다. 교회 스스로가 정의로운 구조를 가지지 못한 채, 샬롬을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정의와 평화의 실천은 교회 안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방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가 나누어지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전진기지다.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는 전진기지의 임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 교회구조를 혁신하고 변화하는 노력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셋째, 대외 사역을 봉사와 구제, 해외선교에 국한하지 말고 정의평화 사역으로 확대해야 한다. 정의평화 사역을 추상적이고 거대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 없다. 지역사회의 필요가 무엇인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낯선 이들을 초청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감추인 목소리가 들리도록 장소를 개방하고, 정의로운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단체들과 연대할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돌보기, 빈곤과 주거 해결, 환대의 문화 만들기, 지역을 위한 장소 제공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있는 그 곳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한인교회는 미국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 정치와 사회 영역에 그리스도인들이 샬롬의 정신을 품고 참여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복음주의 정의평화 운동을 이끄는 <소저너스>의 짐 월리스는, “하나님은 공화당원도 민주당원도 아니다”라면서,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미6:8)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도록 독려한다.5 교회가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 진영논리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라는 관점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이란 거대 제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행하는 부정의한 일에 항의하는 일, 아직도 계속되는 흑인들에 대한 경찰의 과잉 폭력에 반대하고 연대하는 일, 보다 관대한 이민정책과 소수민족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일, 동성애 문제를 보다 거시적으로 이해하며 소수자의 인권과 평등의 관점으로 접근해 보는 일, 한인사회의 저임금 노동자 역할을 감당하는 라티노들에게 환대를 보여주고 정당한 대우를 해 주는 일, 더 나아가 갈라지고 나누어진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일 등, 교회는 사회문제에 대한 기독교 윤리를 재정립하고, 세상을 향해 샬롬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나가는 말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하지만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는다고 한다. 농부의 마음으로 정의 평화 사역의 씨앗을 뿌려보자.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은 적은 무리에서 시작됨을 기억하자.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며 샬롬의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딜 때, 한인교회의 정의평화 사역은 겨자씨처럼 퍼져 가리라 믿음의 눈 들어 바라본다.

박상진 목사 / LA기윤실 사무국장 

<참고문헌>

1. 알렌&엘레노드 크라이더, 평화교회는 가능한가? (KAP, 2003)
2. Perry Yoder, Shalom: The Bible’s Word for Salvation, Justice, and Peace (Evangel Publishing, 1987)
3. 박충구, 종교의 두 얼굴: 평화와 폭력 (홍성사)
4. 박총, 욕쟁이 예수: 교양과 상식 너머, 길들여지지 않은 예수의 맨 얼굴 (살림)
5. 짐 월리스, 하나님의 정치: 기독교와 정치에 관한 새로운 비전 (청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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