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
  • 곽건용
  • 승인 2015.06.05 07:1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향린교회, 곽건용 목사 이전감사예배 설교
남가주의 진보적 교회 중 하나인 향린교회(담임 곽건용 목사)가 한인타운(First Congregational Church)으로 이전했다. 곽건용 목사는 지난달 31일(주일) ‘이전 감사예배’ 에서 요한복음 3장 1-8절을 본문으로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설교를 함께 나눈다.  - 편집자 주-

“거짓말의 발명”

   
▲ 곽건용 목사 (사진제공: 향린교회)

루쉰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글이어서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소학교 때 선생님이 루쉰에게 이런 얘길 해줬다고 합니다.

어떤 동네 부잣집에 아들이 태어났답니다. 그 집뿐 아니라 동네에 경사가 난 거죠. 그래서 아버지는 아기를 안고 동네를 돌면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습니다. 축하를 받겠다고 말입니다. 동네사람들은 덕담을 한 마디씩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 아기가 크면 부자가 될 거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큰 벼슬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장차 죽겠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지요. 동네사람들이 그를 죽도록 때려줬다는 겁니다. 부자가 될지 높은 벼슬을 할지는 커봐야 알겠지만 죽는다는 건 분명한데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얘기를 한 사람은 칭찬을 받았고 확실한 사실을 얘기한 사람은 매를 맞은 겁니다.

그 애기를 들은 학생이 “저는 거짓말도 안 하고 매도 맞지 않고 싶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와, 이 아이는 정말... 얼마나... 아이구, 참내... 허허허...” 내용 있는 얘기는 하지 말고 내용 없는 감탄사만 연발하면 된다는 겁니다.

<거짓말의 발명> The Invention of Lying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크게 히트해서 돈을 많이 번 영화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 영화는 거짓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만 사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게 된 남자에 대한 영화입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글에 이 영화 얘기가 나오기에 오래 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요즘 얼굴색도 안 바꾸고 밥 먹듯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거짓말 안 하는 정직한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요.

영화는 정직한 사람들만 사는 사회도 거짓말쟁이들이 많은 사회만큼 문제가 많다는 걸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기라고 해서 다 예쁘게 생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덜 예쁜 아기도 있고 못생긴 아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아기를 보고 “어머, 아기가 정말 못생겼어요. 꼭 쥐새끼 같네요.”라고 말하거나 못생긴 사람더러 “당신은 뚱뚱하고 들창코인데다 두꺼비를 닮아서 키스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화에서 어쩌다가 거짓말을 할 줄 알게 된 주인공이 이런 세상을 바꿉니다. 음식솜씨가 형편없는 아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거짓말을 하니까 아내가 무척 행복해 하더랍니다. 연세가 많아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머니에게는 축복이 넘치는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줬더니 어머니가 한결 두려움을 덜 느꼈습니다. 그는 거짓말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독일의 어떤 사람이 40일 동안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실험을 해봤다고 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25년 동안 사귄 친구에게 거짓말 하지 않고 모든 걸 솔직하게 말했더니 불과 사흘 만에 친구를 잃을 뻔 했다는 겁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란 게 있다고 말합니다. 악의가 없는 거짓말, 좋은 의도로 하는 거짓말을 그렇게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도 거짓말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압도적으로 많을 겁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걸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말하면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것도 거짓말일까요? 잘 따져보면 이것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잘 알지 못하는데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기도 알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입니다. 또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아무리 수련을 해도 알 수 없는 것 말입니다.

종교에서는 그걸 ‘신비’(mysterium)라고 부르는데 이런 게 있어서 종교가 가능한 겁니다. 종교에서 ‘신비’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무엇입니다. 아무리 많은 걸 알아도, 아무리 영성이 깊어도 도저히 꿰뚫어 알 수 없는 것, 그걸 우리는 신비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신비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렇듯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종교를 갖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입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모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진보적인 기독교인이 필요한데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데 모여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열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앞뒤가 막힌 답답한 기독교인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열린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개신교가 이토록 욕을 먹나 싶습니다. 다들 멀쩡한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열린 생각과 진보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흩어져 있으니 힘을 모을 수 없고 힘을 모을 수 없으니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흩어져 있으면 에너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좋은 기운은 모여 있어야 생기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수백, 수천 명이 모인 곳에만 함께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두세 사람만 모인 곳에도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란 뜻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두세 사람이 작은 숫자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모여야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는 잘못된 믿음을 고쳐주시려는 게 아니라 모래알처럼 혼자 있지 말고 두세 명이라도 모여서 함께 있으라는 뜻입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곧 공동체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 향린교회 이전감사예배 (사진제공: 향린교회)

“이것은 진보적인 교회가 아니다”

진보적인 교회에 대해서 두 가지 오해를 풀고 얘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진보적인 교회는 진보적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진보적인 교회에서 진보적인 목사가 목회를 할 수는 있지만 진보적인 목사가 목회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보적인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진보적인 목사가 하자는 대로 ‘순종’하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가 아닙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평신도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평신도’란 말은 성직자과 구별하는 말이므로 쓰고 싶지 않지만 다들 그렇게 쓰기 때문에 저도 할 수 없이 쓰긴 하지만 좋은 말은 아닙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목사에게 모든 게 달려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진보적인 교인은 삶이나 신앙에 있어서 확고한 주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진보적인 신앙을 갖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진보적인 교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독교인이지 목사에게 순종하는 교인이 아닙니다. 진보적인 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르는 교인이지 목사의 제자가 되어 목사를 따르는 교인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목사만 진보적인 신앙과 신학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가 목회하는 교회가 진보적인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인들이 진보적인 신앙을 가져야 진보적인 교회입니다. 목사만 진보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목사가 죽거나 다른 데로 가면 말짱 헛일이 되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런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미국 동부에 있는 교회로서 당시에는 알아주는 진보적인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목사가 매우 진보적인 신앙과 신학으로 그런 목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다른 교회로 갔습니다. 그러자 그 교회가 그 이전의 교회로,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보수적인 교회로 바뀌는 데 몇 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는 목사만 진보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이 교회의 경우를 목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예로 듭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제게 이 교회는 목사가 아니라 교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경우입니다. 교인들이 주체적으로 바뀌지 않으니까 진보적인 목사가 목회하는 동안만 그 목사의 신앙과 목회를 따라갔을 뿐이었던 겁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진보적인 교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진보적인 교회는 깨어있는 기독교인들이 교회로 모일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둘째로, 진보적 신앙은 보수적 신앙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진보적인 신앙은 보수적 신앙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보수적인 신앙이 성서의 축자영감설(상서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서 신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오류가 없다는 이론)을 믿으니까 진보적인 신앙은 그걸 믿지 않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보수적인 신앙이 태양이 하늘 한 가운데서 멈췄다고 믿으니까 진보적 신앙은 그걸 믿지 않고, 돌도끼가 물위로 떠올랐다고 믿으니까 그걸 믿지 않고 홍해가 둘로 갈라졌다고 믿으니까 그걸 믿지 않는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진보적 신앙은 보수적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보교회의 두 가지 특징”

흔히 진보적 기독교를 영어로는 ‘liberal Christianity’나 ‘progressive Christianity’라고 부르지만 제가 생각하는 진보적 기독교는 이런 말들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보적인 신앙은 두 가지 성격을 갖습니다.

첫째로, 진보적인 신앙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믿는 만큼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고 안 믿어지는 것은 안 믿어진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모를 게 있음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르는 걸 안다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진보신앙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데 믿는 것처럼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보 신앙입니다. 모르는 것 모른다고 인정하면 답을 찾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답은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각자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어진 답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걸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둘째로, 진보적 신앙은 하늘과 땅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표현하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라고 믿는 신앙이 진보신앙입니다. 진보신앙에서도 하늘과 땅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입니다. 하지만 진보신앙은 이 둘이 구별되지만 별개라고 믿지 않고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진보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고 싶으면 하늘과 땅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땅의 일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땅만 봐서는 안 되고 하늘도 동시에 봐야 한다고 믿는 신앙이 진보신앙입니다.

진보신앙은 하늘과 땅이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자연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무엇이든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관계’를 보는 눈입니다. 한 사람이 누군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연기설’(緣起說)이라고 부르는데 진보신앙도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믿는 것이니 틀렸다거나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위에서 인용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모든 교회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믿음이 옳다고 믿지만, 그리고 향린교회 교우들의 대체로 그렇게 믿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이 같은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신앙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인 타운에도 이런 교회가 몇 개쯤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몇 개쯤은 말입니다. 저는 다양한 색깔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것처럼 다양선 성향을 가진 교회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세상도 기독교를 반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중에 진보적인 교회를 조금은 튀는 색깔을 갖겠지요.

곽건용 목사 / 향린교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Philip Im 2015-07-05 02:45:59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글의 내용으로 보아 굳이 진보적인 교회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마치 보수적인 교회는(물론 필자의 개념에 의하면 보수라는 말 자체가 아무 의미없지만) 거짓말하는 교회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하지 마시기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교회 공동체는 글에서 말한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JJJ 2015-06-06 15:15:15
알아서들 믿으삼...어짜피 자기 신앙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가서 책임 지는 것이니..."세상도 기독교를 반길 것이라고 믿습니다"...그럼 예수님이 거짓말 하셨네...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 하셨는데..